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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심리철학

기능적 환원주의의 옹호 - 한기호

기능적 환원주의의 옹호1)


한 기 호(강사)

영문제목: Defending Functionalistic Reductionism

영문이름: Kiho Han


【주제분류】현대 영미철학, 심리철학, 존재론

【주 요 어】김재권, 기능적 환원주의, D-속성들과 실현 속성들, 제거주의, 문화

【요 약 문】기능적 환원주의의 전략은 고전적 환원주의에 제기되는 설명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심성을 기능적, 인과적, 또는 상식적 역할을 통해 정의하는 것이다. 물론 기능적 환원주의에도 여러 가지 반대가 제기되고 있으며, 특히 기능주의에 제기되는 반대들 대부분이 기능적 환원주의에도 제기될 수 있다. 필자는 여기서 김재권의 기능적 환원주의에 직접 화살을 돌리고 있는 비판만을 고찰해 볼 것인데, 그 중에서도 블록과 이종왕은 김재권의 기능적 환원주의가 귀결하는 심성 이해에 반대하는 대표적인 철학자들일 것이다. 결론적으로 그러한 비판들은 김재권의 기능적 환원주의에 그리 치명적인 타격을 입히지 못함을 보게 될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우리가 예상할 수 있는 반대가 있는데, 이것은 기능적 환원주의가 순전히 경험적인 심신 동일성을 버리고 심성에 대한 개념적 분석을 도입했을 때 이미 내재해 있는 문제이다. 그것은 심신 환원의 객관성과 보편성이 기능적 환원에서도 보장될 수 있는지의 문제이다. 필자의 잠정적인 결론은 그것이 ‘어느 정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고전적 환원주의는 심신 동일성을 순전히 경험적인 동일성 관계로 파악함으로써 주요한 문제를 야기한다. 그것이 바로 설명적 간극의 문제, 또는 설명의 문제이다. 기능적 환원주의는 이러한 설명적 간극을 메울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는데, 그것의 첫 번째 전략은 심성을 그것이 하는 기능적, 인과적, 상식적 역할을 통해 정의함으로써 설명의 문제를 야기하지 않는 심신 동일성을 확보하는 것이다.

필자는 여기서 기능적 환원주의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한 설명들은 김재권의 저작들에서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의 여러 논문에서 이미 이루어져 있다. 그보다 필자는 김재권의 기능적 환원주의가 어떤 난점에 부딪히는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를 주로 살펴볼 것이다. 하지만 기존에 알려진 기능주의의 일반적 난점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 김재권도 기능주의의 가장 치명적인 난점으로 알려진 감각질의 문제를 그대로 인정하고 있다.2) 따라서 여기서는 김재권의 기능적 환원주의에 직접 화살을 돌리고 있는 몇몇 비판들에 대해서만 고찰 해 볼 것이다. 결론적으로 그러한 비판들은 김재권의 기능적 환원주의에 그리 치명적인 타격을 입히지 못함을 보게 될 것이다.



Ⅰ. 속성과 투사 가능성


김재권은 “Multiple Realization and the Metaphysics of Reduction”에서 퍼트남과 포더에 의해 고무된, 심적인 것의 다수 실현 가능성이 심리학의 자율성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반환원주의자들의 생각이 절망적임을 논증한다. 그 논증을 통해 우리는 김재권이 심성에 대한 어떤 이해를 갖고 있는지를 읽을 수 있다. 포더3)가 다수 실현 논변을 통해 보여주었던 것처럼 다수로 실현 가능한 상위 속성들은 하위 속성들과 동일시될 수 없는데, 왜냐하면 상위의 속성들이 다수로 실현될 때 그것들은 이종적인(heterogeneous) 형태를 띄게 될 텐데, 이종적인 속성들의 선접은 법칙에서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는 하나의 종이 아니기 때문이다.

김재권은 포더의 이러한 주장의 정당성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지를 고려해본다. 그는 먼저 종에 대한 한 가지 기준을 제안한다. 즉, 종은 투사 가능한 속성이라는 것이다. 김의 예에서처럼,4) 옥을 구성하는 경옥과 연옥은 서로 상이한 화학적 구성을 지니고 있기에 자연종으로서 별개의 것이며, 대표적인 이종적인 종들의 선접 사례일 것이다. 그런데 선접지들의 이종성이 그 자체로 문제를 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문제는 각 선접지들이 단일 종의 사례들에서와 같은 “유사성”이나 통일성을 보여주지 못한다는 데 있다. 그렇기 때문에 경옥과 연옥은 다른 종을 구성하지만, 아프리카산 에메랄드와 비-아프리카산 에메랄드를 단일한 법칙적 종으로 만들어 주는 것이다. 즉 아프리카산 에메랄드와 비-아프리카산 에메랄드로 구성된 에메랄드는 미래의 사례들에 대한 투사 가능성을 지니지만, 경옥과 연옥으로 구성된 옥은 미래의 사례들에 대한 투사 가능성을 결여하고 있다. 김재권에 따르면 고통도 옥과 같은 운명이다.

그런데 이를 통해 김재권이 내리는 결론은 포더와 다르다. 고통과 그것의 이종적인 선접이 모두 종이 아니라는 것이다. 포더는 이종적 선접이 과학적 종임을 부정하고 자율적 영역으로서의 심리학을 지키고자 했지만, 김재권은 투사 가능성에 대한 고찰을 통해 고통과 그것의 선접이 모두 종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린다. 결국 다수 실현으로 인해 환원주의가 틀렸음이 밝혀진다 할지라도, 그것이 고통 일반을 다루는 심리학의 자율성을 가져오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N. 블록은 반환원론자들의 딜레마로 묘사하고 있다.


고통과 그것의 선접적인 법칙적 동치 모두가 종들이든지 아니면 둘 다 종들이 아니든지. 만일 전자라면, 어떠한 다수 실현자도 없으며 환원주의는 다수 실현 논변을 피한다. 만일 후자라면, 고통과 여타 심적 속성들은 전혀 종들이 아니며 그것들에 대한 과학은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는다.5)


김재권은 고통과 그것의 이종적인 선접이 모두 종이 아니라고 주장함으로써 두 번째 뿔을 잡는다.6) 일반적인, 그리하여 종-제한적이지 않은 고통은 하나의 종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물리적 실현자들을 단지 선접적으로만 가질 뿐이며, 따라서 인과적으로 무력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상의 생각을 다음과 같은 단순화된 추론을 통해 나타낼 수 있다.


(1) 모든 정신적 종(또는 속성)들은 물리적으로 실현된다.

(2) 정신적 종의 인과력은 물리적 토대의 인과력으로부터 물려받는다.

(3) 종의 차이는 인과력의 차이이다.

(4) 각 심적 종들이 실현되는 물리적 토대는 다수로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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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따라서 (제한적이지 않은) 심적 종들은 과학적 종을 이루는 인과적 종들이 아니며, 학문적 통일성을 지닌 하나의 과학으로서의 (제한적이지 않은) 심리학은 불가능하다.


속성과 종을 동일시한다면, 전제 (1)은 적어도 물리주의자임을 자처하는 이들이 기꺼이 받아들이는 물리적 실현 논제이며, 전제 (2)는 인과적 계승의 원리로서 수반 논제와 동치이다. 또한 전제 (3)은 인과적 개별화 원리로서 포더의 “Special Sciences”에서의 전제이며,7) 마지막으로 다수 실현 논제인 전제 (4)는 특히 반환원론자들이 강하게 받아들이는 논제이다. 이 모든 전제는 반환원적 물리주의자들이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는 전제들이다. 그런데 이러한 전제들이 합쳐져 만들어진 결론은 애초의 기대와는 달리 과학으로서의 심리학, 즉 고통 일반을 다루는 심리학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심리적 속성들의 다수 실현은 심리학의 다수 실현을 야기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재권에 따르면 이것이 그렇게 비관적인 결론인 것은 아니다. 만일 다수 실현 논제가 참이라면 심리학적 종들은 과학적 종들이 아니다. 그렇지만 우리에겐 각 종에 국한된 속성들이 남아있다. 마찬가지로 종에 제한되지 않은 심리학은 불가능할지라도, 우리에게 인간 심리학은 여전히 가능하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하다. 이처럼 김재권에 따르면 고통과 관련하여 인간과 문어, 그리고 화성인이 공통으로 갖는 것은 그것들이 모두 고통 개념에 속한다는 것일 뿐이다.



Ⅱ. D-속성과 자연의 힘


김재권과 더불어 대표적인 환원주의자인 블록은 김재권의 논의가 단지 부분적으로만 옳을 뿐 그것을 통해서는 반환원적 합의가 완전히 무너지지는 않음을 역설한다. 특히 블록은 위의 추론에서 등장하는 전제들을 모두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블록이 거부하는 것은 포더와 김이 모두 받아들이는 전제 (2)와 (3)의 결합이며, 정확히 말해서 투사 가능한 종과 인과적으로 효력 있는 종들의 동일시이다. 블록은 그렇게 일의적으로 규정되는 종 개념 대신 새로운 종 개념을 제시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그는 고통 개념에 더하여 고통 속성이 있음을 주장한다.8) 김재권이 거부했던 인간과 문어, 화성인이 공유하는 진정한 속성이 있다는 것이다. 만일 블록의 이러한 주장이 옳다고 밝혀진다면,


[그것은] 김이 일반적으로 옳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판단은 고통―그리고 여타 의식적 상태들―이 어떠한 기능적인 개념적 분석도 갖지 않는다는 나의 견해에 기초해 있다. (내 견해에 따르면, 만일 고통이 하나의 기능적 상태라면, 그것은 내가 심리 기능적 상태라고 부르는 것, 즉 경험적인 기능적 분석에 의해 포착되는 한 상태이다.)9)<태나무체는 필자의 강조>


심성에 대한 개념적 분석을 부정하는 블록은 그 대신 경험적 분석을 통해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모든 유기체에 공통된 진정한 속성을 포착할 가능성이 있음을 주장한다. 블록은 그 가능성을 ‘디즈니 원리’를 통해 제시한다.10) 그것은 “자연의 법칙들은 일정한 기술을 만족시키는 어떤 것을 만드는 방식에 제한을 가한다”와 같은 말로 표현될 수 있다. 물론 그러한 원리가 사실 굉장히 막연한 원리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자연의 제한을 완전히 알 수 없는 것도 아니다. 예를 들어 “미녀와 야수”와 같은 디즈니 영화에서 등장하는 말하고 생각하는 찻잔과 촛대를 그 원리는 부정한다. 자연의 법칙이 생각하고 고통을 느낄 수 있는 것들에 가하는 제한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우리가 확언할 수 있는 것은 찻잔과 촛대는 생각하거나 고통을 느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한 제한은 자연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인위적인 제작에도 관여한다. 우리가 펜을 만들 때 그것의 물리적 재료들은 사실 무궁무진하다. 나무나 쇠, 합금, 심지어는 깃털을 가지고도 펜을 만들 수 있다. 김재권에 따른다면 그것들을 모두 펜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는 그것들이 하나의 펜 개념에 속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펜들은 일정한 목적을 위한 합리적 디자인들이며, 그 디자인에는 일정한 힘이 작용한다고 블록은 역설한다. 이를테면 (블록의 예를 따라) 당신은 그러한 것을 물을 가지고 만들 수는 없을 것 같다.11) 마찬가지로 우리는 경옥과 연옥 사이에서도 그러한 유사성들을 기대해 볼 수 있다. 옥 개념은 일정한 표면적 특성들의 개념이며 그러한 표면적인 특성을 보이는 사물들을 만드는 방식에는 몇 가지 제한이 있다. 따라서 김재권의 주장과 달리 연옥에서 경옥으로의 몇 가지 투사는 가능하다. 하지만 그러한 외형적 유사성을 통해 기대할 수 있는 깊은 과학적 유사성은 많지 않다. 우리는 단지 디즈니 원리를 통해서 몇 가지 제한만을 가질 뿐이다.

블록은 이러한 생각을 속성의 두 종류를 나눔으로써 자세히 설명한다. 그는 특수 과학의 속성들을 ‘D-속성들’과 ‘실현 속성들’로 나눈다. 먼저 D-속성들12)은 ‘선택된 속성들’로서, 우리는 인위적인 고안들(예를 들어, 펜)에서 뿐만 아니라 진화의 자연 선택에서도 그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실현 속성들은 ‘실현자들의 특수성에 기인하는’ 속성들이다. 예를 들어 고래의 꼬리와 물고기의 꼬리지느러미는 서로 다른 진화의 경로를 거쳤으며, 다른 실현 기제를 가지고 있지만 이러한 실현자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일정한 공통된 특징들을 보여준다. 그것들은 상위 차원(D-속성들)에서의 일정한 유사성이다. 전형적인 기능적 분석을 통해 특징 기술할 수 있는 ‘지느러미임’이라는 속성은 그것의 물리적 실현자들과 관련하여 고래와 물고기가 서로 다르다. 따라서 그것들은 실현 속성과 관련하여 투사 가능하지 않다. 하지만 디자인 차원에서 그것은 물고기로부터 고래로 투사 가능하다. 이렇듯 투사를 가능케 해주는 것은 자연에 존재하는 일정한 힘이지 그 속성을 실현시켜주는 물리적 기제나 성분이 아니다. 그래서 김은 실현 속성들과 관련해서는 옳지만 D-속성들과 관련해서는 틀렸다. 그리하여 블록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1. 하나의 속성, 또는 속성들의 한 선접이 하나의 종인지 아닌지는 상대적이며, 그 상대성은 “속성들의 어떤 유형과 관련하여 투사 가능한가?”라는 질문과 관련된다.

2. 그러한 유사성에는 정도의 차이가 있다고 가정할 경우, 그리고 종임(kindhood)은 유사성에 근거해 있기 때문에, 종임도 또한 정도의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13)


블록에 따르면, 투사 가능성을 통해 인과적으로 효력있는 종을 엄밀히 구획지으려는 김재권의 시도는 재고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일정한 종류의 속성들(예를 들어, 잉크 안에서 용해되지 않음)에 대해서, 우리는 고찰된 펜들로부터 고찰되지 않은 펜들로 아주 잘 투사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의 펜임을 인과적으로 효과 있는 속성으로 만드는가? ... 일단 우리가 종 개념이 상대적이며 정도의 차이를 보인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만일 우리가 인과를 상대적이며 정도의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지 않을 경우, 종들은 인과를 푸는 열쇠로서 별로 좋지 않은 후보일 것이다.14)


필자는 블록의 경험적 동일성이 현재 기능적 환원주의와 경쟁하는 유일한 환원 전략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블록의 손을 들어주기엔 아직 부족한 점들이 많다. 우리는 블록의 이러한 결론이 의지하고 있는 디즈니 원리가 정말로 우리가 의존할만한 원리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블록도 인정했듯이,15) 그 원리는 너무 막연하거나 부정적인 형태를 띄는데 그래도 원리라 부를 수 있을까? 이는 우리가 ‘검지 않은 비-까마귀’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어색한 것과 같다. 그 원리가 설득력을 가지려면 어떤 긍정적인 내용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 가능성에 따라 우리는 디즈니 원리를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김재권에 대한 블록의 비판에 대해선 판단을 유보해야 할 것 같다.



Ⅲ. 개념적 분석의 가능성


김재권은 네이글식 다리 법칙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설명의 문제를 야기하지 않는, 또는 설명적 간극을 발생시키지 않는 심신 동일성을 찾고자 했으며, 그 결과로서 심성의 기능화를 통한 심신 동일성이 그러한 문제를 피해갈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그러한 기능적인 심성 정의에 대해선 철학자들 사이에도 이견이 많다. 특히 심성에 대한 개념적 분석의 현실적 입수 가능성을 부정하는, 그럼으로써 상식적 기능주의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심리철학자들은 개념적 분석이 심신 동일성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 아니거나, 또는 현실적으로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F. 잭슨에 따르면, 유물론을 옹호하면서도 개념적 분석의 역할을 거부하는 철학자들은 주로 다음의 세 가지 이유에서 개념적 분석의 필요성, 또는 가능성을 거부한다.16)

첫 번째 이유는, 개념적 분석은 유물론과 문제의 영역이 다르다는 것이다. 즉 유물론이 ‘무엇이 존재하는가’에 대한 형이상학적 학설인데 반해 개념적 분석은 언어 철학이나 인식론적 문제에 관여할 뿐 형이상학적 문제에서 어떤 본질적인 역할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개념적 분석의 역사가 사실상 실패의 역사라는 것이다. 개념적 분석이 주어질 때마다 계속해서 명석한 반대 사례들이 제공되어 왔으며, 이는 개념적 분석의 현실적 입수 가능성을 위협한다. 세 번째 이유는 심적인 것과 물리적인 것의 연결은 필연적인 후천적 연결이며, 따라서 어떠한 개념적 분석을 통해서 접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그런데 이러한 개념적 분석에 대한 거부가 강한 설득력을 갖는 것 같지는 않다. 먼저 첫 번째 거부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루이스의 예를 따라) 기능적 환원은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형식을 취할 것이다.


(1) 심적 상태 M = 인과적 역할 R의 점유자 (개념적 단계)

(2) 신경 상태 N = 인과적 역할 R의 점유자 (경험적 단계)

                                        따라서,

(3) 심적 상태 M = 신경 상태 N(=의 이행성에 의한 귀결)


여기서 첫 번째 단계는 M의 정의에 의한 개념적 단계이며, 두 번째 단계는 생리학적 탐구에 의한 경험적 단계이다. 개념적 분석을 거부하는 유물론자들은 이 추론의 전제들 중 하나가 필연적으로 개념적 분석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할 것이다. 또는 형이상학적 결론을 위해 전제 (1)과 같은 인식론적, 또는 설명적 전제가 하는 역할을 없다고 주장할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 이러한 주장은 너무 형식적이다. 위 도식에서 전제 (1)은 인식론적 역할을 하는 전제이며, 전제 (2)는 형이상학적 역할을 하는 전제이다. 그러므로 전제 (1)과 (2)가 참이라면 그 결론은 인식론적 요구와 형이상학적 사실을 모두 만족시키는 결론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그 중 하나라도 참이 아니라면 그 두 요구가 모두 만족될 수 없으며, 특히 전제 (1)을 만족시키지 못한다면 그 결론은 인식론적 문제를 야기한다. 즉 설명의 문제를 야기하게 된다. 개념적 분석의 역할에 대한 회의적 반응은 형이상학과 인식론의 관계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 기인한다. 철학 분과로서의 형이상학과 인식론은 분명 구별되는 분과이기는 하지만 완전히 분리하여 수행할 수 있는 분과는 아니다. 형이상학적 탐구에 인식론적 방법론이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철학적 상식이다. 유물론은 세계가 무엇으로 구성되었는지에 대한 하나의 입장이지만,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세계가 무엇으로 구성되었는지를 설명해주는 하나의 이론적 체계”이다. 그리고 그런 이상 유물론은 인식론적 문제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심리 철학에서 설명의 문제는 바로 그러한 사실을 간과한 데서 발생하는 것이다.

두 번째 반론에 대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대답할 수 있다. 잭슨이 그러한 사례를 직접 거론하지는 않았지만, 대표적인 개념적 분석을 우리는 인식론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정당성에 관한 게티어 문제에서 유래하는, ‘앎’, 또는 ‘지식’에 대한 개념적 분석은 대표적인 실패의 역사이다. 하지만 그러한 처지를 심성에 대한 개념적 분석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특히 심성에 대한 개념적 분석이 우리의 총체적인 심성 이해에서 나오는 것이며, 또한 그것이 우리의 상식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이라면, 그러한 개념적 분석에 대해 엄밀한 반례를 찾는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예를 들어, 우리는 고통을 ‘이러저러한 기능적, 인과적 역할’을 통해 개념적으로 분석할 수 있지만 그러한 분석은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특수한 환자의 경우에 적용되지 않을 것이다. 그럴 경우 우리가 해야 할 다음 일은 그러한 환자를 포괄하는 새로운 개념적 분석을 찾는 것이 아니라, 그 환자를 그저 하나의 예외로서 인정하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임시방편적인 수정을 통해 개념적 분석을 보존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상식의 특징을 반영하는 것이다. 상식은 계속 변화하는 우리들의 세계관이다. 하지만 상식에서 말하는 것이 언제나, 그리고 모두 맞는 것은 아니다. 본래적으로 예외를 포함하는 규칙성이 바로 상식의 특징일 것이다.17)

마지막 이유는 크립키의 후천적인 필연적인 것에 관한 주장에서 유래한다. 심성과 물성이 전적으로 후천적인 동일성 관계라면 개념적 분석은 불가능할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최근의 블록 & 스톨네이커18)를 떠올리게 한다. 그들은 크립키의 가르침을 따라 개념적 분석을 대신할 후천적 필연적 동일성을 주장하면서 설명적 간극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이러한 주장을 통해 그들이 말하는 것은 현실적인 환원의 불가능성이 아니라 개념적 분석을 통하지 않은 환원의 가능성, 즉 크립키식 후천적 동일성을 통한 환원의 가능성을 말하고자 한다. 필자는 심신 관계가 전적으로 후천적인 관계인지 어느 정도 선험적인 요소가 개입되는지에 대해선 독립적인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김재권도 지적했듯이, 개념적 요소가 배제된 심신 동일성은 선결문제 요구의 오류를 범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19) 게다가 그들의 전략은 “환원적인 설명”이 아니라 오히려 “설명이 없는 환원”을 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그들의 의도대로 후천적 동일성을 통해 “설명”이 이루어질 수 있는지에 대해선 오히려 회의적으로 보인다. 그들이 어떤 의도를 가졌건 간에, 그리고 그들이 이러한 귀결을 알든 모르든 간에, 그런 식으로라도 환원 가능성이 밝혀진다면 환원주의자들에게는 또 하나의 기쁨일 것이다.20) 하지만 그들의 방법은 성공하기 힘든 것 같다. 그들이 고전적 환원주의의 길을 따라가는 한 그들에게는 희망이 없는 것 같다.



Ⅳ. 김재권의 기능적 환원주의는 제거주의인가?


김재권의 기능적 환원주의에 대한 논의는 국내에서도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그 중에서도 이종왕은 김재권의 기능적 환원주의가 지닌 문제점을 지적하는 몇 편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그는 그 논문들을 통해 김재권식 기능주의의 가능성을 검토하는데, 최근까지의 결론은 이렇다. 먼저, 김재권은 종-제한적이지 않은 일반적 심성을 제거한다. 그리고 두 번째로, 김재권은 종-제한적인 심성까지도 제거한다. 그리고 마지막 결론은, 김재권은 그러한 문제점을 인식하고 환원을 포기하고 환원적 설명으로 전향하고 있다. 필자가 보기에 그의 논증에는 납득하기 힘든 부분들이 있다.21)

그는 “김재권식 기능주의와 새로운 기능적 환원이론의 가능성”에서 김재권의 기능적 환원주의에 제기될 수 있는 다양한 비판들을 살펴보고, 그에 대한 김재권의 대답이 성공적이라고 평가한다. 하지만 T. 호간에 의해 제기된 비판은 김재권이 비껴갈 수 없는 비판이며, 결국 기능적 환원주의는 제거주의로 귀착한다는 결론을 도출한다. 하지만 이러한 결론을 지지하기엔 그의 논변이 너무 약하다. 이종왕이 이러한 그러한 주장을 펴기 위해 김재권에서 인용한 구절을 다시 인용해 보겠다.


이제 우리는 다음 질문을 받을 차례가 되었다. 만일 M이 2차 속성이고 P는 1차 속성이라면(또는 M이 외재적(관계적) 속성이고 P는 내재적 속성이라면, 또는 M이 인과적 역할이고 P는 그 역할의 점유자라면), 어떻게 M이 P와 동일할 수 있는가? 한 속성이 1차 속성이면서 2차 속성이라고 생각한다든지, 외재적(관계적) 속성이면서 내재적 속성이라고 한다든지, 역할이면서 그 역할의 점유자라고 생각하는 것은 모순이 아닌가?22)


이종왕은 이러한 김재권의 질문을 통해 그가 중요한 이론적 전환을 꾀하고 있다고 주장한다.23) 즉 김재권이 주장한 바에 따르면, “구조 특이적인 정신적 속성들조차도 속성들이 아니고 단지 개념일 수 있으며,”24) 또는 “국지적 환원의 경우에도 하나의 실현자를 가진 한 정신적 속성도 기능적 속성이라기보다는 기능적 개념이다”25)라는 것이다. 따라서 김재권은 “종-제한적이든 종-제한적이지 않든 정신적 속성들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는 것이다.26) 하지만 이러한 주장에 대한 설득력 있는 논변은 아쉽게도 없다. 그리고 필자는 아직도 김재권이 어디에서 “종-제한적이든 종-제한적이지 않든 정신적 속성들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는지를 찾지 못했다. 그가 제시한 가장 신빙성 있는 논거는 김재권의 ‘긍정적인 대답’이다.27) 그런데 위의 인용 글은 그저 수사학적인 질문 아닌가? 그리고 뒤이어 김재권은 그에 대답하고 있지 않았는가. 하지만 이종왕은 김재권의 대답을 달리 해석하고 있다. 이종왕이 “국지적 속성을 포함하여 모든 기능적 속성들의 존재에 의문을 표시한다”는 자신의 주장을 옹호하기 위해 인용한 김재권의 글을 보자.(따옴표 안이 김재권의 글)


예를 들어, 그는 “2차 속성보다는 속성들의 2차 기술구들이나 지시어들 또는 2차 개념들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오해를 덜 살 수 있다”라고 말하면서, 이러한 개념을 “속성들의 성긴 개념”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사실 그는 종-제한적이든 종-제한적이지 않든 간에 정신적 속성들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 같다.28)


이종왕은 “2차 속성보다는 속성들의 2차 기술구들이나 지시어들 또는 2차 개념들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오해를 덜 살 수 있다”는 김재권의 말을 정신적 속성들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자신의 결론을 인정하는 근거로 받아들인다. 정말 그런가? 그 글의 앞 뒤 문맥을 살펴보자. 김재권은 이종왕이 앞에서 인용했던 수사학적 질문들을 통해 1차 속성과 2차 속성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우리가 임의의 속성 영역에 대해서 존재 양화를 한다고 해서 문자 그대로 속성들의 새 집합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인식하는 데서 시작할 수 있다. ... 우리의 표기들에 대한 단순한 논리적인 연산에 의해서 우리의 존재론이 바꿔질 수는 없다. ... 어떤 것이 2차 속성 M을 가진다는 것은 특정한 명세를 만족시키는 어떤 1차 속성을 가지는 것이다. ... 이때 M 자체를 하나의 독자적인 속성으로 생각할 필요는 전혀 없다.29)


우리는 편의상 어떤 무리들을 양화한다. 한국철학회 회원들을 모두 열거하기 힘들 때 ‘한국철학회원들’이라고 말하지만 그렇다고 한국철학회원들이라는 새로운 존재자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러한 2차 기술구들에 대해서는 속성들이라기보다는 개념들이나, 기술구, 지시어들이라고 부르는 것이 오해의 소지를 없앨 수 있다. 이처럼 우리는 “2차 속성보다는 속성들의 2차 기술구들이나 지시어들 또는 2차 개념들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오해를 덜 살 수 있다”는 김재권의 말을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김재권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우리는 얻는다. 즉, 우리가 한 속성에 대해서 1차 속성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진정한 속성을 말하는 것이지만 2차 속성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우리의 언어적 편리를 위한 표현일 뿐이다. 따라서 이종왕의 주장 중에서 종-제한적이지 않은 속성에 관해서 (잠정적으로) 그는 옳다. 하지만 나머지 부분에서 그는 틀렸다.

백도형도 지적했듯이,30) 일반적인 심적 속성을 부정하고 개념을 인정한다고 해서 제거주의로 몰아붙인다면 루이스나 암스트롱 같은 개념적 기능주의자들은 더 말할 것도 없이 제거주의자가 되 버릴 것이다. 그리고 좀 다른 맥락이긴 하지만 데이빗슨의 무법칙적 일원론도 심성을 개념으로 간주한다. 심성을 개념으로 간주하는 것은 유명론자들의 대표적인 논지이다. 백도형이 지적했듯이, 김재권이 심성(일반)이 개념임을 받아들였다는 점 이외에 제거주의의 혐의를 제시하지 못한다면 이종왕의 논변은 실패하고 말 것이다.

백도형은 심성 유명론과 심성 제거주의에 대한 상세한 논의를 통해서 그것들의 차이점을 제시하고 있다.31) 그 결정적인 차이점은 유명론이 보편자로서의 속성의 실재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데 토대를 두고 있다. 이처럼 우리는 김재권에게서 심성 유명론의 혐의를 찾는 것을 정당하게 인정할 수는 있겠지만 그에게서 제거주의의 혐의를 찾는 것은 부당하다. 하지만 김재권은 완전히 유명론자로 몰아붙일 수 있는지도 사실은 생각해 볼 문제이다. 그는 종-제약적이긴 하지만 분명 보편자로서의 심적 속성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만일 종-내적인 또는 개별자-내적인 보편성까지도 부정했다면 그는 온전한 유명론자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32)

앞에서 필자는 이종왕의 주장이 반만 옳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 옳은 반도 전적으로 옳은 것 같지는 않다. 최근 논문33)에서 그는 김재권의 기능적 환원주의가 결국 제거주의로 귀착되며, 그러한 제거주의를 벗어나기 위해 가장 최근의 논문에서는 환원주의가 아닌 환원적 설명으로 후퇴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종왕의 이러한 주장은 제거와 환원의 차이를 간과한 데서 기인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이종왕이 인용했던 논문을 포함하여 여러 군데서 김재권은 제거와 환원의 차이를 강조하여 설명한다. 고통 일반을 개념으로 간주함으로써 제거주의로 귀착되는 것은 아닌가라는 예상되는 질문에 대한 김재권의 대답을 조금 길긴 하지만 직접 들어보자.


어떤 의미에서 그렇다. 내가 말했던 것처럼, 이러한 접근에 근거하면 세상의 어떤 속성들도 일반적인, 종에 제한되지 않은 심적 개념들에 부합하지 않는다. 그러나 기억하라. 여전히 고통들은 있으며, 우리는 때때로 고통에 빠진다. 여전히 옥의 표본들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현재의 접근법이 그것의 존재론적 함축에 있어서 현재 등장해있는 표준적인 심성 제거주의의 한 형식이 아니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 책상들은 과학적 종을 구성하지는 않는다. 책상들 그 자체에 관한 법칙들은 없으며, 하나의 책상임은 인과적-설명적 종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책상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짓된 주장으로부터 분명히 구분되어야 한다. 고통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현재의 관점은 “종-특정 심리학들”을 허용하며 사실상 고무한다. 그러나 표준적인 제거주의는 심리적인 모든 것―총체적인 심리학뿐만 아니라 종-특정 심리학까지―을 제거해버릴 것이다.34)


김재권의 말을 직접 듣고 보니 이종왕이 옳았던 그 반도 사실은 또 반만 옳은 것 같다. 우리는 ‘플로지스톤’과 ‘마녀’는 제거했지만 ‘책상’이나 ‘옥’은 여전히 사용한다. 고통은 플로지스톤과 같은 운명이 아니라 책상과 같은 운명이다. 그것이 개념이 됨으로써 존재론적 인과력은 제거된다 할지라도 여전히 그 개념의 “합법성”과 “유용성”은 살아 남는다. 우리가 책상이 존재한다고 계속해서 말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또한 고통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책상은 과학적 종도 아니고 인과적 종도 아니다. 그것은 옥도 마찬가지며 고통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내가 아는 누구도 책상이 존재한다는 주장을 거짓으로 치부하지는 않는다. 이것을 인정한다면 당신도 고통이 있음을 인정할 것이다. 물론 이러한 고통이 존재한다는 주장은 제한적인 고통, 예를 들어 인간-고통이 존재한다는 주장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한에 있어서 그렇다.

어쨌든 이러한 논의를 통한 이종왕의 결론은 김재권이 이론적 변화를 꾀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김재권도 이러한 문제점들을 인정하고 최근에35) 환원이 아닌 환원적 설명으로 후퇴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필자[이종왕]의 견해를 뒷받침하는 증거는 도처에 있다. ... 그[김재권]는 “의식과 두뇌 사이에 있다고 주장하는 ‘간극’이 ‘설명적’ 간극이라고 불리는 것에 주목하자. 이는 그 간격이 반드시 존재론적인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김재권 2000, 98-99쪽)고 말하면서 동일성에 대한 변호로부터 환원적 설명의 옹호로 그의 기호를 바꾸고 있다. 그렇다. 그는 그 두 종류의 제거주의에 대한 어려움을 심각하게 인식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곧바로 동일론을 비판하게 된다.36)


이종왕은 너무 많은 것들을 ‘건너뛰어’ 해석하는 것 같다. 분명 같은 글에서 김은 환원 가능성을 주장하고 있지 않은가? 김이 비판한 것은 불록 & 스톨네이커 식의 동일성이지 동일론 자체가 아니다. 오히려 기능적 정의를 통한, 설명의 문제를 야기하지 않는 심성 정의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며, 그것은 바로 동일성 진술로 이루어진 것이다.37) 환원적 설명에 대한 김의 주장은 환원적 설명으로 만족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기능적 “환원”을 통해 환원적 설명 또한 보증된다는 것이며,38) 네이글식 환원은 환원적 설명은커녕 도대체 설명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한 문제점을 보완하는 것이 기능적 환원이며, 환원적 설명은 기능적 환원의 당연한 귀결일 뿐이다.39)

계속해서 이종왕은 다음과 같이 김재권의 글을 인용하여 그가 속성 동일론에 대한 회의적 견해를 피력한다고 주장한다.


이 물과 이 H2O 분자들의 양이 정확히 동일한 공간 영역을 차지하고 있음을 보일 수 있다면, 이것으로 동일성의 문제는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되는 것이다. 고통과 C-섬유 활성, 의식과 추체 세포 활동의 경우는 다르다. 그 이유는 이들이 대상이나 실체가 아니라 속성(상태, 사건, 또는 유사한 것)이기 때문이다.40)


하지만 이러한 구절이 들어있는 전체 문맥을 살펴보면 이종왕의 해석은 적당하지 않은 것 같다. 전체적으로 보아 김재권이 실제로 말한 것은 속성 동일성과 블록-스톨네이커가 예시했던 실체(또는 개체) 동일성은 다르다는 것이다. 즉 블록-스톨네이커의 경험적 동일성 논의에서 등장하는 동일성 사례들은 심신 동일성의 사례와 같은 종류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오히려 김재권이 하고 싶은 말은 다른 식의 정당화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이는 기능적 정의에 대한 또 다른 암시일 뿐이다. 이어지는 김재권의 말을 계속 들어보자.


블록과 스톨네이커의 주장은, “열=분자 운동 에너지”, “온도=평균 분자 운동 에너지”와 같은 과학적 동일성이 설명적 고려에 의하여 정당화되듯이 이러한 심신 동일성도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정당화된다는 것이다. ... 만약 동일성을 구할 수 있다면, 많은 것을 설명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심-신의 경우에 그 동일성은 독립적으로 정당화되어야 할 것처럼 보인다. 독립적 정당화가 없다면, 그런 동일성은 주장할 자격이 없다. ... 그렇다면 우리는 블록과 스톨네이커가 원하는 종류의 동일성은 설명적 간극의 문제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결론 내려야 한다.<강조 추가>41)


이러한 문맥에서 볼 때 우리는 다음의 문장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나는 심-신 동일성은 우리에게 열려진 선택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것은 우리에게 주어져 있지 않다.42)


이 말이 부정하는 것은 김재권이 설명적 상승의 도구로서 고려할 수 있는 세 가지 가능성 중에서 세 번째 방법인 동일성 진술,43) 특히 블록-스톨네이커가 제시한 크립키식 경험적․필연적 동일성 이론이다. 김재권이 말했듯이 이것은 “기능적 환원이 유일한 희망임을 의미한다.” 그리고 여전히 기능적 환원의 주요한 한 부분은 심적 속성과 물리적 속성의 동일성을 표현하는 정의임은 변함없다.



Ⅴ. 문화 상대성의 문제


이제까지 살펴본 비판들에 대해 김재권의 기능적 환원주의가 충분한 대답을 가진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필자는 기능적 환원주의에 제기될 수 있는 한 가지 문제를 간략히 고찰해 봄으로써 끝맺고자 한다. 하지만 이 문제는 기능적 환원주의가 더 정교하게 숙고해보아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기능적 환원의 도식에서 ‘고통’과 그것에 대한 기능적 정의는 상식 심리학의 심성 일반화에 토대를 두고 있는 개념적 동일성 관계이다. 그 기능적 정의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상식적 심성 개념을 만족시키도록 구성되는 것이다. 그래서 기능적 정의는 사실상 기능적 분석일 뿐이다. 상식이란 한 사회의 문화적 구성원들의 대부분이 공통적으로 가진 생각이라고 볼 때, 상식은 전적으로 그 문화에 의해 결정되고, 또한 역으로 그 구성원들의 심성 이해를 결정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환원주의에 문화 개념을 도입하는 것은 너무 위험한 발상 아닌가? 물리주의자들 중에서도 환원주의자는 가장 강한 의미의 자연의 결정성을 주장하는 이들이 아니던가. 그리고 우리가 알기에 문화는 시대와 장소에 따라 상대적이지 않은가. 시대와 장소, 인종, 민족, 세대간의 문화 차이는 각 문화 집단간의 상이한 심성 이해를 가져오지는 않을까. 그런 식의 심성 이해는 인간 중심적인 편협함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일의적인 환원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기능적 환원주의는 이러한 의문에 답해야 한다.

기능적 환원주의에 문화적 요소가 개입한다는 생각은 환원주의가 선험적 심신 동일성을 도입했을 때 이미 함축되어 있었다. 김재권은 기능적 환원에서 종-제한적 환원에만 관심을 가졌지만, 이제 우리는 그가 간과하고 있는 문화-제한적 환원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런데 김재권이 환원의 이러한 처지를 전적으로 간과한 것 같지는 않다. 우리는 김재권의 최근 저작에서 다음과 같은 언급을 볼 수 있다.


대체로 기능적 환원은 다음 두 측면에서 부분적이고 점진적인 과정이다. 첫째는 다수 실현 현상 아래서는, 환원될 속성의 실현자를 확인하는 과정은 끝이 없는 과정이게 마련이다. 필연적으로 우리는 주어진 한 시점에서는 특정한 생물 종의 실현자들에, 또는 같은 실현자를 공유하리라고 판단되는 개체들의 선택된 집단에 선택적으로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다. 둘째로, … 환원의 목표가 되는 속성의 특성을 기능적으로 기술하는 것은 불완전하며, 연구가 발전하고 이론적 지평과 요청이 변화함에 따라 계속적인 증가, 감소 그리고 기타의 수정의 과정을 겪을 가능성이 높다.44)


두 번째 측면에서 김재권은 개념적 분석 내용의 변화 가능성을 인정한다. 그런데 그는 변화의 가능성을 경험적 연구와의 관련 속에서만 바라보고 있다. 그는 심성에 대한 기능화가 주로 과학이 할 일이며, 따라서 “그 증가, 감소, 기타의 수정”이 경험적 성과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으로 간주하는 듯하다. 즉 그는 경험적 과정 속에서 어떤 절대적인 기준을 찾는 것처럼 보인다. 심성에 대한 개념적 분석 내용이 변할 수 있다는 김재권의 말은 옳다. 하지만 그러한 변화는 단순한 경험적 요인에 의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과학 소설을 통해 많은 인공 지능체들을 만난다. 최근의 영화에서도 보았듯이 과학의 발전은 우리가 겉으로 구별하기 힘들 정도로 우리와 유사한 인공 지능체들을 만들어 낼 지도 모른다. 그 경우 그것이 고통을 느낀다고 해야 하는지의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필자가 보기에 그 문제는 사실에 관한 문제가 아니다. 그것을 ‘우리’에 포함시킬지의 문제는 단순한 사실의 문제가 아니라 일종의 사회학적 문제이다. 이는 우리의 결정을 요구하는 문제이지 사실적 판단을 요구하는 문제가 아니다. 그리고 그 결정은 심성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반영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심성 이해가 극단적으로 다른 두 문화를 상상해 볼 수 있다. 그 두 문화는 따라서 심성에 대한 서로 상이한 개념적 분석을 가질 것이며, 우리의 환원은 그러한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이제 기능적 환원주의는 이러한 심성 정의의 변화 가능성이 가져올 지 모르는 상대성을 어떻게 극복하는 지에 따라 그 성공 여부가 판가름나게 될 것이다. 필자는 심성 이해에 있어서의 문화의 역할은 ‘우리’라는 개념을 통해서 이해될 수 있다고 본다. 다음의 구절도 그러한 생각을 담고 있다.


개념을 같이 하는, 그래서 함께 언행을 번역하고 해석할 수 있는 이 세계의 거주자들은 이상한 종류의 화성인일지라도 ‘우리’로서 불리고 의식화할 수 있다. ‘푸랗다’의 개념을 갖는 화성인의 존재는 논리적으로 가능하다. <그런데> 그들의 언어적 실천을 우리가 해석할 수 있을까? 그 대답은 부정적이다. 그들은 우리와 함께 언어 생활을 할 수가 있는 ‘우리’가 아니다. … 언어, 더 기본적으로 개념은 역사를 같이하는 우리의 실천적 능력의 독특한 속성이다. … 언어의 토대는 ‘나의 의식’이 아니라 ‘우리의 삶’이다.45)


“우리”가 서로의 언어를 번역하고 사용할 수 있다면 우리는 동일한 의미 기반을 갖는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46) 그리고 우리는 포괄적인 의미에서 하나의 문화 공동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이렇듯 언어적 소통 가능성을 문화의 동일성 기준으로 삼는다면, 적어도 우리는 5천년 전의 고대 이집트 문명을 우리와 동일한 문화를 갖는 공동체로 간주할 수 있다. 적어도 우리는 그들의 언어를 번역하고 이해하지 않는가.

이렇게 문화를 가장 광범위하게 구획 지을 경우 우리는 ‘일의적인 의사소통 가능 영역’을 얻을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의사소통의 가능성은 단순히 언어적 의사소통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외계를 향해 날아가고 있는 보이저 호에 실린 상형문자들처럼, 또는 과학 소설들에서 등장하는 여러 가지 방법들처럼, 의사 소통은 다양한 방법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 이러한 기준에 따르면, 번역 가능한 문화 집단들은 같은 문화 내에 있으며, 또한 역사상에 등장하는 문화들도 우리와 같은 테두리에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런 문화 개념은 가장 보편적이면서도 가장 보수적인 개념일 것이다. 또한 그렇기에 환원에 필요한 보편성과 객관성(간주관성)의 토대를 거기에서 찾을 수 있다.


참고문헌


김재권(1992), “Multiple Realization and the Metaphysics of Reduction,” in Philosophy and Phenomenological Research, Vol. LⅡ, no. 1, 1992

______(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