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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심리철학

수반(隨伴)과 설명(說明) - 박상욱


수반(隨伴)과 설명(說明)
(Supervenience and Explantion)

 박 상 욱        

 1 [p32:1] 자연적 질서안에서 의식은 무슨 역할을 하는가? 의식은 물리적인 것인가? 의식은 물리적 체계안에서 설명할 수 있는 것인가? 우리는 이러한 문제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체계를 세워야만 한다. 이 장에서 나는 그러한 것 중 하나로, 수반 개념을 제시할 것이고, 환원론적 설명에 적용시킬 것이다. 이러한 설명을 사용하여, 나는 가장 높은 단계의 현상적, 그리고 물리적 사실들의 연관성을 그려볼 것이다.

 

1. 수반(Supervenience)

 

 [p32:2] 우리 세계에 대한 대부분의 근본적인 사실들은 물리적인 사실들이라고 광범위하게 믿어지고, 모든 다른 사실들은 물리적인 것들에 의존해있다. "의존하는(dependent)”이라는 것은 약한 점에서, 대부분이 하찮은 진실일수도 있지만, 그러나 “의존하는”것은 강력한 점에서 충분히 논쟁적이다. 일반적으로 상위 체계의 사실들과 하위 체계의 사실들 사이의 의존적인 관계들은 복잡/다양하고, 의존적인 관계의 종류는 하나의 영역(생물학)안에서 유지 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영역(의식적 경험) 안에서 유지되지 않을 것이다.

 [p32:3] 세계에 관한 물리적인 사실들은 생물학적 사실들을 결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예를들어서, 세계에 관한 모든 물리적인 사실들이 고정되어진다면, 생물학적 사실들을 변화시킬 여지는 없다. 일반적으로 수반은 두 가지 속성들 사이의 관계이다. 직접적으로, 상위 체계의 B-속성들과 더 기본적으로 하위 체계인 A-속성들간의 관계이다.

 [p33:2] 우리의 제안은, 관련된 A-속성들은 물리적 속성들이다라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물리학의 근본적인 속성들은 완벽한 이론들에 의해서 호소되어진다. 물리학의 이론들은 양(mass)/무게(charge)/공간(spatio)/온도(temporal)를 포함하고 있다. 속성들은 다양한 시/공간상 영역의 분배, 다양한 힘의 노력, 그리고 다양한 물결의 형태로부터 특징지워진다. 물리적 속성들의 정확한 본성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만약 물리학이 급진적으로 변한다면, 내가 앞에서 언급한 것들과는 매우 다를 것이다. 그러나 물리학의 논증들은 역시나 유사하게 나아갈 것이다. 상위 체계들로써, 수분이 많은(juiciness)/울퉁부퉁한(lumpiness)/집합적(giraffehood)것들은 물리적인 속성을 가짐에도 배제할 것이다. 왜냐하면 물리적인 속성들은 보다 근본적인 속성들로 엄격하게 분류해서 말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가끔 “미시물리학(microphysical)", 혹은 ”물리학의 하위 체계“의 속성들은 명백하다고 말한다.

 [p33:3] 수반의 정형적인(template) 정의를 따르자면 다음과 같다. :

A-속성들은 동일하면서 B-속성들에 있어서 상이한 어떤 두 가능한 상황들이 없다면, B-속성들은 A-속성들 위에 수반한다.

 [p33:4] 생물학적 속성들은 물리학적 속성들에 수반한다. 그러한 면에서 어떤 두 가능한 상황들은 물리적으로 동일한 것은 생물학적으로 동일하다는 것이다. (수적, 혹은 완벽하게 동일성보다 분별할 수 없는 것의 점에서 “동일적(identical)”이라는 말을 쓴다. 이러한 점에서, 두 목록은 물리적으로 동일하다) 우리가 개별적이든, 혹은 전체적인 세계임으로 질문들로 “상황”들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국소적(Local) 그리고 총체적(Global) 수반의 개념에 도달할 수 있고, 우리가 어떻게 가능성의 개념을 세울 것인가에 의해서, 논리적 수반의 개념을 획득하는 것이 달려있다.

 

 국소적 그리고 총체적 수반(Local and global supervenience)

 

 [p33:5] 만약 개별적인 A-속성들이 개별적인 B-속성들을 결정한다면, B의 속성들은 A의 속성들 위에  국소적으로 수반된다. 즉 어떤 가능한 개별자로 유사한 A-속성들이 유사한 B-속성들을 예시하는 것이다. 물리적으로 유사한 두 물체는 유사한 형태를 가지는 것을 필요로한다. 가치는 물리적 속성들위에 국소적으로 수반하지 않는다. 예를들어, 모나리자의 정확한 물리적 복제품은 실제의 모나리자 만큼 가치있는 것은 아니다. 만약 속성이 어떤 문맥에 의존한다면(대상들의 속성들이 물리적 조건 뿐만 아니라, 그것의 환경과 역사라는 지위) 물리적 속성 위의 국소적 수반은 실패할 것이다. 모나리자는 그것의 복제물보다 더 가치가있다. 왜냐하면 그것의 역사적 문맥안에서 차이는 모나리자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에 의해서 그려졌고, 복사물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p34:2] 만약 전체 세계에 관하여 A-사실이 B-사실들을 결정한다면, B-속성들은 A-속성들위에 총체적으로 수반한다. 즉 B-속성들과 다른 것으로 A-속성들을 동일하게 반영하는 두 가능한 상황들이 없다면, B-속성들은 A-속성들위에 총체적으로 수반한다.

 [p34:3] 국소적 수반은 총체적 수반을 포함한다. 그러나 역(反)은 성립하지 않는다. 예를들어, 생물학적 속성들은 물리적 속성들 위에서 총체적으로 수반한다는 것은 설득력이 있다. 어떤 물리적 세계안에서 우리의 세계는 생물학적 동일성으로 동일화 될 수 있다. 그러나 두 가지 물리적으로 동일한 체계들은 정확히 생물학적 특성 안에서 다르게 논의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생물학적 체계는 환경적 맥락안에서 차이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만약 그것들이 다른 진화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면, 물리적으로 동일한 조직들은 다른 종족들의 일원이라는 것은 생각가능하다.

 [p34:4] 의식적 경험이 발생할때, 총체적 그리고 국소적 수반 사이의 구분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의식이 전적으로 물리적인 것에 수반할 때, 국소적으로 수반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두 가지 창조물들이 물리적으로 동일하다면, 환경 그리고 역사적인 맥락에서 차이는 경험의 동일함을 가지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다.

 

 논리적 그리고 자연적 수반(Logical and natural supervenience)

 

 [p34:5] 우리의 제안을 위한 좀 더 중요한 차이는 논리적 수반과 순전히 자연적 수반(자연법에 맞는, 혹은 경험적인)뿐이다. 만약 B-속성들을 다르게 반영하는 동일한 A-속성들을 반영하는 두 논리적으로 가능한 상황들이 없다면, B-속성들은 A-속성들 위에 논리적으로 수반한다. 가설적으로, 하느님의 힘에 의해서 논리적으로 창조된 세계를 생각해보는 것은 유용하다. 하나님은 “male vixens(악처의 남성)”을 만들 것이 아니라, “flying telephones(나르는 전화기)”의 세계를 만든 것이다. male vixens은 개념 모순적이다. 그래서 male vixens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나르는 전화기의 개념적인 정합적이다. 그래서 나르는 전화기는 논리적으로 가능하다.

 [p35:2] 논리적 수반은 기호 논리학의 어떤 체계안에서 연역가능성으로 정의되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은 강조되어졌었다. 오히려 논리학의 어떤 체계안에서도 연역적으로 정의될 수 없다. 논리적으로 수반되는 것은 논리적으로 가능한 세계(개별적으로)에 의해서 정의되었다. 논리적으로 수반되는 세계의 개념은 다른 형식으로 고려될 수 있는 개념이다. 이러한 가능성의 종류는 형식적인 체계들에 의존하는 가능성의 “엄격한 논리”에 반대하는 것으로써 철학적 논문안에서 가능성의 “광범위한 논리”라고 종종 불려져왔다.  

 [p35:3] 전체적인 체계, 생물학적 속성들은 물리적인 속성들에 논리적으로 수반한다. 그것은 독립적으로 다양한 생물학적 사실들을 위한 단순한 논리적인 공간이 아니다. 우리가 세계에(시간과 공간을 넘어선 지난 미립자의 분배에 관한 사실들을 포함하는) 관한 모든 물리적 사실들을 고정할 때, 우리는 세계(물리적으로 상호작용하고, 운동하고 기능적으로 작동하는) 안에서 모든 대상들을 가시적인 형태로 역시 고정된 결과일 것이다. 만약 이 세계 안에서 캉가루가 산다면, 물리적으로 동일한 어떤 세계에서 물리적으로 동일한 캉가루를 포함할 것이다, 그리고 캉가루는 자동적으로 살아 있을 것이다.

 [p35:4] 우리는 초존재(superbeing)의 가정을 상상할 수 있다. 세계 안에서 모든 미립자들의 위치를 아는 Laplace의 악마는 모든 생물학적 사실(모든 미시물리학의 사실들이 주어진 것으로)들을 직설적으로 “해독(Read off)"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는 미시물리적 사실들로을 토대로 시공간을 통한 세계의 미시적 구조와 동력학의 모델을 구상하고, 거기서부터 거시적 구조와 동력학을 연역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모든 정보들이 주어진다면, 그것은 어떤 체계들이 살아있고 어떤 체계들이 동일한 종에 속하고, 등등의 것들을 결정하는데 필요한 모든 정보를 가진 것이다. 그것은 생물학의 개념들과 미시물리적 사실들의 명세(미시물리학의 완벽한 명세표)를 갖고 있는 한, 그 이상의 다른 정보는 불필요하다.

 [p36:1] 일반적으로, B-속성들이 논리적으로 A-속성들 위에 수반할 때, 우리는 A-사실들은 B-사실들을 포함(entail)한다고 말할 수 있다. A가 성립하면서 B는 성립하지 않는 것이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면 A는 B를 entail한다. 이런 경우에 라플라스의 악마는 A사실들의 명세표만 보고 B-사실들을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물론, 그가 문제의 B-개념을 갖고 있다면) 어떤 점에서 논리적 수반이 성립할 때에 B-사실들이 이러저러하다는 것은 곧 A-사실들이 이러저러하다는 것 이상이 아니다.

 [p36:2] 논리적 수반없이 수반은 가능하다. 두 속성 집합이 자연 세계에서 체계적으로 그리고 완벽하게 상관되어 있을 때에 좀 더 약한 수분이 성립한다. 예를들어, 1몰의 기체가 갖는 압력은 pV=KT라는 법칙에 따라서 기체의 온도와 부피에 체계적으로 의존한다. (K은 불변이다.) 동일한 온도와 부피를 갖는 두 개의 1몰 기체가 상이한 압력을 갖는 것은 경험적으로 불가능하다. 따라서 1몰의 기체의 압력은 그 기체의 온도와 부피에 수반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수반은 논리적 수반보다 약하다. 예컨데, K의 값이 더 크거나 작은 세계에서라면, 주어진 온도와 부피의 1몰 기체가 다른 압력을 갖는 것은 논리적으로 가능하다. 이러한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은 자연에 관한 사실일 뿐이다.

 [p36:3]이것이 자연적 수반의 예이다. 이 경우에 기체의 압력은 그것의 온도와 부피의 1몰임이라는 속성에 자연적으로 수반한다. 일반적으로, 동일한 A-속성을 갖는 어떤 두 자연적으로 가능한 상황도 동일한 B-속성을 가지면 B-속성은 A-속성에 자연적으로 수반한다.

 [p36:5] 자연적 가능성은 실제 우리가 경험가능한 것을 반영한다. 만약 조건들이 올바르다면, 자연적으로 가능한 상황은 실제 세계에서 일어 날 수 있다. 그러한 것은 실제적 상황들을 포함하는 것이 아니라, 꾸며낸 상황들이다. 만약 경계적인(boundary) 조건들이 다르다면, 꾸며낸 상황들은 세계의 역사안에서 일어 날 수 있거나, 혹은 미래에 일어날 수 있다. 예를들어, 비록 실제 세계에서는 건설되지 않았더라도. 몇 마일의 고층 빌등은 대부분이 정확히 자연적으로 가능하다. 심지어 원숭이는 햄릿과 같은 형태라는 것은 자연적으로 가능하다. 우리는 세계의 자연의 법칙들로 구성된 어떤 것으로, 자연적으로 가능한 상황을 상상할 수 있다. 이러한 것의 이유로는, 자연적 가능성은 때때로 nomic(자연법에 맞는) 혹은 nomological한 가능성이라고 불려져왔다.(Greece nomos(법칙)이라는 용어로부터)

 [p37:2] 논리적으로 가능한 상황들의 거대한 구성은 자연적으로 가능하지 않다. 예를들어, 중력이 없이 우주, 혹은 기초적인 불변의 다른 가치들과, 과학적 허구는 이러한 종류의 많은 상황들을 제공한다. 그러한 것들로써, 무중력적 장치들 그리고 영구적인 운동의 기계들, 그러한 것을 상상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정확히 이것들은 대부분이 우리 세계안에서 존재하는 것일 수 없다.

 [p37:3] 우리의 논의를 반대의 방향으로 돌려서, 어떤 상황에서 자연적으로 가능한 것은 논리적으로 가능하다. 그러므로 자연적 가능성의 분류는 논리적 가능성들 분류의 부분집합이다. 이러한 부분을 좀 더 고찰해보면, 금의 3차원적 거리와 그리고 우라늄 235번의 3차원적 거리는 논리적으로 가능해 보인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한에서, 오직 첫 번째는 논리적으로 가능하다. 우라늄의 235번의 3차원의 거리는 우리 세계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p37:4] 모든 자연적으로 가능한 상황들 사이에서 자연적 수반은 유지될 수 있다. A-사실들에 관한 상황은 자연적으로 B-사실들의 필연성일 때, A-속성들과 유사한 분배를 가지는 것으로 B-속성들과 유사한 분배를 가진다. 우리 세계안에서 A-속성들의 유사한 집합이 있을 때, 항상 B-속성들에 의해서 동반되어진다. 그리고 이것은 상호관계할 때 단지 동시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법칙적인 것이다. 동시발생은 모든 논리적으로 가능한 상황을 유지하는 것을 필요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모든 자연적으로 가능한 상황을 유지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p37:5] 논리적 수반은 자연적 수반을 함축함이 분명하다. 만약 어떤 두 가지 논리적으로 가능한 상황들로 유사한 A-속성들은 유사한 B-속성들을 가진다면, 어떤 두 가지 자연적으로 가능한 상황들 또한 역시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기체 분자의 법칙에서 설명되어진 것으로써, 그 역은 유지되지 않는다. 기체 분자의 온도와 부피는 논리적으로 가능한 상황들이 아니라, 자연적으로 압력을 걸쳐 결정된다. 그래서 압력은 온도와 부피에서 논리적인 것이  아니라, 자연적으로 달려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논리적 수반이 없이 자연적 수반만을 가진다. 나는 우리가 순수히 자연적 수반을 가진다는 것을 말할 것이다.

 [p37:6] 그러한 이유는 분명히 할 수 있다. 그것은 논리적 수반들 없이 물리적 속성들의 종합을 자연적 수반의 사례들에서 찾기는 어렵다. 그러나 의식 그 자체는 유용한 설명력을 제공한다. 의식은 물리적 속성들 위에서 매우 자연적으로 수반되는 것처럼 보인다. 논리적 혹은 전체적, 자연적 세계안에서, 어떤 두 가지 물리적으로 동일한 창조물은 의식적 경험의 동일한 것을 가진다는 것이다. 의식은 물리적 속성들에 논리적을 수반된다는 것은 전혀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물리적으로 동일한 창조물은 의식적 창조물을 전혀 의식적 경험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가능해 보인다. 만약 이것이 그러하다면, 의식적 경험은 물리적 기반위에서 논리적으로 수반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으로 수반하는 것이다. 물리적 구조물과 경험 사이의 필연적 연결은 오직 자연적 법칙에 의해서 보장되어지는 것이지, 어떤 논리적 혹은 개념적에 의한 것은 아니다.

 [p38:2] 논리적 수반과 자연 수반의 구별은 중요하다. 이 차이를 이렇게 이해할 수 도있다. B-속성들이 A-속성들에 논리적으로 수반하면, 일단 신이 A-사실들을 가진 세계를 만들면 B-사실들은 자동적인 귀결고 공짜로 따라나온다. 만일 B-속성들이 A-속성들이 A-속성들에 단지 자연적으로만 수반한다면 A-사실들을 만든 후에 신은 B-사실들이 있도록 하기 위해서 일을 더 해야 한다. 즉 A-사실들과 B-사실들을 연결하는 법칙들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p38:3] 이것은 때때로 형이상학적 수반이라는 말을 듣는다. 형이상학적 수반은 논리적/자연적 필연성도 아니라는 것을 기초하고 있다. 그러나 간혹 알려져 있는 “necessity tout court" 혹은 ”형이상학적 필연성“(크립키의 ”a posteriori"한 필연성의 논의로부터 영감을 그려본다.)위에 기초하고 있다. 나는 뒤에서 형이상학적으로 가능한 세계는 단지 논리적 가능한 세계들이라는 것에 관하여 논의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형이상학적 수반 개념의 가정은 우리에게 이롭지 않다, 논리적 그리고 자연적 수반의 위에서 개념의 유사함을 말할 것이다. ”약(weak)" 수반의 개념은 역시 때대로 언급하겠다. 그러나 약수반의 개념은 속성들 사이의 의존적 관계에 흥미로운 표현으로 약해 보인다.

 [p38:4] 논리적/자연적 구분과 총체적/국소적 구분은 각각의 다른 부분들을 걸쳐서 나눌 수 있다. 그것은 총체적인 논리적 수반과 그리고 국소적 수반을 말하는데 합리적이다. 비록 나는 더 종종 그 전자에 관해서 염려할 것이다. 내가 수정 없이 논리적 수반을 말할 때, 총체적 국소적 수반을 의도하지 않고 언급할 것이다. 그것은 역시 총체적 그리고 국소적 수반의 정합성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자연적 수반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국소적, 혹은 적어도 국소적으로 가능한 것을 염려하는 것이다. 단순한 예로, 자연적 수반의 증거는 속성들의 집단 사이에 국소적으로 규칙적인 것 안에서 일반적으로 주장되는 정합의(coherent)원리이다.

 

논리적 수반의 문제(A Problem with logical supervience)

 

 [p39:1] 논리적 수반 개념의 전문적 문제는 자세하게 다루어야 함을 필요로 한다. 그 문제는 물리적으로 동일한 세계의 논리적 수반의 가능성으로부터 일어난 것이다. 그러나 부가적인 비물리학적 재료는 우리 자신의 세계안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예를들어 천사, 그리고 영혼을 생각해보자. 만약 천사들이 복제(Reproduction)되고, 진화되어졌다면, 천사들은 그들 자신의 생물학적 속성들을 가질 것이다. 아마도 천사는 믿음의 모든 종류들을 가질 것이고, 그것의 집단들은 사회적 구조의 복합성을 가질 것이다.

 [p39:2] 그러한 예들로써 문제의 위치는 분명하다. 천사의 세계는 우리가 떠올릴 수 있는 것으로써 물리적으로 동일하다. 그러나 그것은 생물학적으로 뚜렷히 구별된다. 만약 천사의 세계는 논리적으로 가능하다면, 우리의 생물학적 속성들의 정의를 따라서 물리적 속성들 위에 수반되지 않는다. 그러나 비록 적어도 이것안에서 세계는 천사 세계가 아니라 할지라도, 우리는 정확히 생물학적 속성들은 물리적 속성들에 수반한다고 말하기를 원한다. 천사 세계는 우리 자신의 세계안에서 물리적 속성들에 의해서 생물학적 속성들로 결정된 방법안에 서 있는 단순히 논리적 가능성을 위해 불만족 스러워 보인다.  

 [p39:3] 문제의 이러한 종류는 논리적 가능성과 필연성은 수반 관계들 안에서 가능성과 필연성의 연관적 종류들을 강하게 보존하는 것을 제안하는 것으로부터 야기되었다.(Haugelanf 1982, petrie 1987) 그리고 자연적 가능성의 그러한 것으로 약함 다양함과 필연성은 대신해서 쓰여지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논리적 그리고 자연적 수반 사이의 유용한 구분을 그려나가는데, 유용하지 않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세계에 관하여 생물학적 사실들안에서 매우 실제적인 면은 물리적 사실들에 의해서 논리적으로 결정되어졌다. 이하의 사실들이 무시되어왔다. 다른 것들은(Teller 1989) 여분의 비물리적인 재료는 논리적 혹은 형이상학적 가능성의 세계를 약정들로 묶여질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논리적 그리고 형이상학적 가능성을 만드는 것은 매우 변덕스러워 보인다. 그것은 논리적 수반 개념의 유용하게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은 우리가 적절한 개념의 정의를 고정할 수 있는 한, 세계들의 가능성과 함께 모순없이 양립 할 수 있는 것을 밝혀내는 것이다.

 [p39:4] 이 문제의 해결의 핵심은 우리 세계에 관한 문제안으로 수반을 돌리는 것이다.(혹은 더 일반적으로, 개별적인 세계들에 관하여) 이것은 생물학적 사실들은 우리세계의 물리적 사실들에 의해서 논리적으로 결정된다는 것과 일치하는 것이다. 기괴한 세계의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그렇게 결정되지 않는다. 계정된 정의를 따르자면, 만약 우리 세계안에서 B-속성들은 이러한 점들을 따라 A-속성들에 의해서 논리적으로 결정된다면, B-속성들은 A-속성들위에서 논리적으로 수반된다. 어떤 가능한 세계는 A-사실들과 유사하다. 유사한 B-사실들도 유지될 수 있다. 가능한 세계의 존재함은 여분의 B-사실은 이처럼 우리 세계안에서 논리적 수반에 반하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우리 세계안에서 B-사실들은 사실인 한에서 우리 세계는 모든 물리적으로 동일한 세계안에서 진실인 것이다.

 [p40:1] 우리 세계에 관한 생물학적 사실들의 정확한 종류는 천사 세계안에서 유지될 수 없다. 예를들어서, 우리 세계는 외원형질의 생명체는 없다라는 사실과, 모든 생물체들은 DNA에 기초해있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천사 세계는 물리적 과정들위에서 의존적으로 외형질의 인과율에 기초한 것이다. 그래서 웸벳은 비물리적 수준 위에서 교배는 때때로 비물리적 정도에서 외형질의 자손을 불러일으킨다. 만약 그렇다면 웸벳은 정확히 어떤 점에서 우리 세계안에서 자손일 수 없는 것이다. 후손들의 속성은 우리의 정의를 따라서 수반되지 않는고, 생명체로써 세계-체계의 속성이건 아니건 외형질의 생명체를 가지지 않는다.

 [p40:2] 이 문제를 분석해보면, 그러한 사실들은 부정적인 존재의 주장들을 함축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 세계의 무엇이 존재하는 것 뿐만 아니라, 무엇이 없다는 것도 우리는 국소적인(localizable) 사실들의 어떤 종류에 의해서 결정된 그러한 사실들을 예측할 수 없다. 그들은 세계안에서 지역적으로 진행되는 것으로 아니라, 세계의 경계선위에서 의존하는 것이다. 그러한 수반은 긍정적인 사실들과 속성들로 적용될 수 있다. 우리는 W-사실안에서 긍정적으로 정의내릴 수 있다. 그러한 것으로써 모든 세계는 적절한 부분으로써 W-을 얻을 수 있다. 긍정적인 속성은 만약 W-세계안에서 불변적이라면, 적당한 부분으로써 W-을 얻을 수 있는 모든 세계 안에세 개별적인 대응에 의해서 역시 불변할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실들과 속성들은 명확(실증적이다)하다

 [p40:3] 차후에, 나는 수반의 관계들은 우리가 정확한 사실들과 속성들에 엄격해짐으로써 이해할 수 있는 것에 관심을 가질 것이다. 생물학적 속성들은 물리학적 속성들에 수반한다는 것을 주장할 때, 그것은 정확한 생물학적 속성들은 문제화 될 것이다. 모든 속성들은 정확한 것으로 우리는 관심을 가질 것이다. 예를들어, 국소적, 물리적 그리고 현상적 속성들은 많이 한정된 것은 아니다.

 [p40:4] B-속성들이 A-속성들에 총체적 논리적으로 수반한다는 것의 정의는 이러한 것이다. 어떤 논리적으로 가능한 세계 W-은 우리 세계로부터 식별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세계의 B-사실의 진위는 W-의 진위이다. 우리는 정확한 구절안에서 세우는 것이 아니라, B-사실들과 속성들은 정확히 사실들과 속성들의 관계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유사하게 B-속성들은 지역적이고 논리적으로 A-속성들에 수반하는 것이다. 그것이 언제나면, 모든 현실적 개별 X와 모든 논리적으로 가능한 Y일 때, 만약 Y가 X로부터 구별할 수 없는 것이라면, B속성들은 X에 의해서 불변하는 것은 Y에 의해서 불변하는 것이다. 더 간략하게 그리고 더 일반적으로 말하면, B-속성들은 A-속성들에게 논리적으로 수반한다. 만약 실제 상활들에 관한 B-사실들은 A-사실들에 의해서 포함된다. 여기서 상황들은 세계로써 이해된다. 그리고 전체적 그리고 지역적인 것안에서 개별적으로 제각각의 사례들이다. 이 정의는 논리적으로 필연적인 핵심에서 얻어지는 동안 수반을 우리 세계에 관한 일반적인 정의라는 주장의 생각을 포착하는 것이다.

 

수반과 물질주의(Supervenience and materialism)

 

 [p41:2] 논리적 그리고 자연적 수반은 존재론적으로 매우 다른 가지를 가진다. 즉 문제는 세계이다. 만약 B-속성들은 A-속성들 위에 논리적으로 수반한다면, A-사실들은 주어져 있는 점에서, B-사실들은 매우 중요하다. 신이 우리 세계안에서 모든 물리적 사실들을 만들었다면, 생물학적 사실들은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이다. B-사실들은 단순히 재기술하는 것은 A-사실들에 의해서 기술된다. 그것들은 매우 다른 사실들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더 이상의 사실들은 아니다.  

 [p41:3] 단순히 자연적 수반과, 존재론은 그렇게 똑바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연속적/법칙적인 연관들은 세계의 형태들과 뚜렷히 연관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B-속성들은 단순히 자연적으로 우리 세계안에서 A-속성들에 수반한다. 그러면 A-사실들은 B-사실들이 없이 유지될 수 있다. 그것은 세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앞에서 본 것으로써, 신은 B-사실들을 고정하기 위해서, 모든 A-사실들을 고정한다. 그는 더 그렇게 할 것이다. B-사실들은 어떤 것을 넘어서 있고, A-사실들을 넘어서 있고, 그것의 만족은 세계안에서 어떤 새로운 사물을 함축하고 있다.

 [p41:4] 이것으로써 마음에 관하여, 우리는 물리주의의 이론을 광범위하게 받아들일 수 있음을 정확히 공식화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세계안에서 모든 것은 물리적이라는 것이 받아들여진 것이며, 혹은 그것은 그 물리주의를 넘어서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며, 혹은 정확히 어떤 점에서 물리학의 사실들은 세계에 관한 모든 사실들을 철저히 규명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언어안에서, 만약 모든 정확한 세계에 관한 사실들은 물리적 사실들위에 전체적 논리적으로 수반한다면, 물질주의(materialism)는 진리이다. 만약 물질주의가 사실이라면, 물리주의는 일단 신이 모든 사실들은 고정되어져 있는 세계에 관해서 물리적으로 고정했다는 직접적인 개념을 이해하는 것이다.

 [p42:1] 이러한 정의를 따른다면, 만약 모든 우리 세계에 관한 정확한 사실들은 물리적 사실들에 의해서 포함되어진다면, 물질주의는 사실이다. 만약 어떤 논리적으로 가능한 세계 W-은 우리 세계로부터 물리적으로 식별할 수 없다면, 우리 세계의 모든 정확한 사실들은 W-의 진리라면, 물질주의는 진리이다. 이것은 어떤 세계는 부분으로써(적절하든 혹은 적절하지 않든) 우리 세계의 복제를 포함하는 우리 세계로부터 물리적으로 식별할 수 없다는 논제안에서 동일하다. 이것은 직관적으로 올바른 정의인 것처럼 보인다. (물리주의에 대한 이러한 정의는 맞춤은 Jackson에 의해서 주어진 것이다, 잭슨은 판단/비판의 기준은 우리 세계의 모든 최소미립자의 물리적 중복은 우리 세계의 단순성의 중복이다.)

 

2. 환원론적 설명(Reductive Explation)

 

 [p42:3] 지난 몇 세기동안의 과학의 진보안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세계에 관해 미스테리한 부분들에 대해서 합리적인 믿음의 근거를 제시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자연적 현상은 극히 미세한 물리적 체계를 넘어선 것이다. 그것은 원칙적으로 환원적 설명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단순한 부분에서 전체적인 설명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통하여 우리는 하위 체계의 과정들의 적절한 설명력을 제시할때, 상위 체계인 현상적 설명은 판명될 것이라고 믿는다.  

 [p42:4] 생물학적 현상은 설명적 분명함을 제공한다. 복제(Reproduction)은 유전학 그리고 세포 메커니즘에 의해서 설명되어진다. 적응은 외적 기능으로 환경적 조건에 반응하는 것으로써, 메커니즘에 의해서 설명되어진다. 생명체 그 자체는 다양한 적응, 복제, 그리고 다른 그러한 것들인, 메커니즘의 설명에 의해서 설명되어진다. 일단 우리는 충분히 자세하게 하위 체계들에 관해서 말할 수 있다. 근본적인 미스테리의 어떤 점도 풀어나갈 수 있다. 그러나 현상은 어떤 설명으로도 설명되어질 수 없다.

 [p42:5] 물리학 안에서 우리는 에너지와 촉발, 분자에 관한 적절한 이야기를 말함으로써 열에 대한 설명력을 가질 수 있다. 천문학 안에서 우리는 천구의 개념과 지질학적 반영으로 자세한 설명력을 통해서 달의 구절을 설명할 수 있다. 지질학 안에서 지진은 지하의 masses의 상호작용에 의한 것들로 설명되어질 수 있다. 인지과학안에서 현상적 의식의 설명에 대해서, 우리는 다양한 기능론적 설명을 가질 수 있는 것처럼 배운다. 기능론적 메커니즘은 환경적 자극과 반응안에서 행동의 적절한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다. 기능론적 설명은 매우 복잡한 것들을 풀어놓은 것처럼 보이지만, 대부분의 자세한 설명은 우리의 이해를 교묘하게 회피하고 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하위-체계의 과정에 관하여 충분히 발견할 수 있다면, 결국 상위-체계 또한 함께 발견 할 수 있는 것이다.

 [p43:2] 나는 후반부까지 환원적 설명의 개념이 정확한 정의가 아니라는 것을 주장할 것이다. 오히려 나는 환원적 설명은 잘못되었다는 것에 관하여 어떤 경고를 문제화 할 수 있다  현상적의 환원적 설명은 현상적의 환원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어떤 점에서, 애매모호한 용어이다. 정확히 이런 점안에서 현상적은 물리적 구조물-(예를들어,학습)들과 다르다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어떤 특정 하위 체계의 현상적과 학습을 동일시 할 수 없다라는 것을 통해서 환원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다수 실현가능성의 환원적 설명의 방식에 서있는 것이 아니다. 현상적에 대한 환원적 설명은 상위-체계의 이론들로 환원 될 수 없다. 때때로 현상적의 환원적 설명은 선-존재한 상위 체계의 이론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시간에는 그것은 잘못된 방향에 의해서 그러한 이론들은 보여줄 것이다. 종종 그것은 상위-체계들로 환원 되지 않을 것이다.

 [p43:3] 환원적 설명은 설명의 종국(end-all)과 중심(be-all)이 아니다. 그것은 설명의 다른 많은 종류들이다. 그것은 어떤 주어진 예들안에서 환원적 설명보다 현상적인 것을 명백히 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그것은 역사적 설명이다. 생명체의 현상적 기원의 설명으로 환원적 설명은 어떤 생명체의 체계적인 기능들의 공시적인 설명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것은 역시 상위-체계의 설명들의 종류이다. 믿음. 그리고 욕망의 그러한 용어안에서 행위의 측면들은 환원적 설명을 제공한다. 심지어 이러한 행동은 원칙적으로 환원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 상위-체계의 설명은 종종 더 이해적이고 조명적이다. 환원적 설명은 그러한 다른 종류의 설명을 드러내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아니다.

 

기능론적 분석에 의한 환원론적 설명(Reductive explation via functional analysis)

 

 [p43:4] 복제으로써(학습, 그리고 열) 그러한 다른 종류의 현상은 환원적을 설명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이 모든 사례들 안에서 개념의 본성은 현상적은 중요한 것임을 특징한다는 것을 필요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현상적의 환원적 설명의 함축이건 명백함이든의 물음안에서 현상적 분석의 어떤 거친 그리고 준비된 분석을 동반한다. 복제의 개념은 방법의 정확한 종류안에서 체계는 다른 체계들으로 생산된다는 가능성으로 거칠게 분석될 수 있다. 우리는 복제의 구조물은 다른 구조물을 생산한다는 과정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을 따르는 것이다.

 [p44:2] 그 점은 매우 사소로워 보인다. 그러나 분석의 이런 종류의 가능성은 일반적으로 환원적 설명의 가능성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한 분석 없이, 그것은 현상적 물음안에서 물리적 사실들의 하위-체계로부터 설명적 교량은 없는 것이다. 그러한 분석은 우리는 어떻게 정확히 하의-체계들이 물리적 메커니즘을 따르는 그 분석들로 만족되어졌고, 설명은 결과적이였다는 것을 보여질 수 있는가를 하는 것이다.

 [p44:3] 현상적 관심의 대부분은 설명을 요구하는 것이다. 복제 그리고 학습, 관련적 개념들은 일반적으로 기능적인 분석이다. 그러한 개념의 핵심은 어떤 기능과 기능의 수행의 용어안에서 특징되었다, 혹은 가능성의 용어안에서 그러한 기능들은 수행할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어떻게 그러한 기능들을 수행되어진가를 따르는 것이며, 어떻게 우리는 현상적 질문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일단 우리가 어떻게 다른 구조들이 생산의 기능을 수행하는 가를 설명할 수 있다면, 우리는 복제를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기능의 수행으로 복제를 의미하는 것이다. 유사한 방식은 학습의 설명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학습으로 구조짓는 것을 의미한다. 다소 거칠게 말하면, 환경적 자극의 반응안에서 적절하게 적용될 수 있는 행위의 가능성이다. 만약 우리가 어떻게 구체적으로 관련된 기능들의 수행이 가능하다면, 우리는 학습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44:5] 기능론적인 수행의 설명은 매우 직접적이다. 기능들의 결과는 물리적인 특징들이다. 모든 물리적 사건들이 물리적 원인을 가진다면, 어떤 기능적인 수행은 물리적인 설명력을 가진다. 심적 상태의 어떠한 정확한 종류를 보여주는 것을 필요로 하는 것은 자연법칙을 따른 적절하게 관련된 인과적 과정들에 의해서 발생한 심적 상태들을 반영하는 것이다. 물론 물리적 설명의 세부사항들은 사소하지 않다. 그러나 일단 하위-체계의 물리적 인과율에 관하여 어떻게 기능론적으로 작용하는지를 설명할 수 있다면, 현상적인 것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p45:1] 심지어 열 같은 물리적 개념도 기능적으로 건설되었다. 열은 불에 의해서 금속이 확장된 것이다. 일단 우리가 다양한 인과적 관계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에 대해서 만족한 답을 얻게된다면, 우리는 열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열은 전형적인 인과에 의해서 특징지어진 인과적 역할의 개념이다. 일단 경험적 조사들은 어떻게 관련된 인과적 역할을 수행하는지를 보여줄 것이고, 현상적인 것은 설명될 것이다.

 [45:2] 어떤 전문적인 문제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꼭 필요하지는 않다. 크립키(1980)는 “열”로서의 용어와 인과적 역할들로 관련된 기술로서 양자를 구분하여 지적하였다.

 [45:3] 두 번째로 작은 문제는 다양한 인과 역할의 개념들은 정확이 인과적 역할을 담당하는 것과 그 역할을 정확히 수행하는 심적 상태들간의 애매모한 점이다.

 [45:4] 세 번째의 문제는 다양한 인과적 역할의 개념들은 경험에 의해서 부분적으로 특징화된다.

 

인지과학안에서의 환원론적 설명(Reductive explation in cognitive science)

 

 [p46:2] 환원적 설명의 패러다임은 대부분의 인지과학의 분야안에서 기능론적 작업들의 분석을 경유하는 것이다. 우리는 앞장에서 대부분의 비현상적(nonphenomenal) 심적 개념은 기능적으로 분석될 수 있는 것을 살펴보았다. 심리학적 상태들은 그것들의 역할의 인과적인 용어안에서 특징화되었다. 그러한 상태들의 설명은 어떻게 우리의 인과률이 적절하게 수행되는가를 설명하였다.

 [p46:3] 어떤이는 신경생리학을 강조하면 의식에 관한 설명을 제시 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만약 우리가 정확히 어떻게 신경심리학적 상태들은 기능론적인 물음안에서 수행되는 반응이라는 것을 설명할 수 있다면, 우리는 심리학적 상태들을 설명할 수 있다. 우리는 자주 어떤 심적 측면들은 그것의 관계적인 매커니즘의 기능들에 의해서 세부적인 인과적인 설명들을 제시할 수 있다. 물리/화학적 기질의 구조적 인과률은 충분하다.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는 어떻게 심리학적 측면들의 설명이 주어질 수 있는가의 가능성을 줄 수 있다.

 [p46:4] 학습의 가능성으로써 설명은, 우리는 메커니즘의 행위의 가능성 안에서 적절한 변화를 이끄러가는 환경적 자극에 다양하게 반응하는 모델들을 보여준다. 연결주의자들은 모델들을 학습한다. 예를들어 인간 학습을 설명하는 것으로써, 우리는 그러한 인과적 조적들로 기능적으로 반응하는 모델들의 반영을 증명해야만 한다. 두번째 단계로는 일반적으로 어렵다. 우리는 직접적으로 그러한 반응을 보여줄 수 없다. 우리는 신경생리학의 무지에 의해서, 간접적인 증거들을 조사해나간다. 그러한 것으로 반응적 패턴의 질적 유사성을 찾아나간다.

 [p47:1] 불행히도, 기능론적 설명은 심리학적 상태들과 현상적 상태들에 대해서 잘 설명해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실제는 그렇지 못하다. 그러한 이유는 나아가보자.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인간 인지의 기능론적 설명, 질문으로 나아가서, 기능론적인 것 안에서 왜? 의식에 의해서 동반되는가? 심리학적 상태들은 그러한 물음들은 일으키지 않는다. 만약 어떤이가 학습의 기능론적 모델들에 관해서 질문했다면, “ 왜? 학습에 의해서 이것의 기능주의가 동반되는가?” 이것의 적절한 답은 의미론적 답이다. “왜냐하면 학습은 배움으로써는 이것 같은 기능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의식의 개념에 대응하는 분석이 아니다. 현상적 상태는, 심리학적 상태들과 같지 않다. 그것들의 역할은 인과적인 역활에 의해서 정의되는 것이 아니다. 후에 우리는 주어진 기능의 수행들에 관해 설명할 것이다. 의식의 사실은 여전히 매우 설명될 수 없는 기능의 수행을 동반한다. 그러나 어떤 주어진 인지과학의 설명들도 기능적이지 않다. 그것은 의식의 동반 없이 불변하게 설명될 수 있는 논리적으로 수반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의식은 자연적으로 가능하다. 우리 실제 세계안에서 기능적인 것들로부터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개념은 중요하다는 것은 논리적 정합성이다.

 [p47:3] 만약 이것이 논리적으로 가능하다면, 심적 현상의 어떤 물리적 설명은 기능론적이든 사실적이든 근본적으로 불완전하다. 레빈(Levine, 1983)의 설명을 들자면, 그러한 설명들과 의식 그 자체 사이의 설명적 gap이 있다. 심지어 조직적 기능론이 적합하다면 항상 실제적인 의식의 문제들을 일으킬 것이다. 왜? 라는 물음안에서 여전히 의식은 대답될 수 없는 문제들을 발생시킨다. 이것의 요점은 후에 좀더 확장해서 설명해 보겠다. 만약 이것이 그렇다면, 그것은 현상적 요소들로 기초지어진 심적 개념의 설명적 간극을 따르는 것이다. 만약 의식적 경험은 학습 혹은 믿음은 필수적이다. 예를들어서, 우리는 믿음과 학습의 온전한 환원적 설명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심적 특성들의 심리학적 측면들을 믿음을 합리적으로 가지는 것이다. 그것은 관계된 개념들의 핵심적인 논쟁들이다. 원칙적으로 환원적 설명은 받아들여질 여지가 있는 것이다. 만약 우리는 현상적 측면들에 관한 걱정들을 남겨둔다면 인지과학은 마음의 설명에 훌륭한 역할을 해낼 수 있는 자료들을 가질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논리적 수반과 환원적 설명

  어떤 자연 현상이 어떤 하위 속성들로 환원적으로 설명되는 것은 전자가 후자에 논리적으로 수반할 때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한 자연 현상을 예화하는 속성들이 어떤 하위 속성들에 총체적/논리적으로 수반하면 그 자연 현상은 그 하위 속성들에 의해서 환원적으로 설명된다. 즉 환원적 설명이 논리적(총체적) 수반을 함축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어떤 현상을 예화하는 속성들이 어떤 하위 속성들에 논리적으로 수반하지 않는다면 이 하위 속성들에 대한 설명이 주어졌을 때 언제나 대답되지 않는 다음과 같은 물음이 물어질 수 있을 것이 있을 수 있다. 이것은 “왜 하위 과정이 그 현상에 의해서 동반되는가이다.?”

 

  논리적 수반이 환원적 설명을 위한 충반 조건인지는 그만큼 분명하지 않다. 한 현상 P가 어떤 하위 속성에 논리적으로 수반한다면 P와 관련된 그 하위 사실이 설명이 주어지면 P의 예화는 하나의 논리적 귀결일 것이다. 그러므로, 하위 사실의 설명은 자동적으로 P의 설명을 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설명은 두 가지 점에서 불만스럽다. 첫째, 하위 사실들이 어떤 설명적 통일성도 없는 임의적인 것처럼 보이는 세세한 사항들의 뒤범벅일 수 있다. 한 학습 기저에 있는 모든 분자 운동에 대한 설명이 이러한 사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둘째로 P의 다른 사례는 아주 상이한 하위 사실들 집합에 의해 동반될 수 있다. 이런 경우에 개별적인 사례의 설명들은 하나의 유형으로 그 현상에 대한 설명을 낳지 않는다.

 

  한 가지 방책은 논리적 수반이 환원적 설명의 충분 조건이 아니라 필요 조건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논리적 수반이 필요충분 조건이 되도록 만드는 환원적 분석의 한 가지 개념이 있다. 위의 반례들이 그 설명들이 설명이 아님을 보여준다고 말하는 대신, 환원적 설명이 반드시 통찰력 있는 설명일 필요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걸로 간주할 수 있다. 앞에서 말했듯이, 환원적 설명이 설명의 전부는 아니다. 그것의 주된 역할을 어떤 상위 현상을 둘러싼 신비감을 제거하는 것이다. 상위 현상의 brutness(어떠한 것에도 물들지 않는 용어, 과학철학의 용어)와 임의성을 하위 과정들의 brutness와 임의성에로 환원함으로써 이 일을 한다. 하위 현상이 brute하고 임의적으로 보이는 한, 환원적 설명은 한 현상에 대한 깊은 이해를 주지 못하겠지만, 적어도 가외의 것이 있다는 느낌을 제거해준다. 그러나 환원적 설명과 통찰을 주는 설명 사이의 간격은 일반적으로 이보다 더 가깝다. 이것은 우리 세계의 물리학에 대한 두 가지 기본적 사실에 기인한다. 자율성과 단순성, 미시물리적인 인과와 설명은, 모든 물리적 사건이 물리적 설명을 가지며, 물리학의 법칙은 물리학의 사건들을 자신의 용어로 설명하기에 충분하다는 점에서, 자율적인 것 같다. 또 문제의 법칙들은 간단해서 문제의 설명들은 어떤 구성력(compactness)를 갖는다. 그러나 실제 세계는 하위 차원의 자율성과 단순성 때문에 복잡한 과정들이 이해될 수 있도록 해준다. 상위 현상의 기저에 하위 사실들은 이해가능한 설명을 허용하는 어떤 기본적인 통일성을 갖는다. 예컨대 방아쇠를 당겨 총을 발사시키는 것 같은 상위 인과 과정이 주어질 때, 우리는 이런 인과 과정을 결정하는 하위 사실들 집합을 분리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사실들을 어떤 단순한 원칙들에 포섭시킴으로써 그 인과 과정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꽤 간단한 스토리를 줄 수 있다. 이런 일이 통하지 않을 수도 있다. 사회학이나 경제학의 영역에도 어떤 현상들은 아위 과정의 단순성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논리적 수반이 성립함에도 불구하고, 어떤 통찰력있는 환원적 설명도 불가능할 수 있다. 이런 경웨 우리는 현상에 대한 상위 설명에 만족해야할 것이다. 

 

  이 설명에서 환원적 설명은 근본적으로 개별적인 것이다. 한 현상의 개별적인 사례를 설명하는 것임에 주목해야 한다. 한 속성이 상이한 많은 방식으로 예화될 수 있으면 모든 사례들을 커버하는 하나의 단일한 설명을 기대할 수 없다. 온도는 상이한 매질에서 상이하게 실현되며 따라서 각각에 대하여 상이한 설명이 있다.그러나 한 개별적 사건에 대한 좋은 설명이 다른 많은 것들의 설명이 된다는 식으로 개별자들의 설명을 가로지르는 어떤 통일성이 있는 경우도 많다. 이것은 설명의 논리적 속성보다는 우리 세계의 기저의 단순성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논리적 수반이 성립하지 않으면, 어떤 종류의 환원적 설명도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 논리적 수반은 상위 현상에 관한 자연의 형이상학적 신비를 제거한다는 것이다.

 

환원적 설명에 대한 부가적 고찰

 

  첫째로, 어떤 현상에 대한 하나의 실제의 환원적 설명은 보통 미시 차원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지 않고, 단지 약간 더 기본적인 차원으로 설명될 뿐이다 이 기본적인 차원의 현상들은 다시 좀 더 기본적인 차원으로 환원적으로 설명되리라고 기대된다. 이렇게 해서 설명의 계열을 물리적인 차원에 도달할 것이다. 어떤 차원에 도달하면 물리학은 brute한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 즉 왜 이 근본 법칙이 성립하지는지에 대한 더 이상의 설명은 없다. 이러한 설명의 단RP는 현재로서는 몽상에 불과하지만 중요한 진전이 있었다. 논리적 수반과 하위 차원의 자율성 및 단순성이 주어지면 이러한 설명적 연결은 원칙적으로 가능해야 한다.

 둘째, 한 현상이 더 하위 차원의 속성으로 환원적 설명이 가능하면서도 물리적 차원으로 환원적 설명은 불가능한 것도 적어도 상상가능하다. 이런 현상은 상대적으로 환원적으로 설명되지만, 이런 현상의 존재는 환원적으로 설명에 일반에 실패함을 함축할 것이다.

 셋째, 국소적 논리적 수반은 환원적 설명을 위해서 지나치게 엄격한 조건이다. 맥락의존적인 속성들이라도 관련된 환경적 관계들이 어떻게 만족되는지 설명함으로서 환원적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한 현상이 총체적으로 수반하기만 하면 어떤 하위 차원의 사실들에 의해서 그것은 환원적으로 설명될 것이다.

 

  생명, 학습, 열 등의 현상에 대한 환원적 설명에는 두 가지 프로젝트가 있다. 첫째는 expliationd - 분석을 통하여 설명될 필요가 있는 게 무엇인지 명료히 한다. 둘째는 설명 - 그 분석이 어떻게 하위 사실들에 의해서 만족되는지 보인다. 첫 번째 것은 개념적인 프로젝트이고, 두 번째 것은 경험적인 프로젝트, 문제에 따라서 전자는 사소한 것일 수도 있고 난해한 것일 수도 있다. 또 이 두 프로젝트는 실제로는 엄격히 구분되지 않고 함께 나아간다.

 

거의 모든 것이 물리적인 것에 논리적으로 수반한다.

 

  다음 장에서 의식 경험은 물리적인 것에 논리적으로 수반하지 않으며, 따라서 의식은 환원적으로 설명되지 않음을 논할 것이다. 이에 대한 흔한 반응 중 하나는 이점에 있어서 의식 경험은 유일한게 아니라는 것이다. 테이블임, 생명, 경제적 번영 등 온갖 논리적 속성들이 마찬가지로 물리적 속성들에 논리적으로 수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말 이런 것들은 미시물리적 사실들에 의해서 논리적으로 entail(수반, 포함)될 수 없는 것인가?

 

  이런 생각은 잘못되었다. 이러한 상위 사실들은 그것이 사실인 한, (총체적으로) 논리적으로 물리적 인 것에 수반한다. 의식 경험은 논리적 수반이 성립하지 않는 거의 유일한 것이다. 의식은 다른 상위 사실들과 질적으로 다르다. 여기서 나는 자연 현상을 이루는 속성들에만 관심을 둘 것이다. 예컨데, 천사는 논리적으로 수반하지 않을 수 있지만, 이것을 믿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고, 따라서 논의외로 할 것이다. 또 수학의 추상적 대상들도 여기서 다루지 않을 것이다.

 

  대개의 상위 속성들이 물리적인 것에 수반한다고 해서 상위의 사실들과 법칙들이 미시물리적 법칙들에 의해서 entail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님에 주의해야할 것이다. 이것은 더 강한 주장으로서 적절하게 제한 조건을 붙이면 그럴법하게 될 수도 있지만, 아직 증거는 없다. 내 주장은 더 약한 것으로서 상위 사실들이 미시물리적 사실들에 의해서 entail된다는 것이다 미시물리적 사실의 엄청나게 거대한 집합은 예컨대 나폴레옹의 모자를 이루던 원자들에서 토성의 외테의 전자장에 이르기까지 시공의 모든 구석에서 모든 최후의 입자들과 장들의 분포에 관한 사실들을 포함할 것이다.

 

  가끔 논리적 수반이 실패하는 이유 몇 가지를 살펴보자, 상위 속성들이 의식에 의존하는 경우이다. 예컨대 의식 경험이 사랑 같은 속성의 부분적인 구성요소일 수 있다. 또 색이나 열 같은 외적인 속성들의 일차적 내포가 현상적 성질에 의존할 수 있다. 이것은 물론 나의 주장에 대한 반례를 주지 않는다.

상위 사실들이 미결정적인 경우들은 논리적 수반에 반례로 칠 수 없다. 나의 주장은 상위 사실들이 확정적인 한 그것들은 물리적인 사실들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이다. 어떤 상위 사실들을 설명하는 똑같이 좋은 두 이론이 있어서, 예컨대 하나의 바이러스가 생명체라고 주장하고 다른 것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한다면 생명에 관한 사실들은 물리적 사실들에 의해서 결정되지 않는 것이다.

 

  논리적 수반의 보편성을 주장하는 나의 논증들은 상상가능성, 인식론적 고찰, 그리고 관련된 개념의 분석에 호소한다.

  상상가능성 : 최상의 사실들의 논리적 수반은 논리적 가능성의 한 검사로서 상상 가느성을 사용하면 쉽게 알 수 있다. 모든 미시물리적 사실에서 우리 세계와 동일하면서 생물학적으로는 구별되는 세계는 어떤 종류의 세계일 수 있겠는가? 예컨데, 우리 세계에서 한 윔뱃이 새끼 두 마리를 가졌다고 하자. 우리 세계에 대한 물리적 사실들은 그 윔뱃과 그 새끼들과 그 환경과 진화적 역사에 상응하는 시공간상의 입자들의 분포에 관한 사실들을 포함할 것이다. 어떤 세계가 우리 세계와 이런 사실들을 공유하지만 그 윔벳은 새끼 두 마리를 갖지 않는 그런 세계라면 그러한 차이는 어디서 나올 수 있는가? 그런 세계는 상상불가능한 것 같다. 어떤 가능세계가 모든 물리적 사실들에서 동일하도록 일단 고정되면 윔뱃과 어미-새끼 관계 등에 관한 사실들은 자동적으로 고정된다. 생물학적 사실들이 물리적 기반 위에서 맘대로 떠다닐 수 있는 그런 것은 아니며, 개념적으로도 그럴 가능성은 없다.

 

  건축, 천문, 행동, 화학, 경제학, 기상학, 사회학 등등에 속하는 사실들에 대헛도 마찬가지이다. 물리적으로 우리 세계와 동일하면서 이런 점에서 상이한 세계는 상상할 수 없다. 물리적 사실들이 고정되고 나면 이런 상위 사실들이 달라지 여지는 없다. 더구나 이런 상상불가능성은 우리의 인지 능력 상의 어떤 우연한 한계에 기인하는 것같지 않다. 이런 세계는 윈칙적으로 상상불가능하다. 신이라해도 이런 세계를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인식론 : 상상가능성 직관을 넘어서 생각해보면, 만일 물리적으로 우리 세계와 동일한데 생물학적으로 상이한 가능세계가 있다면 이것은 근본적인 인식론적 문제를 야기할 것이다. 물리적으로 동일한 세계라면 우리는 그 세계를 우리 세계와 구별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가진 모든 외적 증거들은 우리 세계를 그 세계와 구별해주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그 세계가 아니라 이 세계에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실제로 이런 경우에 생물학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론적 문제가 발생한다. 우리는 우리 세계의 생물학적 사실들을 외적 증거에 기초해서 알게 된다. 여기에 어떤 회의주의적인 문제도 발생하지 않는다. 따라서 생물학적 사실들은 논리적으로 물리적인 사실들에 수반한다. 건축, 경제학 등 다른 상위 사실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것들이 외적인 증거들에 의하여 알려지는 한 그것들은 물리적 사실들에 논리적으로 수반하는 것이다.

인식론적 문제가 있는 영역에서는 논리적 수반이 실패하면, 역으로 논리적 수반이 실패하는 곳에서는 인식론적 문제가 생긴다는 것을 주목하면 이점은 더 분명해진다. 가장 명백한 예로, 의식에  관하여 인식론적 문제, 즉 타자의 마음(other minds)의 문제가 있다. 이 문제는 모든 외적 증거들이 우리 주위의 존재들이 의식을 가졌음을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에 생긴다. 우리는 개의 두뇌를 열어서 거기에 의식 경험이 있는지 들여다볼 수 없다. (질문 : 왜 비슷한 논증을 통해서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의식에 관해서도 알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지 않는가? 답 : 의식 경험은 우리의 인식 세계의 중심에 있기 때문이다.)

  

  또 한가지 유명한 인식론적 문제는 인과성과 관련해서, 흄이 논했듯이 외적인 증거들을 통해서는 사건들 간의 연결의 규칙성이 도달할 수 있을 뿐이다. 외적인 증거들은 인과성에 관한 더 이상의 사실을 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인과성이 규칙성 이상의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지 본명치 않다. 여기서도 회의주의적 의문은 논리적 수반의 살패와 같이 간다. 이 경우에 인과성에 관한 사실들은 개개의 물리적 사실들에 논리적으로 수반하지 안는다.

나는 개개의 물리적 사실들 뿐 아니라, 물리 법칙들까지도 수반의 토대로 포함시킴으로써 인과성의 수반 문제를 비켜갔던 것이다. 이 밖의 인식론적 문제는 데카르트으 외부 세계의 존재 문제, 외부 세계에 대한 사실들은 우리의 경험에 관한 사실들에 논리적으로 수반하지 않는다. 또 과학에서 가정되는 이론적 대상들 문제이다. 이러한 것들의 부재도 우리 주변의 대상들에 대한 우리의 관찰과 양립 가능하다. 이론적 사실들은 관찰적 사실들에 논리적으로 수반하지 않는다. 우리의 모든 의적 증거들은 미시물리적 사실들에 수반한다. 따라서 어떤 현상이 이 사실들에 수반하지 않는 한, 외적 증거들은 그것을 믿을 이유를 주지 못한다. 더 직접적으로 말하면, 모든 물리적 사실들을 파악한 사람이라면(실제로는 그럴 수 없지만) 원칙적으로 상위 개념들만 가지면 모든 상위 사실들 또한 추리할 수 있을 것이다. 비슷한 얘기를 테이블, 생명, 경제적 번영 등, 거의 모든 상위 사실에 대해서 할 수 있다.

 

  분석가능성 : 미시물리적 사실들이 상위 사실들을 고정시킨다는 entailment관계는 개념의 내포에 의존한다. 미시물리적 사실들이 상위 사실들을 entail한다면 그것은 미시물리적 사실들이 상위 내포가 적용될 수 있도록 세계의 특질들을 충분히 고정시키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하나의 entity가 어떤 상위 개념의 내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취하는 것이 무엇인지 분석하되, 적어도 왜 물리적 사실들을 고정함으로써 그런 충족 조건이 충족될 수 있는지 알 수 있을 만큼 분석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상위 개념들의 내포를 좀 더 자시헤 살펴서 그것들이 적용될 수 있도록 만드는 세계의 특징들을 검토해보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내포들을 밝혀서 그것들을 말로 요약해내는 데 몇가지 장애가 있다. 우선 한 개념의 적용 조건들이 불확정적인 경우가 많다. 티슈로 만든 집, 컵 모양의 대상물은 컵인가? 컴퓨터 바이러스는 살아 있는가? 우리의 일상 개념들은 이런 물음에 명쾌한 답을 주지 않는다. 어떤 점에서 이것은 정하기 나름의 문제이다. 그러나 이러한 불확정성은 사실에 있어서의 불확정성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다. “컵”의 내포가 정하기 나름의 문제라면 컵에 관한 사실들도 마찬가지로 정하기 나름의 문제이다.

개념들은 보통 간명하게 정의되지 않는다. 정의에 여러 조건과 단서를 붙여서 세련되기 다음으면 바로 불확정성 문제에 부딪힌다. 어떤 경우에도 만족스러운 정의를 얻을 수 없다. 그러나 모든 구체적인 경우들을 다룰 수 있는 완벽하게 세세한 정의를 가질 필요는 업다. 내포가 어떤 종류의 속성 때문에 적용되는지 알면 충분하다.

A-사실들이 B-사실들을 entail하기 위해서, B-속성들을 A-속성들로 정의할 필요는 없다. 의미는 근본적으로 정의가 아니라 내포에 담기는 것이고 분석의 역할은 내포를 충분히 명료하게 드러내어서 그 entail관계를 분명히 드러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