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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근대철학

존재론적 신 존재 증명에 대한 칸트의 비판

존재론적 신 존재 증명에 대한 칸트의 비판


안 윤 기 서울대


1. 들어가는 말


이 글은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에서 존재론적 증명을 어떻게 비판하고 있는지를 고찰하면서, 그 비판의 근거가 되는 칸트의 존재론을 구명함에 그 목적을 가진다. 11세기에 안셀무스에 의해 존재론적 신 존재 증명이 최초로 체계적인 형태로 제시된 이후, 그것에 대한 찬반 논쟁의 장구한 역사 속에서 칸트가 차지하는 위치는 그 어느 누구의 위치보다 두드러진다. 특별히 그가 자신의 주저 <순수이성비판>에서 행한 논의들에 대해 많은 주석가들은 찬사를 아끼지 않았는데, 예컨대 월쉬는 사변 신학에 대한 칸트의 비판은 "파괴적"이라 평가하였으며, 힉은 칸트를 "데카르트식으로 제시된 존재론적 증명에 대해 가장 철저하고도 치명적으로 비판을 한 사람"이라고 묘사하였다. 브로드는 주장하기를 "존재론적 증명에 대한 칸트의 비판은 아주 결정적인 것"이라 하였고, 스트로슨도 브로드와 마찬가지로 칸트의 비판을 "정말로 결정적"이라 하였다. 또한 윌커슨 같은 사람은 칸트의 논의 속에 몇 가지 흠이 있기는 하나, "대체적인 큰 줄기에 있어서 이 논박은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고 말했고, 유잉은 "그 논변에 대한 칸트의 반박 중에서 단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든 100탈러 비유였다. 그것은 다소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평가했으며, 심지어는 보통 칸트를 신랄하게 비판하곤 했던 베넷트조차도 존재론적 신 존재 증명에 대한 칸트의 비판은 "참일 수도 있는 중요한 뭔가를 담고 있다"고 말했다.

이러한 주석가들의 한결같은 의견은 요컨대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에서 존재론적 증명을 결정적으로 논박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은 그러한 의견에 동의하고, 이 논박된 증명 방식에 관해 더 이상 관심을 두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과연 이 증명 방식을 그토록 결정적으로 반박한다는 일이 도대체 가능한 일인지 의문이 생긴다. 왜냐하면 존재론적 신 존재 증명에는 안셀무스 개인 혹은 그 당시의 주도적 사상의 존재론적 입장이 논변의 단계 단계마다 전제로서 개입되어 있어서, 만일 비판이 가해진다면 그 전제들이 비판받아야 하는데, 도대체 존재론적 전제들에 대한 완벽한 비판이란 가능한 것 같지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한 사상의 심층 기저를 이루고 있는 전제들에 있어서는 그것이 옳다, 그르다가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패러다임 전환과 같은 것만 가능한 것이 아닐까?

이러한 문제 의식을 가지고 이제 나는 칸트가 <순수이성비판> 초월적 변증론에서 존재론적 신 존재 증명을 비판하는 내용을 중심으로 하여, 그것을 몇 개의 단락으로 나누어 고찰해 보고, 칸트의 비판에 대해 존재론적 증명의 옹호자들은 과연 무기력하게 당하고 있어야만 했는지,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이 비판에 대해 그들이 응수할 수 있을지를 생각해 보는 순서로 논의를 진행시켜 보겠다.


2. 절대 필연적 존재자와 판단의 필연성


(1) 절대 필연적 존재자


칸트는 <순수이성비판> 초월적 변증론에서 신이라는 이념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지칭했는데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 세 가지만 들면 다음과 같다.


a. 가장 실재적인 존재자(ens realissimum)

b. 근원적 존재자(ens originarium), 최고 존재자(ens summum),

모든 존재자들 중의 존재자(ens entium)

c. 필연적 존재자(ens necessarium)


이 중 존재론적 신 존재 증명을 비판함에 있어서 칸트에게 우선적인 고려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절대 필연적 존재자"(absolut notwendiges Wesen)라는 명칭이었다. 칸트는 존재론적 증명의 힘이 "절대 필연적 존재자"라고 하는 신의 개념 규정에 놓여 있는 것으로 보았다. 이 증명의 옹호자들은 신을 그렇게 규정한 뒤에, "절대 필연적 존재자"란 "그것의 비존재가 불가능하며"(B. 620), 따라서 신은 필연적으로 존재할 수 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칸트가 보기에 이러한 옹호자들의 이야기는 이미 그 출발점이 되는 "절대 필연적 존재자"라는 개념에서부터 문제를 안고 있는 것이었다. 칸트가 생각하기에 "절대 필연적 존재자"라는 개념은 순수 이성 개념, 즉 한갓 이념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이념이라는 것은 그 개념의 객관적 실재성(objektive Realität)이 결코 증명될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절대적으로 필연적인 존재자"라는 대담한 개념에 대해 오랫동안 말해 왔으면서도, "도대체 우리가 이런 종류의 사물을 생각조차 할 수 있을지, 할 수 있다면 어떻게 할 수 있는지"를 알려 하기보다는, 오히려 "어떻게 하면 그것의 현존을 증명할 수 있는지"(B. 620)를 알기 위해 훨씬 더 많은 노고를 기울여 왔다. 그리고 "절대적으로 필연적인 존재자는 그것의 비존재가 불가능한 것이다"라는 한갓 명목상의 설명을 통해 그것의 존재를 확보하려 하였다.

그러나 칸트의 관심사는 그 보다 한층 더 깊은 곳에 가 있었다. 만일 옹호자들이 신의 개념을 "절대 필연적 존재자"로 규정하고, 거기서 신의 현존을 도출해 내려면, 먼저 "절대 필연적 존재자"라는 개념을 가능하게 해 주는 조건으로 어떤 것들이 있으며, 과연 신은 그런 조건들을 만족시키는지가 먼저 확보되어야 한다는 것이 칸트의 생각이었다. 다시 말해서 "어떤 사물의 비존재를 단적으로 생각할 수 없게 하는 조건들이 무엇이냐"(B. 620)를 칸트는 묻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이 조건에 대한 물음에 적절한 답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그리고 단지 "무조건적으로 그렇다"(Unbedingt, B. 621)라고 하는 무성의한 대답밖에는 주어지지 않는다면, "과연 우리가 이 무조건적으로 필연적인 존재자라는 개념을 가지고 무엇인가를 정말로 생각하고 있는지, 아니면 생각하는 흉내만 내고 실제로는 아무것도 생각하고 있지 않는 것은 아닌지"(B. 621) 도저히 분간할 수조차 없게 되기 때문이다.


(2) 판단의 절대적 필연성과 사태의 조건적 필연성


그러나 옹호자들은 이러한 칸트의 질문에 적절한 대답을 주려 하기보다는, 오히려 수많은 사례들을 들면서, 이 개념에 대해 보다 자세한 해명을 요구하는 공격자들의 모든 시도를 무마시키려 한다. 예컨대 "삼각형은 세 각을 갖는다"는 기하학의 명제는 단적으로 필연적이다. 마찬가지로 "절대 필연적 존재자는 필연적으로 존재한다"는 명제도 필연적으로 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근원적 존재 필연성에 대한 증명이 기하학적 통찰과 유비 관계에 있다는 생각은 근대 이성주의 철학자들의 공통된 견해였다. 특별히 신의 존재를 증명함에 있어서 삼각형의 세 각에 호소했던 것은 데카르트의 제 5 성찰에 최초로 나타나는 것으로서, 기하학적 방법으로(more geometrico) 모든 학문을 견고하게 재구성하려 했던 그의 의도에 비추어 볼 때, 그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런 예를 든 것은 그리 납득하기 어려운 사실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칸트는 위의 사례가 절대 필연적 존재자의 필연적 현존을 유비적으로 나타내 보여주는 데 그리 적절하지 못하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위의 사례는 "단지 판단에서 취해 온 것이지, 결코 사물과 그것의 현존에서 끌어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B. 621). 칸트에게서 판단의 필연성과 어떤 사태 혹은 술어의 필연성은 전혀 구별된 것이었다. "판단의 무조건적 필연성이 결코 사태의 절대적 필연성이 될 수 없다."(B. 621) 위의 예가 말하는 것도 단지 삼각형과 세 각 사이의 본질 포함 관계이거나, 삼각형의 현존이 주어진다는 조건 하에서 세 각의 현존이 필연적으로 도출된다는 것이지, 단적으로 세 각의 필연적 존재가 주장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판단의 절대적 필연성은 판단 중의 술어 혹은 사태의 조건적 필연성만을 말해 줄 따름이지, 결코 사태의 무조건적 필연적 현존이 거기서 확보되지는 않는다고 칸트는 말했던 것이다.


(3) 비판적 고찰


여기서 우리는 이미 칸트가 현존, 더욱이 필연적 현존을 주체의 본질 중에 속할 수 있는 속성과 구별하고 있다는 것을 보게 된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뒤에 좀더 자세히 다루겠지만, 만일 이 증명의 옹호자들이 대개 생각하듯이 현존을 한 사물의 본질에 속하는 실재적 속성 중 하나로 생각할 수 있다면, 위의 사례는 절대 필연적 존재자의 필연적 존재를 유비적으로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될 수도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삼각형은 세 각을 갖는다"는 기하학의 명제가 필연적으로 참인 것은 그것이 분석 판단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분석 판단의 술어는 주어의 개념에 아무 것도 보태는 바 없이 오직 주어 개념을 분해함을 통해 얻어질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존재론적 논증의 옹호자들은 "절대 필연적인 존재자가 존재한다"는 명제를 이러한 분석 판단의 하나로 제시하려 하였다. "절대 필연적 존재자"라는 주어 개념을 분석해 볼 때 우리는 이 개념의 기체(基體) 구실을 하는 "존재자"(Wesen, ens)라는 명사와 마치 일종의 속성처럼 그것을 꾸며 주고 있는 "절대"(absolut), "필연적"(notwendig)이라는 부사와 형용사를 얻게 된다. 이러한 단어들을 통해 우리가 선험적으로 이끌어 낼 수 있는 긍정 판단들은 "절대 필연적 존재자는 존재한다", "절대 필연적 존재자는 필연적으로 존재한다", "절대 필연적 존재자는 절대 필연적으로 존재한다" 등이다. 이것들 모두는 "삼각형은 세 각을 갖는다"와 마찬가지로 필연적으로 참인 진술들이며, 옹호자들이 염두에 두었던 것도 바로 이 "절대 필연적 존재자는 존재한다"는 판단의 필연적 진리됨이었으리라 생각된다. 왜냐하면 어떤 것이 맞느냐, 틀리느냐는 진리의 문제는 본래 판단에 대해서만 이야기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위의 논증에서 정말로 문제거리가 될 수 있는 것은 칸트도 올바르게 지적하고 있듯이 "절대 필연적 존재자"라고 하는 대담한 개념이 과연 선험적으로 허용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 개념은 명목상 "존재"의 필연성을 이미 내포하고 있기에, 일단 이 개념이 허용된다면 "절대 필연적인 존재자가 존재한다"는 판단은 논리적으로도 필연적으로 참될 것이다. 그러나 아마도 칸트는 "절대 필연적 존재자"라는 개념이 이미 존재를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결코 용납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옹호자들이 주장하고 있는 것이 마치 삼각형의 "세 각"과 같은 우연적인 존재자의 현존 정도인 것으로, 그래서 삼각형이 현존한다는 "조건하에서 단적으로 필연적으로 현존하는 것으로"(B. 622)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왜냐하면 칸트에게서는 어떤 것이 필연적으로 실존하기 위해 반드시 충족시켜야 하는 조건이 있는데, "절대 필연적 존재자" 같은 개념은 결코 그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3. 어떤 부정적인 존재명제도 자기모순적이지 않다.


(1) 존재 명제의 특이성


앞에서 존재론적 신 존재 증명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기하학의 필연적 명제를 사례로 들면서 신의 필연적 현존을 도출해 내려는 시도에 대해, 두 경우는 확실히 구별되는 전혀 별개의 것이므로 그 두 경우 사이에 어떠한 유비도 불가능하다고 논박한 칸트는, 이번에는 동일한 사례를 약간 각도를 바꾸어서 고찰함으로써 또 다시 옹호자들이 주장하는 그러한 유비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해 보이려 한다.

논리학의 동일 판단에서 우리는 술어가 주어에 필연적으로 귀속한다고 말하고, 만일 주어는 그대로 놔둔 채 술어만을 제거하면 모순이 생긴다고 한다. 예컨대 "삼각형은 세 각을 갖는다"는 동일 판단에서 주어에 필연적으로 귀속하는 술어를 제거하면, 즉 "삼각형은 세 각을 갖지 않는다"라고 하면 이 명제는 자기 모순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 우리가 만일 주어인 삼각형 마저 제거해 버린다면, 그래서 판단 자체를 중단한다면 거기에는 어떠한 모순도 있지 않게 된다.

칸트는 이러한 사정이 절대 필연적 존재자에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만일에 "절대 필연적인 존재자가 존재한다"는 것이 필연적인 명제라면, "절대 필연적인 존재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모순을 일으켜야만 할 것이다. 그런데 뒤의 문장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이 문장이 지금 뜻하고 있는 바가 무엇인가? 바로 주어 개념 자체의 제거를 뜻하고 있는 것이다. 위의 삼각형의 예에서도 보았듯이 주어 개념 자체가 그의 모든 술어와 함께 제거된다면, 거기에는 어떤 모순될 것도 남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절대 필연적 존재자는 존재한다"는 명제는 그 술어를 부정해도 모순이 되지 않기 때문에 결코 필연적 명제가 아닌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일은 "절대 필연적 존재자"의 존재 주장뿐만 아니라 그 외의 모든 존재 주장에도 해당되는 것이니, 결국 어떤 존재 명제도 필연적 명제일 수 없게 되는 것이다.


(2) 결코 제거될 수 없는 주어가 있는가?


존재론적 증명의 옹호자들은 칸트가 제기하는 바 주어, 술어 다 제거하는 상황에서 어떤 모순이 일어날 수 있겠느냐는 비판에 대해, "결코 제거될 수 없는 몇몇 주어들이 있고, 그것들은 언제나 존속해야만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반박하려 한다(B. 623). 이것은 절대 필연적 존재자도 우연적 존재자와 마찬가지로 얼마든지 제거될 수 있는 것처럼 말했던 칸트의 이야기가 이미 그의 주관적 견해를 전제하고 있다는 비판이다. 과연 이들의 말처럼 "절대 필연적인 존재자는 필연적으로 존재한다"는 명제에서 술어의 부정을 통해 주어가 제거 가능한 상황을 상상해 본다는 것은 이미 주어의 존재 필연성을 부인할 수 있는 가능성을 뜻하는 것이기에, 지금 논란이 되고 있는 것에 대한 자기의 입장을 전제하는 선결 문제 요구의 오류를 칸트가 범한 셈이 된다. 따라서 옹호자들이 주어가 결코 제거될 수 없는 몇 가지 상황이 있다고 칸트에게 요구하는 것은 그들의 입장에서 볼 때는 당연히 할 만한 이야기였던 것이다.

그러나 칸트는 "결코 제거될 수 없는 몇몇 주어들이 있다"는 옹호자들의 주장이, 결국은 "단적으로 필연적인 주어들이 있다"는 주장의 강변밖에 안된다고 하면서 오히려 선결 문제 요구의 오류를 옹호자들에게 돌린다. "결코 제거될 수 없는 몇몇 주어들이 있다"는 것은 현재 의심의 여지가 있어서 논의가 되고 있는 하나의 전제일 뿐인데, 어떻게 그것을 기정의 사실인 양 주장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면서 칸트는 "나는 그것이 그것의 모든 술어들과 함께 제거될 때 모순을 일으키는 그런 사물을 조금도 생각할 수 없다"(B. 624)고 대답함으로써 이 문제에 대한 논의를 끝낸다.


(3) 비판적 고찰


지금 어떤 명제의 주어가 제거될 수 있느냐, 없느냐 함에 있어서 옹호자들과 칸트의 입장이 팽팽하게 대립하고 서로에게 선결 문제 요구의 오류를 돌리고 있는 이 상황에서, 실상 선결 문제 요구의 오류는 칸트가 범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절대적으로 필연적인 존재자는 필연적으로 존재한다"는 명제에서 주어의 제거 가능성을 전제한다는 것은 이미 "필연적 존재자"라고 하는 개념의 부정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삼각형은 세 각을 갖는다"라는 명제에서 주어인 "삼각형"은 우연적 존재자이기 때문에 제거될 수 있으며, 따라서 세 각의 존재도 모순 없이 부정될 수 있다. 심지어는 "신 = 필연적 존재자"라는 등식이 아직 전제되지 않는 상황이라면, 그리고 "전능함"이라는 속성이 신의 개념에 본질적으로 속하는 것이라면, "신은 전능하다"는 명제는 논리적 필연적으로 참일 수는 있어도, 주어인 "신"이나 술어인 "전능하다"는 제거 가능한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되고 있는 명제의 주어는 "절대 필연적인 존재자"이다. "절대 필연적 존재자"라는 술어에서 분석적으로 나올 수 있는 술어는 오직 그 주어가 "절대 필연적으로 존재한다"는 것밖에 없는 것이다. "절대 필연적인 존재자"라는 개념 자체의 현실화 가능성을 따진다면 그것은 적절한 비판이 되겠지만, 이미 이 개념의 사용을 잠정적으로 허용한 상황에서 "절대 필연적인 존재자"라는 주어의 제거 가능성을 말한다는 것은 이미 이 주어의 비존재 가능성을 말하는 것이고, 그것이 왜 불가능하냐고 칸트가 반문하였다는 것은, 그가 지금 논란이 되고 있는 문제에 대한 자기의 입장을 이미 기정의 사실인 것처럼 생각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이 점에서 선결 문제 요구의 오류는 칸트에게로 돌아가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4. 가장 실재적인 존재자


(1) 사실에 의한 증명


어떤 존재 명제도 그것의 부정이 자기 모순되지 않는다고 하면서 존재론적 신 존재 증명을 비판하였던 칸트에 대해 이 증명의 옹호자들이 응수하였던 또 한 가지 방법은 소위 "사실에 의한 증명"(der Beweis durch die Tat, B. 624)이었다. 그들은 주장하기를, 다른 것은 몰라도 오직 이 하나의 대상만은 그것이 존재 명제의 주어로 사용될 때 결코 제거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것의 대상의 비존재 혹은 제거가 그 자체로 모순이 되는 하나의 개념, 그것도 오직 이 단 하나의 개념이 있다. 그것은 가장 실재적인 존재자(allerrealstes Wesen)의 개념이다."(B. 624)


그러면서 덧붙여 말하기를 "그것은 모든 실재성(Realität)을 가지며, 그런 존재자를 가능한 것으로 상정하는 것은 정당한 일"(B. 624)이라고 한다.

어찌 보면 이것도 앞에서 우리가 살펴보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옹호자들의 강변일 뿐이고, 지금 팽팽히 의견이 맞서고 있는 문제 그 자체에 대한 옹호자들의 근본 입장일 뿐이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해야 할 점은 문제가 되고 있던 신의 개념이 "절대 필연적 존재자"에서 갑자기 "가장 실재적인 존재자"로 바뀌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후의 논의에서 칸트의 공략 대상이 되는 것도 바로 이 "가장 실재적인 존재자"라는 개념이었다. 왜 갑자기 개념을 바꾸어 사용할까? 그리고 신의 개념이 이렇게 바뀌었는데도 칸트는 존재론적 신 존재 증명에 대한 일관된 비판을 할 수 있을까?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칸트는 "절대 필연적 존재자"라는 개념이나 "가장 실재적인 존재자"라는 개념 모두 사실상 동일한 하나의 대상 "신"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물론 이성이 각각의 개념에 도달하게 되는 과정은 달랐다. "가장 실재적인 존재자"는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일관되게 규정되어 있다"(B. 601)는 일관된 규정의 원칙에 따르려는 이성의 욕구에 의해 생긴 이상이었고, "필연적 존재자"는 조건지워진 우연적 존재자로부터 그것의 원인을 찾아서 계속 소급하려는 이성의 욕구에 의해 불가피하게 생기게 된 "근거로 소급되는 조건들의 계열"(B. 612)을 완성시키기 위해 요청된 이상이었다. 그러나 어떤 것이 조건적 우연적 존재자의 근거 소급 계열을 완성시킬 수 있으려면, 그것은 어느 모로 보나 결함이 없어야 하고, 즉 모든 항목의 실재성을 소유해야 하고, 그것도 최고도로 소유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원인에게서 발견될 수 없는 실재성이 결과에서 생겨날 수 없고, 결과는 원인보다 더 높은 정도의 실재성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칸트는 오직 "최고의 실재성을 가진 존재자의 개념만이 무조건적으로 필연적인 존재자의 개념에 가장 적합할 수 있다"(614)고 말한다. 이것은 곧 논의의 대상을 "절대 필연적 존재자"에게서 "가장 실재적인 존재자"로 바꾸어도 좋다는 승낙인 셈이다.

이제 옹호자들은 단지 "가장 실재적인 존재자"라는 개념을 상정하는 것이 정당한 것이었다는 사실로부터 곧바로 그 개념 대상의 제거는 불가능함을 증명해 내려 하는데, 그 도출은 다음과 같은 순서로 진행되었다.


a. "가장 실재적인 존재자"라는 개념은 그 정의상 모든 실재성을 소유한 어떤 사물의 개념이다. (정의)

b. "가장 실재적인 존재자" 개념은 자기 모순적이지 않다. (전제)

c. "모든 실재성"에는 존재가 포함된다. (전제)

d. "가장 실재적인 존재자" 개념은 존재를 포함한다. (a, c)

e. "가장 실재적인 존재자"가 존재하지 않으면 "가장 실재적인 존재자" 개념은 자기 모순이 된다. (d)

f. "가장 실재적인 존재자"는 존재한다. (b, e)

g. 그러므로 "가장 실재적인 존재자"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우리가 말한다면, 이는 모순을 말하는 것이다.


(2) 논리적 가능성과 실재적 가능성


위의 논변에서 칸트는 "모든 실재성에는 존재가 포함된다"는 전제 c 는 거부하나 "'가장 실재적인 존재자'라는 개념은 자기 모순적이지 않다"는 전제 b 는 인정한다. 따라서 "가장 실재적인 존재자"를 가능한 것으로 상정하는 것은 정당한 일이라는 옹호자들의 주장에 대해, 칸트는 일단 긍정한다. 그러나 칸트는 그럼에도 가능성은 두 가지로 구분되어야 한다고 대응하는데, 그 두 가지란 개념의 가능성과 사물의 가능성, 바꿔 말해서 논리적 가능성과 실재적 가능성이다. "가장 실재적인 존재자" 같이 어떤 개념이 자기 모순을 포함하지 않을 때, 그 개념은 가능한 것이다. 이때 그 개념의 대상은 최소한 "부정적 무"(nihil negativum)가 되는 것은 피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 개념은 공허한 개념일 수 있는데, 이러한 일은 언제 일어나냐 하면 그 개념이 산출된 종합의 객관적 실재성이 제시되지 못할 때이다. 그리고 종합의 객관적 실재성은 결코 분석 판단의 원칙이 되는 모순율에 의거하지 않고, 경험 가능성에 의거하는 것이었다. 칸트는 이러한 자기의 입장을 "순수 지성의 원칙들의 체계"(B. 187ff)에서 상세히 개진하였는데, 요컨대 "만일 하나의 인식이 객관적 실재성을 가져야 한다면, 다시 말해서 어떤 대상과 관계하고, 그 대상에서 지시체(Bedeutung)와 의미(Sinn)를 가져야 한다면, 그 대상이 어떤 방식으로든 주어질 수(gegeben) 있어야만" 하며, "대상이 주어진다는 것은 그 대상이 직접적으로 직관에 나타나는 것이므로 ( ) 경험이 가능하다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모든 선험적 인식에다 객관적 실재성을 주는 것"(B. 195)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저 "가장 실재적인 존재자"라는 개념이 설령 모순을 범하지 않아서 그 개념의 논리적 가능성이 확보될 수 있었다 해도, 거기서 그 개념의 대상의 실재적 가능성이 곧바로 추론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전제 b 에 대한 칸트의 재해석이었던 것이다.


(3) 존재 명제는 분석판단인가, 종합판단인가?


이제 칸트는 존재론적 증명을 옹호하는 자들을 곤경에 빠뜨리기 위하여 "어떤 사물이 존재한다"는 명제가 분석 판단인지 종합 판단인지를 묻는다. 만일 옹호자들이 이 질문에 대해 존재 명제는 분석 판단이라고 대답한다면, 우리는 그 사물이 존재한다는 명제를 통해 아무 것도 새로 배우게 되는 것이 없을 것이고, 그럴 경우에 우리의 머릿속의 개념이 사물 자체가 되거나, 즉 "그것이 있다고 내가 생각함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것이거나, 아니면 옹호자들이 우선 단지 가능할 뿐이었던 현존을 전제한 뒤, 마치 그 개념의 내적 가능성에서 그 개념 대상의 현존을 도출해 낸 것처럼 사칭하는 것일 테니, 이 때는 가련한 동어반복(elende Tautologie, B. 625)이 될 것이다.

칸트는 옹호자들이 당연히 그들의 주장이 동어반복 되는 것은 피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들이 할 수 있는 가능한 대답 중 하나가 사물 개념 중의 실재성(Realität)과 술어 개념 중의 존재(Existenz)를 구별하는 것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 즉 사물 개념 중의 실재성과 술어 개념 중의 존재는 내용상 동일한 것이어서 실재성을 포함한 주어 개념에서 "존재한다"는 술어의 도출은 선험적으로 이루어지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개념에서 저 판단으로의 이행이 결코 동어반복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칸트가 보기에 이런 말장난은 전혀 쓸데없는 짓이고, 만일 옹호자들이 현존을 주어 개념에 속하는 실재성의 하나로 보았다면, 그것은 이미 모든 설정(Setzen)을 실재성이라 부른 것이고, 그 경우 옹호자들은 "주어의 개념 속에서 그 사물을 그것의 모든 술어와 함께 설정하였으며, 즉 그 사물을 현실적이라고 상정한 것이며, 술어에서는 단지 이미 주어에서 설정한 바를 반복하는 것"(B. 625f) 뿐이었다. 따라서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것이 분석 판단이라면, 존재론적 논증은 기껏해야 동어반복을 하는데 불과함을 결코 모면할 수 없으리라는 것이 칸트의 생각이었다.

반면에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존재 명제가 종합 판단이라면 존재론적 논증은 어떻게 될까? 우선 칸트는 존재 명제는 당연히 종합적이고,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에 대해 수긍할 것"(B. 626)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만일 모든 존재 명제가 종합적이라면 "존재 술어가 모순 없이는 제거될 수 없다"는 말은 결코 할 수 없는 말이 되어 버린다. 그리고 이 경우에 존재론적 신 존재 증명은 그 기초부터 증명력을 잃게 될 것이다.


5. 존재는 술어가 아니다.


(1) 논리적 술어와 실재적 술어


칸트는 이러한 번잡스러운 논의가 생기게 된 원인은 존재론적 논증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한 문장의 한갓 논리적 술어와 사물을 규정하는 바 실재적 술어를 혼동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칸트가 말하는 "논리적 술어"란 보다 자세히 말하자면 일종의 문법적인 술어, 즉 한 문장에서 단순히 술어 노릇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반면에 칸트는 어떤 단어가 실재적 술어가 되기 위해서는 훨씬 더 엄격한 요구 조건을 만족시켜야 한다고 말했는데, 그 조건이란 a. 주어 개념밖에 있어야 하고, b. 주어 개념을 확장시켜야 하며, c. 주어 개념 속에 포함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B. 626).

그러나 이것은 다분히 문제가 있는 구분이 아닐 수 없다. 우선 여기서 실재적 술어의 기준으로 칸트가 들고 있는 조건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종합 판단의 술어들뿐이라는 점이 눈에 뜨인다. 칸트는 이미 앞에서 말하기를 분석 판단은 "술어를 통해서 주어의 개념에 아무 것도 더하지 않고, 오직 주어의 개념을 분석하여 이것을 그것 자신 안에서 (비록 불투명한 상태이기는 하지만) 이미 생각되었던 부분적 개념으로 분해할 뿐인" 것이고, 종합 판단은 "주어의 개념에다가 그것 안에서 생각되지 않았던 술어를, 따라서 주어 개념을 분석한다고 해서 도출될 수 없었던 술어를 더하는 것"이라고 규정하였다(B. 11). 그런데 이 두 가지 판단의 술어들 중에서 종합 판단의 술어만이 사물을 규정하는 실재적 술어가 될 수 있고, 분석 판단의 술어, 예컨대 "모든 물체는 연장적이다"는 명제에서 연장적이라는 술어는 주어 개념을 확장시키지 못한다 하여서 실재적 술어가 될 수 없다고 칸트가 생각했을 것 같지는 않다. 결국 위에서 칸트가 제시한 규정의 기준은 "가장 실재적인 존재자는 존재한다"와 같은 문장에서 술어 구실을 하는 "존재한다"라는 것이 실재적 술어가 되지 못하고 내용 없는 한갓 논리적 술어일 뿐이라고 제쳐놓기 위해 칸트가 내세운 구실일 뿐이라는 인상을 준다.

칸트가 논리적 술어와 실재적 술어의 구분을 통해 존재론적 논증을 공격하였던 것이 문제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단서를 우리는 이 부분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그의 비일관성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 구분을 행하기 바로 직전에 칸트는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존재 명제가 분석 판단인지, 종합 판단인지 한번 말해 보라고 옹호자들에게 요구했다. 그리고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의당히 존재 명제가 종합 판단이라는 것에 동의할 것이고, 만일 존재 명제가 종합 판단이라는 것이 인정된다면, 더 이상 존재론적 논증은 설 자리를 찾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었다. 이러한 정황으로 미루어 보건대 칸트 자신이 존재 명제를 종합 판단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문제가 있다. 만일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존재 명제가 종합 판단이라면, 이 경우 술어 노릇을 하는 "존재한다"는 원래 주어 개념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주어 밖에서 덧붙여져서 주어의 내용을 확장시키는 규정이 될 것이다. 요컨대 실재적 술어, 즉 규정이 될 것이다. 그러나 "존재한다"는 것이 실재적 술어가 된다는 것에 칸트는 결코 동의할 수 없을 것이다. 결국 칸트는 존재 술어를 주어 개념에 무엇 하나 더하는 것이 없으면서도 더하는 것이 있는 이상한 것으로 보았다는 결론이 나온다.


(2) 존재술어를 통해 주어개념에 더해지는 것과 더해지지 않는 것


이렇게 칸트가 직면한 곤경을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있을까? 진퇴양난의 곤경에서 그 사이에 난 좁은 길을 칸트는 비록 명시적으로 드러내고 있지는 않으나, 그 가능성을 충분히 비추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 길은 존재 술어가 주어 개념에 더하는 것과 더하지 않는 것의 내용을 구별함으로써 열려진다.

우선 칸트 자신이 들고 있는 사례를 하나 인용해 보자.


"현실적인 100탈러는 가능적인 100탈러보다 조금도 더 많은 것을 포함하지 않는다. 가능적인 100탈러는 개념을 의미하고, 반면에 현실적인 100탈러는 대상과 대상의 설정 자체를 의미하기 때문에, 만일 현실적인 것이 가능적인 것보다 더 많은 것을 포함한다면, 나의 개념은 그 대상 전체를 표현하지 못할 것이고, 따라서 그 대상에 대한 적절한 개념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나의 재산 상태에 있어서는 현실적인 100탈러가 있을 때가 단지 100탈러의 개념만이 있을 때보다 (즉 100탈러의 가능성이 있을 때보다) 더 많은 것이 있게 된다. 왜냐하면 대상이, 그것이 현실적인 것일 때, 한갓 나의 개념 속에 분석적으로 포함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마음] 상태의 한 규정인 바) 나의 개념에 종합적으로 더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나의 개념밖에 그것이 있음을 통해서, 이 생각된 100탈러 자체는 조금도 늘어나지 않는다."(B. 627)


칸트는 이 사례를 "현실적인 것은 한갓 가능적인 것 이상을 포함하지 않는다"(B. 627)라는 그의 주장을 뒷받침하려는 의도로 들고 있다. 그러나 바로 이 근거 사례 자체 속에서도 단지 생각 속에서 가능적이기만 했던 100탈러가 현실적으로 존재함을 통해 더해지는 것과 더해지지 않는 것이 뒤엉켜 나오고 있다. 무엇이 종합적으로 더해지는가? 그것은 바로 "대상"(Gegenstand, B. 627)이다. 나의 개념 속에 포함되어 있지 않던 대상이 나의 개념에 더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결코 무의미한 일이 아니었는데, 그것을 나의 재산 상태의 변화가 입증해 보여준다. 그렇다면 무엇이 더해지지 않는가? 어떤 점이 "존재함"을 통해서도 조금도 증가되지 않았다는 말인가? 그것이 가능적인 때부터 포함하고 있던(enthalten) 바가 조금도 늘지 않았다. 쉽게 말해서 내 생각 속에 원래부터 있던 100탈러가 지금 내 눈앞에 존재하게 되었다고 해서 101탈러가 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칸트는 이처럼 그것이 가능적인 것으로 있을 때나 현실적인 것으로 있을 때나 변하지 않는 것을 "개념"이라고 보았다. 사실 개념 그 자체는 가능적인 것일 뿐이다. 그러나 어떤 것의 개념이 현실적인 것이 된다고 해서 그것의 개념상의 변화는 일어나지 않고, 다만 그 개념에 대응하는 대상이 개념에 종합적으로 더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대상이 더해졌다고 해서 개념상의 변화가 일어났다면, 그것은 다른 것이 된 것이지, 결코 동일한 것이 현존하게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칸트는 한 대상의 개념 내용에 더해질 수 있는 것들을 "실재적 술어들"(reale Prädikate, B. 626)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존재는 명백하게 실재적 술어가 아니다"(B. 626)라고 자기의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이 말을 다시 풀이하자면 "A가 존재한다"는 명제를 통해 A의 개념 내용에 더해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반면에 "존재는 어떤 사물 혹은 어떤 일정한 규정들 자체의 설정(Position)"(B. 598)이기에 "A가 존재한다"는 명제를 통해 그전까지는 설정되지 않았던 A가 설정되는 일이 일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요컨대 "A가 존재한다"는 존재 명제를 통해 주어 개념 A에 더해지지 않는 것은 개념 내용들이요, 더해지는 것은 주어 개념 A가 대상이 덧붙어짐을 통해 설정된다는 일종의 사건인 것이다.

칸트는 이러한 자신의 입장을 보다 명료히 하기 위해 예문을 하나 든다.


"신은 전능하게 있다."(Gott ist allmächtig.)


칸트에 따르면 여기서 사용되고 있는 개념은 "신"과 "전능함" 둘 뿐이고, 양 자를 매개해 주는 "ist"는 술어가 아니고, 단지 술어 "전능성"을 주어와의 관련 속에서 설정하는 논리적 역할만을(im logischen Gebrauche) 한다. 이것을 "상대적 설정"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이 때 술어 "전능성"은 신의 개념에 뭔가 더하는 내용이 있는 실재적 술어로서 "ist"라는 연계사를 통해 주어 "신"과의 관계가 설정되는 것이다.

반면에 이런 예문도 한번 생각해 보자.


"신이 있다"(Gott ist. Es ist ein Gott.)


여기서 "있다"(ist)는 앞의 예문에서와는 달리 분명히 술어의 역할을 한다. 만일 이것이 술어가 아니라면 위의 문장은 어떤 판단도 아닐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존재 명제는 종합 판단이라고 본 앞서의 이야기와 상충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위의 예문은 칸트에게서 분명 하나의 판단이겠고, 이것이 판단이라면 동사 "있다"(ist)는 어떤 식으로든 주어 개념 "신"에 대해서 술어 노릇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칸트는 이 "있다"라는 존재 술어가 주어의 개념을 이룰 수 있는 다른 술어들과는 구별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것은 주어 개념에 아무 내용도 더할 수 없다 해서 "논리적 술어"(logisches Prädikat)라 불렀고, 그것의 기능을 주어 개념의 "절대적 설정", 즉 주어 개념이 단지 가능한 것으로만 아니라 현실적인 것으로 우리의 주관에 의해 받아들여지도록 하는데 있다고 말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 존재 명제를 통해 우리는 신의 개념의 내용을 이루는 어떤 새로운 것도 덧붙이지 않았으나, 그것의 일체의 술어와 함께 주어 자체를, 즉 신이라는 대상을 나의 개념과의 관계 속에 설정시키는 사건이 일어나는 것이다. 요컨대 sein 동사는 그것이 Gott ist allmächtig 같은 명제에서 사용되든지, Gott ist 같은 명제에서 사용되든지 간에 단지 개념들을 설정시키는 논리적 역할만을 할뿐이지, 개념의 내용에 더해 주는 바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3) 개념과 존재


그렇다면 한 개념의 내용은 어떤 것들로 채워지는가? 칸트에 따르면 한 개념의 내용을 이루는 것은 규정들(Bestimmungen)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규정들은 개념이 판단에서 사용될 때 실재적 술어의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런데 칸트에 따르면 하나의 판단에서 내용을 이루는 것들로는 오직 크기, 성질, 관계밖에는 없다(B. 100). 요컨대 양, 질, 관계의 범주에 속하는 술어들만이 실재적 술어일 수 있으며, 오직 그것들이 한 사물의 개념 내용을 이루는 규정들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달리 표현한다면 "어떤 것이 현실적으로 존재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것은 여기에서 주어 노릇 하는 "어떤 것"의 개념 내용과는 전혀 별개인, 개념 외적인 문제라는 것이다. 우리는 칸트의 이러한 기본적 입장을 이미 <순수이성비판>의 범주 구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존재론적 신 존재 증명에서 문제가 되는 신의 현실적 존재, 혹은 필연적 존재는 칸트 범주표에 따르면 모두 양태 범주(Modalität)에 속하는 것들이다. 그런데 칸트가 양태 범주를 찾아내는 실마리가 되었던 양태 판단들은 여러 판단들 중에서도 매우 특별한 판단들이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판단의 내용에 전혀 기여하는 바가 없고, 오히려 사고 일반과 관계 맺고 있는 연계사의 가치만을 다루기"(100)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양태 범주도 역시 "그것들이 거기에 술어로서 덧붙여지는 개념을 대상의 규정으로서 조금도 늘리는 바 없이, 오직 이 개념이 인식 능력과 맺는 관계만을 표현한다"(B. 266)는 특징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칸트가 어떤 것의 현실적 존재를 그것의 개념 내용과 철저히 구별했다는 사실은 이제 그가 존재론적 신 존재 증명을 비판함에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왜냐하면 존재론적 신 존재 증명은 현존을 한 대상의 개념 속에 포함될 수 있는 실재성, 즉 속성의 하나로 본다는 전제 위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안셀무스는 이해 속의 존재, 즉 가능적 존재도 하나의 실재성이요, 현실적 존재도 하나의 실재성으로 보았다. 그리고 실재성을 많이 그리고 높은 정도로 소유할수록 그 존재자는 위대해지는 것이므로, "그 이상의 큰 것을 생각할 수 없는 것"은 가능적 존재 뿐 아니라, 실재 속의 존재, 필연적 존재까지도 다 소유하고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리고 존재를 주어 개념에 속할 수 있는 하나의 속성으로 본 것에는 데카르트 이후의 대륙 이성주의 철학자 대부분의 의견이 일치하였다.

그러나 칸트는 어떤 것의 개념이 가능한 상태 그대로일 때나, 그것이 설정되어 그 개념에 대상이 더해질 때나, 개념 내용의 측면에서는 변함이 없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존재 명제를 통해서 변화되는 것은 오직 그 개념이 우리 인간 주관과 맺는 관계일 뿐이지, 개념 자체는 변함없다는 것이다.


(4) 존재와 지각


그렇다면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어떤 대상의 개념을 설정하도록 만드는가? 우리가 "어떤 것이 존재한다"고 말할 때,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진술을 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조건들을 우리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칸트의 생각에 따르면 적어도 개념 안에서 한 사물의 존재를 확인할 수는 없다. 존재론적 신 존재 증명은 신의 개념에서 그의 존재를 도출해 내려 하지만, 그러한 시도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 왜냐하면 "개념을 통해서 그 대상은 단지 가능한 경험적 인식 일반의 보편적 조건들과 일치하는 것으로 생각되기는"(B. 628) 하지만, 거기서 그 대상의 존재가 얻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칸트는 일찍이 하나의 대상이 가능한 경험적 인식 일반의 보편적 조건, 즉 직관과 개념의 조건에 일치할 때, 그것은 "가능한 것"(B. 265)이라고 말한 바 있다. 즉 개념은 그에 상응하는 대상의 존재가 단지 가능함을 말해 줄 따름이지, 그것의 현존은 보장해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우리가 결여됨이 전혀 없는 최고의 실재성을 지닌 하나의 존재자를 생각해 본다 해도, 여전히 "이러한 존재자가 정말로 존재하는지, 그렇지 않은지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B. 628)고 칸트는 말한다.

그렇다면 대상의 존재는 어디서 확보할 수 있을까? 칸트는 이렇게 말한다.


"대상에 관한 우리의 개념이 무엇을 얼마나 많이 포함하고 있던 간에, 그 개념에게 존재를 나누어주기 위해서는, 우리가 그 개념 밖으로 나와야만 한다"(B. 629)


존재를 얻기 위해 개념 밖으로 나온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한갓 개념을 분석하는 수준에서 그 개념에 대응되는 대상의 존재를 도출해 내려 하지 말고, "나의 지각과의 연관"(B. 629) 속으로 들어가야 함을 말한다. 왜냐하면 "모든 존재에 대한 우리의 의식은 전적으로 경험의 통일성에 귀속하기 때문"(B. 629)이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은 이미 칸트가 현존 범주와 관련된 원칙에서 "경험의 질료적 조건(감각)과 관련된 것은 현실적"(B. 266)이라고 말했을 때 이미 확연히 드러나 있었던 바였다. 칸트에 따르면 "사물들의 현실성을 인식하기 위한 요청은 지각을 요구하고, 따라서 우리가 의식하는 바 감각을 요구한다"(B. 272). 왜냐하면 "지각이야말로 현실성의 유일한 특징"(B. 273)이기 때문이다. 이때 사물 존재의 현실성이 그것을 통해 확보되는 바 지각은 물론 그 대상과의 직접적 지각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여기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내가 직접 지각하지 못하는 것은 모조리 존재하지 못하는 것일까? 그리고 예컨대 어제는 내가 보아서 그 존재를 확인하였던 도서관이 오늘은 내가 보지 못해서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일까? 또 나는 뉴욕에 있는 자유의 여신상을 한번도 직접 보지 못하고 단지 사진을 통해서만 보았는데, 그 경우 존재하는 것은 오직 자유의 여신상을 찍어 놓은 사진뿐이고, 자유의 여신상은 내게 대해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칸트는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도 적절한 대답을 주기 위해 존재 현실성의 기준이 되는 지각 개념을 다소 확장시킨다. 즉 그러한 직접적 지각이 결여되는 경우라 할지라도 "만일에 사물의 현존이 지각의 경험적 연결의 원칙들(즉 유비)에 의거해서 약간의 지각들과 관련되기만 하면, 우리는 사물의 지각에 앞서서도, 따라서 비교적 선험적으로도 그 사물의 현존을 인식할 수가 있다"(B. 273)는 것이다.

요컨대 "어떤 것이 존재한다"고 우리가 말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개념의 대상이 직접적 지각으로나 유비를 통해서 우리의 감각 경험과 어떻게든 관계맺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존재론적 신 존재 증명을 시도하였던 자들은 이러한 경험의 증거 없이도 단지 개념의 분석만에 의해 그 개념에 대응하는 대상의 현존을 도출하려 했기 때문에, 그 증명은 근본적인 것에서부터 문제가 있었다는 것이다.


6. 맺는 말


지금까지 나는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에서 존재론적 신 존재 증명에 관해 비판하는 내용을 몇 가지 항목으로 나누어 고찰하였다. 칸트는 거기서 판단의 필연성과 사태의 필연성, 논리적 가능성과 대상의 가능성, 논리적 술어와 실재적 술어, 존재 술어를 통해 주어 개념에 더해지는 것과 더해지지 않는 것, 개념과 대상의 구분 등을 통해 전통적인 존재론적 증명은 이렇게 구분되는 것들을 혼동한 결과로 나오게 된 오류임을 증명해 보이려 했다. 다른 한편으로 칸트는 자기 자신이 "존재"라는 것에 대해 전통적인 생각과는 얼마나 달리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드러내 보여주었는데, 우리가 이 비판을 고찰하면서 발견하게 된 칸트의 몇 가지 기본적 입장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1) 존재는 개념에 포함되지 않는다. 옹호자들은 어떤 것의 개념에 그것의 존재도 하나의 실재성으로 포함될 수 있으며, 따라서 개념에서 그 대상의 도출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칸트는 가장 완전한 개념, 즉 모든 실재성을 다 포괄한 것의 개념이 있을지라도, 그것의 대상이 존재하는지 여부는 여전히 문제로 남는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개념과 존재는 전혀 별개의 것이기 때문이다.


(2) 개념이 가능하다고 해서 그 대상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개념의 가능성은 그것이 자기 모순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그러나 무모순성은 어떤 대상이 존재하기 위한 최소한의 필요조건(sine qua non)일 뿐이다. 한 개념의 대상의 가능성이 얻어지려면, 무모순성 외에도 그 개념이 경험의 형식적 조건과 일치하는 것이 필요하다.


(3) 하나의 개념의 대상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현존한다는 것이 우리에게 알려지기 위해서는, 어떤 방식으로든 그것이 나의 지각과 연결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지각이야말로 현실성의 유일한 특징"(B. 273)이기 때문이다. 이 일은 직접적인 지각에 의해서 이루어지거나 지각의 경험적 연결의 원칙, 즉 유비에 의해 이루어진다.


(4) 어떤 개념의 대상이 존재함이 알려진다 해서, 그 개념의 내용에 더해지는 것은 전혀 없다. 다만 그것에 대한 나의 마음의 상태가 바뀌어지는 것뿐인데, 이것을 칸트는 "설정"(Position)이라는 용어로 표현하였다.


이처럼 개념과 존재를 선명하게 구분하고, 존재를 우리의 감각 경험과의 관련 속에서 찾으려 했던 칸트의 태도를 우리는 "감각주의적 존재론"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어떤 것의 존재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 "우리가 그것에 대한 감각 경험을 직접, 간접적으로 갖고 있느냐" 여부에 따라 다른 태도를 취하게 되는 우리 마음의 상태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칸트가 존재론적 신 존재 증명을 비판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그 증명이 전제하고 있었던 존재론과 전혀 다른 감각주의적 존재론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존재론적 신 존재 증명에서는 마치 명증적인 진리인 것처럼 별도의 검토 없이 전제되고 있었던 여러 항목들이 칸트의 새로운 존재론에 입각하여 조망하여 볼 때는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증명의 옹호자들은 그들 나름대로 다음과 같이 칸트를 비판할 수도 있겠다.


(1) 존재 확인의 근거를 오직 감각에만 둔다는 것은 지나치게 존재자의 범위를 협소화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얼마든지 우리의 감각에 포착되지 않는 존재자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예컨대 아직 발견되지 않은 미생물, 가시권 밖의 광선들, 아직 관찰되지 않은 우주 내의 한 별 등. 게다가 만일 어떤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모든 감각이 작동되지 않는 장애인이라면, 그 사람에게는 너도, 나도, 그리고 이 세상 모든 것이 무(無)일 뿐인가? 더욱이 감각은 주관적인 것인데, 어떤 동일한 것이 이 사람에게는 존재자이고 저 사람에게는 비존재자일 수 있는가? 칸트는 자신이 말한 그토록 과감한 주장을 정당화할 수 있을까?


(2) 존재를 개념과 철저히 구별한 것은 너무 자의적이다. 우리는 존재도 개념에 무엇인가를 더해 주는 실재적 술어로 얼마든지 해석할 수 있다. 더욱이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명제에서 "존재한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 문장의 주어에게 속하는 것이지, 단지 우리의 마음이 그 "어떤 것"과 맺는 관계라고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3) 설령 감각주의적 존재론이 유한한 존재자에게 해당된다는 것을 인정하더라도, 우리는 "신" 같은 무한한 존재자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무한한 존재자는 이미 그 정의에 의해 우리의 감각 경험을 초월한 것이다. 그리고 존재론적 신 존재 증명이 개념의 분석을 통해 그것의 존재를 도출하려는 것도 바로 이 무한한 존재자였지, 유한한 존재자에 대해서도 그런 동일한 증명이 가능하다고 우리는 말한 바 없다. 그런데 칸트는 유한한 존재자의 현존 기준을 가지고 무한한 존재자에 대해 말했던 존재론적 증명을 비판한 오류를 범한 것이다.



이처럼 옹호자들이 기존의 존재론을 계속 일관되게 고수하든지, 아니면 칸트의 존재론을 받아들이더라도 그것이 유한한 존재자에게만 해당된다는 유보 조항을 달고 받아들인다면, 칸트와 그들의 대화는 더 이상 기대해 볼 것이 없는 목소리 싸움밖에 안될 것이다.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어느 쪽 입장이 보다 더 우리의 직관에 맞는지를 검토해 보는 것밖에 없을 것이다.

앞에서도 살펴본 것처럼 많은 주석가들은 칸트의 이 비판이 존재론적 신 존재 증명을 결정적으로, 그것의 재기가 더 이상 불가능할 정도로까지 논파한 것으로 평가하였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은 주석가들의 그러한 생각에 동의한다. 그러나 우리가 보다 정확하게 칸트의 이 비판이 갖는 역사적 의의를 평가한다면, 그것은 존재론적 신 존재 증명에 대한 결정적 반박이라기 보다는 기존의 것과 전혀 다른 새로운 존재론의 출현이라고 하겠다. 근대 수학적 자연과학에서 실마리를 찾고, 그것의 발전에 장해가 될 만한 기존의 형이상학을 옆으로 제쳐놓기 위해 동원된 존재론.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고도로 발전된 자연과학의 울타리 속에서 보호받고 사는 현대인들의 직관에 가장 잘 부합되는 새로운 존재론. 그것이 존재론적 신 존재 증명에 대한 칸트의 비판 속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났던 것이다.


【 참고 문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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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 Yoon-Ki,

(Kants Kritik an dem ontologischen Gottesbewei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