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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my way/마음

역경(逆境)과 순경(順境) - 만해 한용운

현대불교수필(現代佛敎隨筆): 역경(逆境)과 순경(順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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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이라는 것은 자기의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을 이름이요, 순경이라는 것은 마음대로 되는 것을 말함이니, 사람들은 역경에서 울고 순경에서 웃는 것이거니와, 역경과 순경에 일정한 표준이 있는 것은 아니다. 갑(甲)에게 역경인 것이 을(乙)에는 순경이 되는 수가 있으니, 동일한 동풍이지마는 서항(西航)에는 순경이 되고 동항(東航)에는 역경이 되는 것이요, 동일한 춘우(春雨)이면서 농부에게는 순경이지마는 여행자에게는 역경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동항하는 자가 동풍의 순경을 따라서 도로 서항할 수는 없는 일이요, 여행하는 자가 춘우(春雨)를 따라서 경농(耕農)에 종사할 수는 없는 일이니, 그것은 전진의 목적이 다른 까닭이다. 사람은 부평(浮萍)이 아니어서 바람 부는 대로 물결 치는 대로 순경만을 좇아서 사는 것은 아니다.사람은 인생관을 따라서, 취미를 따라서 하루의 진로, 혹은 백년의 목적이 있으니, 그 목적을 향하여 전진할 뿐이다.

전경(前境)의 순․역(順逆)은 목적의 방향과는 무관(無關)이다.목적을 위하여 정당하게 전진하는 불굴불요(不屈不撓)의 인물은 순경을 만난다고 경희작약(驚喜雀躍) 하여서 분외(分外)의 속력을 가하는 것도 아니지만은, 역경을 만난다고 공축퇴굴(恐縮退屈)하여서 방향을 고치는 것도 아니다.그뿐 아니라 사람은 진로에만 역경이 있는 것이 아니라 퇴로에도 역경이 있으니, 가다가 돌아서고 보면 퇴로가 다시 진로가 되는 까닭이다.

역경을 피하는 사람으로서 진로에서 역경을 피하여 돌아섰다가, 퇴로에서 역경을 만나면 그때에는 어디로 갈 것인가. 천상(天上)에는 운무뇌정(雲霧雷霆) 등의 역경이 있고, 지하에도 암석층(岩石層), 화산맥(火山脈) 등의 역경이 있으니, 과연 어디로 갈 것인가.

그뿐 아니라 역경을 피하고 순경만을 따라서 잠진속퇴(暫鎭速退)하는 무주견(無主見)의 무리에게, 역경만 역경이 아니라 소위 순경도 아연(俄然) 역경으로 변하니, 그러한 무리는 영(影)을 독사(毒死)로도 보고, 죽실(竹實)을 부서(腐鼠)와 바꾸자 하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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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마땅히 역경을 정복하고 순경으로 장엄(莊嚴)할 것이다. 사람은 어별(魚鼈)이 아니나 잠항정(潛航艇)으로 해저(海底)를 정복하고, 사람은 우익(羽翼)이 없으나 비행기로 천공을 정복하니, 용자(勇者)와 지자(智者)의 앞에는 역경이 없는 것이다. 조달(調達)은 석가여래의 종형제(從兄弟)로서 세세생생(世世生生)에 석가여래와는 역반대의 행동을 취하여서 훈유빙탄(薰猶氷炭)의 사이가 되었던 것이다. 석가 응화(應化) 시대에 조달이 역시 불법을 비방하다가 생함지옥(生陷地獄)한 일이 있었다. 그리하여 조달이 지옥에서 무량(無量)한 고초를 받고 있는데, 석가(釋迦)가 아난(阿難)을 보내 조달에게 세존의 위무(慰撫)하는 자비의 명(命)을 전하고,

  「지옥고(地獄苦)가 어떠한가?」

  「석가여래의 사선천락(四禪天樂)보다 낫다.」

  「언제나 지옥에서 나올 것인가?」

  「석가여래가 지옥에 들어와 보아야 내가 나가겠다.」

  「석가여래는 삼계(三界)의 대도사(大導師)요 사생(四生)의 자부(慈父)이신데,
    지옥에 들어오실 분(分)이 있을까?」

  「석가여래가 지옥에 들어올 분(分)이 없으면 내가 지옥에서 나갈 분이 없겠지.」

하고 조달은 대답하였다. 조달은 역화보살(逆化菩薩)이라 하거니와, 순역(順逆)은 다를지언정 인격에 있어서는 조달이 석가여래에 못하지 아니한 것이다. 역경으로서 지옥 이상의 역경이 있으랴마는, 조달은 거기에 대해서 능히 사선천(四禪天)의 무상락(無上樂)을 맛보았으니, 그것은 일체 유심(一切惟心)의 화현(化現)이거니와 미상불(未嘗不) 통쾌한 일이다.

사람으로서 석가여래가 못 될진대 차라리 조달이 될 것인가. 조운모우(朝雲募雨)의 기회주의자들, 인생으로서 가련하지 아니한가. 회산양능(懷山襄陵)의 준랑(駿浪)인들 어찌 지주(砥柱)를 움직이며, 질풍폭우(疾風暴雨)의 회야(晦夜)인들 어찌 계명(鷄鳴)을 저지하랴. 역경이라는 것은 겁자(怯者)의 눈에 보이는 신기루(蜃氣樓)일 뿐이다. 그것을 겁(怯)하는 것이 어찌 스스로 부끄럽고 우스운 일이 아니랴. 일예재안(一翳在眼)에 공화난추(空華難墜)하느니 모름지기 청명안(淸明眼)을 요할지니라.

                                            「한용운 수상집<신구문화사 ‘76>」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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