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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현대영미철학

데이빗슨의 사건 존재론


데이빗슨의 사건 존재론

이 한 홍*

<한글요약>

이 글에서 다룬 것들은 데이빗슨의 심리철학에서 중요한 '인과문장의 논리적 형식, 사건, 부사구, 행위'와 관련된 것이다. 이 중에서도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 '사건'이라는 개념이다. '사건'이 갖는 특성이 나머지 것들에 그대로 전달되기 때문이다.

데이빗슨에 의하면 '사건'은 시·공 속의 구체적인 개별자이고 한 사건과 다른 한 사건이 '야기하다(cause)'에 의해서 연결될 때 인과관계가 성립한다. 이 인과관계를 표현하는 인과문장의 논리적 형식은 1차 언어의 2항 술어 논리의 구조를 갖는다. 그런데 '야기하다(cause)'를 문장연결사로 해석하게되면, 인과문장은 진리함수적이라는 반직관적인 결론에 이르게 된다. 데이빗슨은 프레게 논증을 사용하여 이 과정을 보여준다.

'사건'에 관한 문장들은 일반적으로 부사구의 수식을 받는다. 데이빗슨은 양화논리를 사용하여 이 부사구들이 관계를 나타내는 항으로 표현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런 분석을 통해서 부사구의 수식을 받는 사건문장의 함축관계가 설명된다.

데이빗슨은 행위문장도 양화논리를 가지고서 분석하는데, 그에 따르면 행위도 구체적인 시·공간을 가지는 개별자이므로 구속변항의 값으로 나타낼 수 있다. 즉 행위도 하나의 사건이라는 것이다. 행위가 하나의 사건인 이상, 그것도 인과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1. 머리말


흄은 {오성에 관하여}에서 '인과 관념은 대상들 사이의 어떤 관계에서 유래하는데, 우리가 원인과 결과라고 여겨지는 대상들은 그 대상들이 무엇이든 간에 모두 인접해 있고 원인은 결과에 시간적으로 우선한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것은 구체적 사건들간의 일회적 관계일 뿐 그 경험에서 어떠한 법칙도 얻어낼 수가 없고 필연성이라는 관념도 얻어낼 수 없다. 흄은 인과법칙을 삶 속에서 얻어진 습관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데이빗슨은 인과문제를 '존재차원'과 '언어차원'으로 구분해서 다룬다. 그에 의하면, 인과관계자체는 일회적이고 구체적 사건들간의 관계임에 반해서 인과법칙은 언어차원의 것이다. 인과문제에 대한 데이빗슨의 이런 생각은 흄의 생각과 쉽게 연결된다. 흄은 인과율을 인간의 습관이나 연상심리의 산물로 보고 데이빗슨은 인과율을 우리 언어의 결과물로 본다는 점에서 차이가 나지만 두 사람 다 인과율을 인간 의존적인 것으로 본다는 점에서는 같다.

데이빗슨은 인과관계에 대한 연구와 인과문장의 논리적 형식에 대한 연구를 구분하면서 자신의 관심은 인과문장의 논리적 형식을 밝히는 데 있다고 한다. 인과문장의 분석 결과 그것은 1차 언어의 2항 술어로 구성되어 있음이 밝혀진다. 다시 말하면, 인과문장은 명사와 명사간의 관계, 곧 사건과 사건간의 관계임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사건'이라는 개념은 그의 심리철학의 토대이며 따라서 이것에 의해서 그의 심리철학의 성격이 결정된다. 이 글의 제목을 [데미빗슨의 사건존재론]으로 정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그래서 필자는 그의 사건존재론과 이와 관련된 문제들을 검토해보고자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먼저 인과문장의 논리적 형식에 관한 데이빗슨의 분석을 검토한 후 그의 '사건론'을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사건문장의 함축문제와 관련된 시·공간 부사구 수식의 문제와 우리의 행위가 하나의 사건인지, 만일 사건이라면 그것도 인과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2. 인과 문장의 논리적 형식


전통적으로 인과관계에 대한 논의는 인과관계에 대한 본성을 밝히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러나 데이빗슨은 "인과관계"(Causal Relation)(1967)라는 논문에서 인과관계 그 자체의 본성을 분석하려는 것을 거부한다. 그의 관심은 인과문장의 논리적 형식을 밝혀내는 일이라 한다. '그 누전이 그 화재를 야기했다' (The short circuit caused the fire)는 인과문장을 살펴보자. '그 누전'이라는 단칭명사와 '그 화재'라는 단칭명사가 '……이 ……를 야기했다'는 것에 의해서 연결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인과문장이 참이기 위해서는 두 사건이 있어야 하고 한 사건이 다른 한 사건을 실제로 유발해야한다.

데이빗슨은 인과관계에 의해서 연결되는 것들은 구체적 사건들이라고 말한다. 인과관계를 주장하는 문장들이 사건들 자체간의 관계에 의존하기 때문에, 인과문장을 구성하는 하나의 단칭명사를 동연적인 명사로 대체해도 그 문장의 진리값은 변하지 않는다. 예컨대, 스미스가 달에 가장 먼저 착륙한 사람이라고 한다면, '스미스의 죽음은 그 사다리에서 그 떨어짐에 의해서 야기되었다'는 문장은 '달에 가장 먼저 착륙한 사람의 죽음은 그 사다리에서 그 떨어짐에 의해서 야기되었다'로 바꾸어 쓸 수 있다는 것이다. 인과문장에서 동연적인 명사로 치환이 되는 이유는 인과관계는 사건들 간의 관계이고 사건들은 개별자라는 데이빗슨의 주장의 결과이다.

데이빗슨은 인과문제를 존재론적인 차원과 언어적인 차원으로 나누어 생각한다. 존재론적인 차원에서의 인과관계는 사건과 사건간의 관계다. 반면, 언어적 차원에서의 인과관계는 사실과 사실간의 관계다. 경험론적 전통의 영향을 받은 그의 이분법은 프레게 논증에 의해서 더욱 강화된다. 프레게 논증은 한 문장 내에서 동연인 명사, 동치인 문장의 치환을 허용하는 문장연결사(sentential operator)는 진리함수적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데이빗슨의 프레게 논증은 기본적으로 다음을 전제하고 있다. (a) 인과관계는 문장에 대응하는 사실과 사실간의 관계로 표현될 수 있다. (b) 논리적으로 동치인 문장들은 인과문맥에서 진리값을 바꾸지 않고서도 치환될 수 있다. (c) 동연인 명사들은 인과문맥에서 진리값을 바꾸지 않고서도 치환될 수 있다. 프레게 논증은 아래의 예에서 다음과 같이 적용된다.

전제 (a)를 받아들이면, '아퀴나스의 뚱뚱함은 아퀴나스의 비만을 야기했다'는 문장을 (1)과 같이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1) 아퀴나스가 뚱뚱하다는 사실은 아퀴나스가 비만이라는 것을 참이게 했다 (The fact that Aquinas was fat caused it to be the case that Aquinas was heavy).


(2) 천사박사가 뚱뚱하다는 사실은 아퀴나스가 비만이라는 것을 참이게 했다 (The fact that the Angelic Doctor was fat caused it to be the case that Aquinas was heavy).


우리는 전제 (c)에 의해서 (1)로부터 (2)를 추론할 수 있다. 왜냐하면, 아퀴나스와 천사박사의 외연은 같기 때문이다. 프레게 논증은 (1)에서 (3)도 추론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전제 (b)에 의해서). 왜냐하면, '프레게는 논리학자다'라는 문장과 '아퀴나스는 뚱뚱하다'는 문장은 동일한 진리값을 가지기 때문이다.


(3) 프레게가 논리학자라는 사실은 아퀴나스가 비만이라는 것을 참이게 했다.

(The fact that Frege was logician caused it to be the case that Aquinas was heavy)


그러나 (1)에서 (3)을 추론한다는 것은 이상해 보인다.

위의 논증을 데이빗슨의 기호법으로 표현해보자. 아래의 문장 (4)는'Aquinas was fat'와 논리적으로 동치이다.


(4) (x=x and Aquinas was fat) = (x=x)


다시 우리는 (1)에서 (5)를 얻을 수 있다(전제 (b)에 의해서).


(5) The fact that (x=x and Aquinas was fat) = (x=x) caused it to be the case that Aquinas was heavy.


동연인 명사로 치환할 수 있다는 원리(전제 (c))에 의해서 단칭명사 (x=x and Aquinas was fat)를 대체할 수 있는 다른 이름이 있다면, 우리는 그것으로 치환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아퀴나스는 뚱뚱하기 때문에, '아퀴나스는 뚱뚱하다'는 문장은 어떠한 참인 문장으로도 치환될 수 있다. 왜냐하면, (x=x and Aquinas was fat) = (x=x), (x=x and Frege was a logician) = (x=x)이 둘 다 참이라면, (x=x and Aquinas was fat) = (x=x and Frege was a logician) 이 성립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1)에서 (6)을 얻을 수 있다.


(6) The fact that (x=x and Frege was a logician) = (x=x) caused it to be the case that Aquinas was heavy.


이것은 다시 Aquinas was fat라는 문장에서 (x=x and Aquinas was fat)= (x=x)를 얻을 수 있었듯이 (x=x and Frege was a logician) = (x=x)는 'Frege was a logician'으로 치환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6)에서 (7)을 얻을 수 있다.


(7) The fact that Frege was a logician caused it to be the case that Aquinas was heavy.


이상의 논증이 보여주는 바는 우리가 프레게 논증의 세 전제를 받아들인다면, (1)에서 (7)과 같은 이상한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프레게 논증의 세 전제 중 하나 이상을 거부함으로써 이런 이상한 결과를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치환의 원리를 거부하든지, 데이빗슨이 선택한 길이지만, 인과 관계가 문장과 문장간의 관계, 혹은 사실과 사실간의 관계라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인과문장이 진리함수적이라는 주장을 거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과문장이 진리함수적이라는 반직관적인 문제의 원인을 데이빗슨은 '야기하다'(cause)에 대한 오해 때문이라고 한다. 다음의 두 문장을 보자.


(A) 그 누전이 그 화재를 야기했다.

(The short circuit caused the fire.)

(B) 누전이 있었다는 그 사실은 화재가 있었다는 그 사실을 야기했다.

(The fact that there was a short circuit caused it to be the case that there was a fire).


오해의 발단은 (B)가 (A)의 논리적 형식이고 (B)의 필기체 부분을 '그리고'나 '만일……하다면'과 같은 문장 연결사로서 기능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과관계를 문장연결사에 의해서 연결되는 문장들간의 관계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런 접근은 <인과 법칙은 보편 가언 명제들이고 단칭 인과진술들은 보편가언명제들의 예화여야 한다>는 생각의 지지를 받으며, 인과 법칙을 보편양화의 실질적인 조건문(실질 함축)에 불과하다고 생각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보자. 그러면, (B)는


(C) 만일 누전이 있었다면 화재가 있었다.

(If there was a short circuit, then there was a fire.)


를 함축하게 된다. 그러나 (C)는 (B)를 함축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B)는 (C)보다 강한 주장인


(D) 누전이 있었다. 그리고 화재가 있었다.

(There was a short circuit and there was a fire.)


도 함축하기 때문이다. 즉, (B)는 (C)와 (D)의 연언이기 때문에 (B)는 (C)의 예화가 될 수가 없다. 반면, (A)는 (C)의 예화이기도 하고 (D)의 예화이기도하다. 따라서 (B)는 (A)의 논리적 형식이 될 수 없다.

데이빗슨은 (B)가 (A)의 논리적 형식이 아닐뿐더러 인과문장은 외연적 1차 언어의 2항 술어에 의해서 표현되는 것이지 문장연결사에 의해서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2항 술어에 의해서 표현된 문장이 진리함수적일 수 없음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명사들은 지시사로서만 기능할 뿐이지 진리의 담지자는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데이빗슨이 문장 연결사에 의해서 구성된 인과관계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경우는 언어적 차원, 혹은 설명적 차원에서의 관계이기 때문에 외연적 관계가 성립되지 않고 더불어 진리함수의 문제는 발생하지 않는다.

이상의 분석을 통해서 인과문장은 1차 2항의 술어논리의 구조를 갖고 있음이 드러났다. 즉, 인과문장은 명사와 명사간의 관계, 혹은 사건과 사건간의 관계라는 것이다. 그런데 데이빗슨에 있어서 사건이란 무엇인가? '사건'이라는 개념은 데이빗슨의 심리철학의 토대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건'에 대해서 살펴봐야 할 것이다.



3. 사 건


'사건'이라는 개념은 데이빗슨의 존재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다. 유명론의 피가 흐르고 있는 데이빗슨은 존재론적인 경제성에 많은 매력을 느낀다. 그러나 존재론적인 경제성이 그의 목표는 아니다. 오히려 한 이론 체계의 단순성과 통일성에 도움을 줄 수 있으면 하나의 실체를 더 추가할 수도 있다. '사건'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도 이런 이유이다. 그러나 경제성의 원리에 의해서 사건의 존재를 인정하든, 단순성의 원리에 의해서 사건의 존재를 인정하든 실체의 개별화에 대해 설명을 할 수 없으면 그의 사건존재론은 무용지물이다. 가령, 두 번에 걸쳐 두 개의 실체를 지시했을 경우, 그것은 동일한 것을 두 번 지시한 것인지, 두 개의 다른 것을 지시한 것인지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데이빗슨한테는 이것이 중요했다. 그래서 사건에 대한 데이빗슨의 작업의 상당부분은 사건의 동일성 조건에 관한 것이다.

데이빗슨에게서 사건은 되풀이될 수 없는 구체적인 개별자(token)이다. 그것은 시·공적인 존재이고 일회적이며 외연적이다. 따라서 데이빗슨의 사건에는 속성은 개입할 여지가 전혀 없다. 속성이라는 것은 단지 술어로서만 존재할 뿐이고 객관세계에 실재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점에서 그에게는 유명론의 피가 흐른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는 사건과 그 사건을 지시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기술(description)을 구분한다. 그에 의하면, 개별적 사건은 존재론적으로는 모두 물리적 사건이다. 하지만 기술방식에 따라서 물리적 사건도 될 수 있고 심적 사건도 될 수 있다.

반면 김재권에 의하면 사건은 '개체, 속성, 시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사건 는 t시간에 대상 x가 속성 P를 가질 때 존재한다. 그러니까 사건은 '어떤 개체(object)가 어떤 시간에 어떤 속성(property)을 예화함'으로 정의된다. 사건을 어떤 속성의 예화로 본다면 개별사건a는 유형사건A의 예화이고 그런 예화는 다수 있을 수 있다. 사건에 대한 김재권의 이런 정의는 속성을 보편자로 인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김재권을 실재론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김재권에게 있어서 사건의 동일성 조건은 '개체, 속성, 시간'의 동일성과 일치한다. 두 사건 가 같다는 말은 x=x', P=P', t=t'라는 것이다. 그러나 데이빗슨은 동일한 원인과 동일한 결과를 가지면 동일한 사건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사건'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데이빗슨과 김재권의 논쟁의 핵심이다.

김재권의 속성예화이론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반대는 이 이론은 필요없이 사건의 수를 늘인다는 것이다. 예컨대 브루터스가 시저를 찌른 사건은 브루터스가 시저를 죽인 사건과도 다르며 시저를 암살한 사건과도 다르다. 그래서 속성예화의 사건이론은 사건에 대한 재기술을 허용하지 못한다고 비판을 한다. 왜냐하면 주어진 술어를 바꾸는 것 자체가 사건의 구성 속성을 변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식의 반론에 대해 김재권은 '파랗다'라는 술어와 '하늘색을 가졌다'는 술어는 모두 파란 색이라는 동일한 속성을 나타낸다고 말한다. 그는 사건이 예화하는 속성과 그 구성 속성을 분명하게 구분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사건'의 수는 '사물의 수'나 '사실들의 수'와 같은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이론이 사건들의 수를 너무 많이 증가시킨다는 비판은 별로 심각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 '세바스챤의 산보'와 '세바스챤의 한가한 산보'에 대한 동일성 여부의 문제는 '책이 한 권 올려진 책상'과 '그 책이 치워진 책상'의 동일성 여부의 문제와 유사한 유형의 것이라는 것이다.

김재권은 데이빗슨이 사건에 대한 형이상학적 이론과 사건문장의 논리적 형식은 구분되어야한다고 말하면서도 실제는 그런 구분을 무시한다고 비판한다. 왜냐하면, 데이빗슨이 사건과 행위문장의 논리적 형식에 관한 연구를 근거로 존재론적 주장을 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건 동일성에 대한 데이빗슨의 기준은 순환논법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왜냐하면 데이빗슨에 의하면 동일한 원인과 동일한 결과를 가질 때, 두 사건은 동일한 것이 되는데, 문제는 그 원인과 결과 또한 하나의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재권은 데이비슨의 동일성 기준이 실제 세계에 어떻게 작용할 것인가가 의심스럽기는 하지만, 두 사건의 원인과 결과가 동일하기만 하면 그 사건은 동일할 수 있으며, 데이빗슨의 이 기준은 자신의 동일성에 대한 기준과 양립가능하다고 말한다.

이상에서 우리는 사건에 대해 간단하게 살펴보았는데, 왜 데이빗슨은 사건이 문장에는 대응하지 않고 명사에 대응한다고 할까? 답은 간단하다. 그것은 데이빗슨이 사건을 일회적이고 구체적인 개별자로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건들이 문장에 의해서가 아니라 단칭명사에 의해서 지시된다면, 또 한 문장이 참이 되는 경우가 단칭명사가 사건을 지시할 때라면 다음과 같은 문제가 생긴다. '철수와 숙이가 결혼했다'는 문장이 참이기 위해서는 '철수와 숙이의 결혼'이라는 단칭명사가 구체적 지시체를 가져야할 것이다. 그런데, '철수와 숙이가 결혼했다'라는 문장 속에는 '철수와 숙이의 결혼'이라는 단칭명사가 없다. 데이빗슨은 이 문장을 다음과 같이 변형함으로써 그 문제를 해결한다. 즉. '철수와 숙이의 결혼이었던 어떤 사건이 일어났다'. 데이빗슨은 이런 식으로써 문장의 논리적 형식을 보여준다.

아래에서는 사건문장의 함축관계를 밝혀줄 수 있는 시·공간 부사구 수식의 문제를 살펴보자.



4. 시·공간 부사구 수식의 문제


이 문제는 사건문장의 함축관계를 설명하기 위해서 해결되어야할 중요한 문제다. 그리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도 사건을 구체적인 것으로 또 개별적인 것으로 규정해야지, 추상적인 것으로부터 예화된 것으로 보면 안 된다는 것이 데이빗슨의 생각이다. 왜냐하면, 데이빗슨은 사건문장을 존재양화로 표현을 하는데, 여기서 사건은 구속 변항의 값이 되고 이 변항의 값이 곧 구체적 사건의 존재를 뜻하기 때문이다.

부사구 수식의 문제란 아래의 문장들간의 논리적 함축관계가 사건문장의 논리적 형식을 빌어 설명할 수 있는가하는 것이다. 데이빗슨은 부사구와 관련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수식어들은 부가적인 것이지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문장은 그것들이 없어도 가능하다 ; 문장에서 수식어들을 제거해도 문장은 그대로 남는다. 예컨대, '의도적으로', '우아하게', '물에서', '단지 금요일에만' 등은 문장에서 분리되어도 문장은 그대로 남는다. 인상적인 것은 부사구가 생략된 문장은 그렇지 않은 문장에 의해서 많은 경우에 함축된다는 사실이다.


다음 문장들을 보자.

(1) 데보라는 아침에 브라이튼에서 수영했다.

(Deborah swam in the morning at Brighton)

(2) 데보라는 아침에 수영했다.

(Deborah swam in the morning)

(3) 데보라는 브라이튼에서 수영했다.

(Deborah swam at Brighton)

(4) 데보라는 수영했다.

(Deborah swam)


문장 (1)은 (2)(3)(4)를 함축하고 문장 (2)(3)은 (4)를 함축한다. 데이빗슨은 이 함축관계를 설명하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일차 술어논리학은 부사를 포함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한 방법은 (1)을 3항 술어로 (2)(3)을 2항 술어로 분석하는 것이다. (1)은 '수영했다(x,y,z)'으로 (2)는 '수영했다(x,y)', (3)은 '수영했다(x,z)'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그리고 변항에다 개체 상항을 대입하면 함축관계는 쉽게 드러나는 것 같다. 즉, '수영했다(a,b,c)'에서 '수영했다(a,b)'를, 그리고 '수영했다(a,b)'에서 '수영했다(a)'를 추론할 수 있을 것 같아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추론은 불가능하다. '수영했다(a,b,c)'에서 '수영했다(b,c)'를 추론하는 것은 곤란하기 때문이다. 데이빗슨은 '데보라는 아침에 브라이튼에서 수영했다(Deborah swam in the morning at Brighton)'를 사건에 관한 변수를 숨기고 있는 것으로 또 존재양화에 의해서 구속될 수 있는 것으로 분석한다. 데이빗슨의 표기법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e)((수영했다(데보라, e) & (에(아침, e) & (에서(브라이튼, e)))

(∃e)((Swam(Deborah, e) & (In(the morning, e) &(At (Brighton, e)))


이런 분석에 따르면 행위는 구속변항의 값이므로 하나의 사건일 수 있다. 따라서 행위도 데이빗슨의 사건론에 의해서 설명이 가능하게 된다. 그리고 존재양화로 표현된 위의 표현은 다음과 같이 읽혀진다 : '어떤 사건이 있는데 그것은 데보라에 의한 수영이고 아침에 일어난 것이고 브라이튼에서 일어난 것이다.' 이런 식으로 문장의 논리적 형식을 드러내면, 함축관계를 쉽게 설명할 수 있다. '데보라는 아침에 브라이튼에서 수영을 했다'라는 문장에서 '데보라는 아침에 수영을 했다', '데보라는 브라이튼에서 수영을 했다'는 물론이고 '어떤 것이 아침에 브라이튼에서 일어났다'도 추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분석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아침에 (in the morning)', '브라이튼에서(at Brighton)'와 같은 부사구는 사건과 시간, 혹은 사건과 장소간의 관계임을 알 수 있게 된다. 데이빗슨은 이런 식으로 일차양화 논리학에서 시·공간의 부사구 수식문제를 해결한다. 그럼으로써 시·공간 부사구를 갖고 있는 사건문장의 함축문제도 해결된 것으로 믿는다.

그러면 치솜은 부사구 수식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려 할까? 그는 다음과 같은 식이 성립함을 주장한다.


(A) (∃x)((x는 p라는 사실이다) & (x가 발생했다)) ↔ p

(∃x)((x consists in the fact that p) & (x occurs)) ↔ p

(B) (∃x)(x는 p라는 사실이다) & ∼(x가 발생했다) ↔ not-p

(∃x)((x consists in the fact that p) & ∼(x occurs)) ↔ not-p


치솜에 따르면 위의 (1)번 문장 '데보라는 아침에 브라이튼에서 수영했다'는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1´) (∃x)((x는 데보라가 아침에 수영했다는 사실이다) & (x는 발생했다)

(∃x)((x consists in the fact that Deborah swam in the morning at Brigton) & (x occurs).


같은 방식으로 (2)번 문장 '데보라는 아침에 수영했다'는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2´) (∃x)((x는 데보라가 아침에 수영했다는 사실이다) & (x는 일어났다)

(∃x)((x consists in the fact that Deborah swam in the morning) & (x occurs).


다른 문장들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치솜의 이런 식의 분석은 부사구에 의해서 수식되는 사건문장의 함축문제를 전혀 해결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문제는 이것만이 아니다.

데이빗슨은 치솜의 위의 식(A)와 (B)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한다. 데이빗슨에 의하면, 위의 식(B)를 다음과 같이 고칠 수 있다. 왜냐하면, 양조건언의 양쪽을 부정해도 그것의 진리값은 보존되기 때문이다.


(B′) ∼(∃x)((x는 p라는 사실이다) & ∼(x가 발생했다))

↔ ∼(not-p)

∼(∃x)((x consists in the fact that p) & ∼(x occurs)) ↔ ∼(not-p)


그리고 (B′)의 오른 쪽, 즉 '∼(not-p)'는 'p'와 동치이기 때문에 위의 식 (A)와 (B)에서 (C)를 얻을 수 있다.


(C) (∃x)((x는 p라는 사실이다) & (x가 발생했다))

↔ ∼(∃x)((x는 p라는 사실이다) & ∼(x가 발생했다))

(∃x) ((x consists in the fact that p) & (x occurs))

↔ ∼(∃x)((x consists in the fact that p) & ∼(x occurs))

그런데 이 식은 성립할 수 없다. 왜냐하면 ∼(∃x)((x consists in the fact that p), 즉 p라는 사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참이라 해보자. 그러면 (C)의 오른쪽 부분도 참이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C)의 왼쪽 부분은 'p'라는 사실이 존재함을 주장함에 반해서 오른쪽 부분은 p가 존재하지 않음을 주장한다. 따라서 치솜의 주장은 잘못이다.

위에서는 부사구 수식의 문제와 관련해서 사건문장, 특히 행위문장의 함축관계를 살펴보았다. 잠시 언급되었듯이, 데이빗슨에게는 행위도 하나의 사건이었다. 아래에서는 행위의 설명문제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5. 행위, 이유, 원인


데이빗슨에 의하면 사건은 시·공간을 갖고 있는 구체적 개별자이다. 이런 의미에서 행위도 사건이다. 그러나 행위는 단순한 행동과는 다르다. 우리의 행위는 우리가 갖고 있는 믿음과 욕구에 의해서 발생한다. 그리고 행위와 관련되는 믿음과 욕구의 짝을 그 행위에 대한 이유라 한다. 그러니까 어떤 이유 때문에 수행된 사건이 행위다. 동시에 한 사건이 행위가 되기 위해서는 그것은 특별한 방식으로 기술되어야 한다. 가령, 집중력을 기르기 위해서 사격을 했다. 그러나 우연히 누군가를 죽이게 되었다. 이 경우 사격을 한 것은 의도적이지만 사람을 죽인 것은 의도적이지 않다. 즉, 그것이 기술되는 방식에 따라서 한 사건이 행위가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데이빗슨에 따르면, 행위는 인과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 그의 이런 생각은 이유를 원인으로 보는 것에 반대하던 전통을 부정하는 것이다. 행위도 인과적으로 설명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모든 사건은 물리적 사건이라는 그의 생각에 기인한다. 데이빗슨에 의하면 모든 사건은 물리적인 것이지만 그 사건을 기술하는 어휘에 의해서 심적 사건도 될 수 있고 물리적 사건도 될 수 있다. 따라서 이유와 행위도 물리적인 어휘로 적절하게 기술되면, 그것들은 물리적인 사건이 되고 인과법칙을 예화한다. 일단 물리법칙을 예화하면 이유는 원인이고 행위는 결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데이빗슨에 의하면, 행위를 설명해 주는 이유가 그 행위의 원인이다. 그리고 이 설명을 '합리화'(rationalization)라 한다. 그리고 이유가 행위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바로 직접적인 이유, 즉 동기가 되는 이유 혹은 데이빗슨의 용어를 빌리면 제1 이유가 되어야 한다. 그는 이런 이유들을 행위의 원인이라 한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김재권은 다음과 같은 예를 든다.


하나의 행위에 대해서 믿음-행위의 짝이 하나 이상 관련되어 있을 때도 있다. 우유 한잔을 마시고 싶다는 당신의 욕구에 덧붙여서, 당신이 아래층에서 수상한 소리를 듣고서 그것을 확인하려는 마음이 생겼다고 하자. 그리고 마침내 당신이 침대에서 일어나서 과감히 계단을 내려갔다고 하자. 그러면 당신이 한 이유는 무엇인가? 무엇이 그것을 설명할 수 있는가? 당신이 계단을 내려간 이유는 그 소리를 확인하여야만 하겠다는 당신의 생각이고, 우유를 마시고 싶다는 당신의 욕구는 여기서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할 수 있다. …… 소음을 확인하려는 당신의 욕구와 우유를 마시려는 당신의 욕구는 모두 계단을 내려가기 위한 이유들이다. 그러나 당신의 바로 그 행위에 대한 이유 즉 동기가 되는 이유는 첫 번째이지 두 번째가 아니다. 관련된 행위를 설명하는 것은 단순한 "무엇의 이유"(reason for)가 아니라 "바로 그 무엇에 대한 이유(reason for which)인 것이다. 그러면 엄밀히 말해서 이 둘의 차이는 무엇인가?"


김재권은 데이빗슨의 입장에서 이 물음에 답을 하는데, "바로 그 무엇에 대한 이유"는 그 행위를 설명해 주는 이유이고 이것은 곧 그 행위의 원인이 되는 이유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유를 마시고 싶은 욕구와 수상한 소리를 확인하려는 욕구 사이의 결정적인 차이는 계단을 내려가는 나의 행위의 원인이 될 수 있는가의 여부에 있다. 이렇게 되면 이유에 의한 행위 설명, 즉 합리화하는 설명은 일종의 인과적 설명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데이빗슨은 의도적 행위를 설명함에 있어서 이유가 아닌 인과이론을 필요로 하는가? 그의 생각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행위에 대한 설명은 그것이 왜 일어났는가를 설명해줄 수 있어야 한다. 행위에 대한 설명은 바로 그 이유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것은 곧 그 행위의 원인을 제공하는 작업이다. 즉, ⸁ 행위설명은 어떤 것이 왜 일어났는가에 대한 설명이어야 한다. ⸂ 어떠한 비인과적 설명도 어떤 것이 왜 일어났는가를 설명할 수 없다. 그래서 ⸃ 행위설명은 인과적이어야만 한다.


예를 들어보자.


⹁ "그는 운동을 했다. 그리고 그는 체중을 줄이기를 원했다. 그리고 운동이 체중을 줄여줄 것이라고 생각했다('He exercised and he wanted to reduce and thought exercise would do it)".

⹂ "그는 운동을 했다. 왜냐하면 그는 체중을 줄이기를 원했다. 그리고 운동이 체중을 줄여줄 것이라고 생각했다('He exercised because he wanted to reduce and thought exercise would do it)".


⹁과 ⹂의 차이는 무엇인가? 데이빗슨에 의하면 ⹁은 행위의 정당화에는 포함될 수는 있지만 그 행위를 설명할 수가 없다. 즉, 사람들은 이유를 가지고서(and) 행위를 수행하지만, 이 이유가 왜 그가 그런 일을 했는가에 대한 바로 그 이유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반면에 ⹂는 행위에 대한 인과설명을 하고 있다. '때문에'(because)가 그 기능을 한다는 것이다. 즉, ⹂는 바로 그 이유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because) 그 행위를 수행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바로 그 이유가 그 행위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데이빗슨의 이런 주장에는 반대도 만만찮다. 그는 자신의 이런 주장에 대해 제기된 몇 개의 반대를 보여주면서 그것에 대해 답을 한다.

반대 1. 제1 이유라는 것, 즉 바로 그 이유는 태도와 믿음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것들은 상태나 성향이지 사건은 아니다. 따라서 그것들은 원인이 될 수 없다.

답 1. 이유는 원인이 될 수 없다고 보는 사람들은 상태나 성향을 사건과 구분하고 있다. 물론 구분되기는 한다. 그러나 때로는 상태, 성향, 조건들이 사건으로 불려지기도 한다.

많은 경우 어렵지 않게 제1 이유와 밀접하게 결합된 사건을 발견할 수 있다. 상태와 성향은 사건이 아니다. 그러나 상태나 성향이 갑작스레 발생하는 것(onslaught)은 사건이다. 예컨대, 당신이 나를 화나게 한 바로 그 순간에 너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은 하나의 바람(wanting)이 생겨 날 수가 있고 내가 어떤 것을 보거나 기억하는 순간 어떤 믿음들을 가질 수 있는데, 이렇게 발생된 바람(wanting)이나 믿음들은 단지 상태나 성향이 아니라 하나의 사건일 수 있다. 데이빗슨에 의하면 행위의 원인이 될 수 있는 정신적 사건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정신적 사건은 …을 관찰하거나 …을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관찰되거나 주목되는 것'이라 주장함으로써 중요한 어떤 것을 놓치고 있다. 즉 그들은 정신적 사건을 하나의 성향만으로 보았지 성향의 발생(onslaught of disposition)으로는 보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멜덴은 행위를 인과적으로 설명하고자하는 사람들에게 모든 행위에 공통적이면서 고유한(common and peculiar)사건이 무엇인지를 밝히도록 요구한다. 이 요구에 대해 데이빗슨은 다리가 붕괴되고 널판지가 부러지고 접시가 깨어지는 것에도 공통적이면서 유일한(common and unique)원인은 있을 수 없다고 한다. 물론 가끔씩은 왜 그런 행위를 했는가에 대해 설명을 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 제1 이유를 가지고서 행위를 설명하는 것은 다리의 구조적 결함 때문에 다리가 붕괴되었다고 설명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다리가 붕괴되도록 한 사건이나 일련의 사건들은 모르지만 어쨌든 원인이 되는 사건이나 일련의 사건들이 있었다는 것은 안다.

반대 2. 원인과 결과는 논리적으로 구분된다. 그러나 한 행위의 이유는 그 행위와 논리적으로 구분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유는 행위의 원인이 아니다.

답 2. 이와 같은 공격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논리적 관계와 인과적 관계는 양립불가능하다. 이 입장에서는 '내가 스위치를 올림'과 '내가 불을 켜기를 원함'간의 관계가 논리적인 것이기 때문에, 이 두 관계는 인과적일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잘 못이다. 왜냐하면, 앞에서도 언급되었듯이 사건은 구체적이고 개별적이고 우연적인 것인데, 이유와 행위도 각각 사건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건과 사건간의 관계를 논리적 관계로 볼 수 없는 이상, 이유와 행위간의 관계도 논리적인 것으로 볼 수는 없다.

그리고 인과관계가 논리적인 것이 아니고 경험적·우연적이라 생각하는 데도 문제가 있음을 지적한다. 참인 모든 인과적 진술이 다 경험적인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보자.


A는 B를 야기했다.

B의 원인은 A다.

∴ B의 원인은 B를 야기했다.


이것은 분석적이다. 데이빗슨에 따르면 인과문장은 그것을 기술하는 방식에 따라서 논리적일 수도 있고 경험적일 수 있다.

반대 3. 원인이 유사하면 결과도 유사하다. 그러나 행위에 있어서는 그렇지 못하다. 즉, 법칙은 본질적으로 일상적인 인과설명에는 적용되지만 합리화에는 적용되지 못한다.

답 3. 협박을 받은 사람이 항상 동일한 반응을 보이지는 않는다. 이유와 행위간에는 일반화만 가능하다. 그런데 일반화는 법칙에 비해 예측 능력이 현저히 떨어진다. 따라서 이유는 원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이 반대 3의 내용이다. 그러나 데이빗슨은 '행위에 대한 예측적 법칙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행위 인과론의 부정을 함축하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반대 4. 사람들은 행위를 할 때 자신의 의도(혹은 행위의 이유)를 틀리지 않고 안다. 추론이나 관찰 없이도 말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인과관계는 이런 방식으로 알려지지 않는다. 따라서 이유는 원인이 될 수 없다.

답 4. 반대자들은 자신의 의도 혹은 이유에 대해 오류가능하지 않다고 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드문 경우이기는 하지만 행위의 이유에 대해서도, 특히 두 개 이상의 이유가 있을 때 어떤 동기에 의해서 그런 행위를 했는지 자신도 틀릴 수 있다. 다시 말하면, 공적 증거나 사적 증거에 의해서 자신이 알고 있던 행위의 이유가 거짓임이 드러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현상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이유로 그런 행동을 했는가에 대한 자신의 지식은 대부분 귀납적이지는 않다. 왜냐하면, 귀납이 있는 곳에는 증거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귀납추론 혹은 관찰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근거로 1인칭 지식을 인과적이지 않다고 주장하는 데는 문제가 있다고 데이빗슨은 말한다. 나아가 귀납 혹은 귀납만을 통해서 인과 법칙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는 것도 잘못이라 말한다. 우리는 직접적인 귀납적인 증거 없이도 인과 관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다는 것이다.



6. 결 론


이 글은 데이빗슨 심리철학의 근거들이 어떤 것이고 그것들이 어떻게 얽히는지를 밝혀내는데 초점을 맞추었다. 이 작업을 위해서 필자는 '사건'이라는 개념을 강조했다. 물론 사건에서 파생된 문제들이 훨씬 더 복잡하고 더 많은 논의를 필요로 할 수는 있지만 말이다.

이 글에서 논의한 문제들은 다음과 같다. 2장에서 인과문장은 사건과 사건간의 관계, 즉 1차 2항 술어논리의 구조를 갖는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만일 인과문장이 사실과 사실간의 관계라면, 인과문장이 진리함수적이라는 이상한 결과를 유발한다는 것을 프레게 논증을 통해서 보였다. 그리고 3장에서는 '사건'이라는 개념을 살펴보았는데, 데이빗슨 심리철학의 전체적인 성격은 그의 사건존재론에 의해서 결정된다. (보편성이 아니라) 개별성과 1회성이라는 특징 때문에 사건은 구속변항의 값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사건을 구속변항의 값으로 간주함으로써 부사구수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열게 된다. 4장에서는 존재양화를 사용해서 부사구 수식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데이빗슨의 시도를 살펴보았다. 부사구의 수식을 받는 사건문장(특히 행위문장)을 분석하면서 그 문장들의 함축관계가 드러났고 행위도 구속변항의 값, 즉 사건임이 밝혀졌다. 행위도 하나의 사건인 이상, 행위에 대한 설명도 인과적일 수 있다는 주장이 가능하다. 5장에서는 행위에 대한 인과설명이 가능한지를 살펴보았다. 행위를 인과적으로 설명할 수 있지만, 그 설명은 엄밀법칙에 포섭되지는 않는다. 이것은 무법칙적 일원론의 논의와 곧 연결된다.

이상의 주제들은 현대 심리철학의 중요한 한 축을 형성하는 데이빗슨의 무법칙적 일원론을 위한 몇 개의 토대들이다. 이런 토대들에 대한 검토는 무법칙적 일원론으로 나아가는 길을 점검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사건'에 대한 데이빗슨의 주장들을 인정한다면, 무법칙적 일원론에 이르는 논증에는 문제가 없어 보인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데이빗슨의 사건존재론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하는 것이다. 데이빗슨을 비판하는 사람들도 그의 '사건 존재론'을 중심으로 몰려있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러나 그런 반론들은 그렇게 결정적인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여태까지 제기된 반론들은 데이빗슨이 가르쳐준 다음과 같은 말을 더욱 의미 있게 하는 것처럼 보인다 : "불일치가 있기 위해서는 상당히 많은 일치가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