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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현대영미철학

크립키의 선천성 개념과 본질주의 형이상학(박준호)


크립키의 선천성 개념과 본질주의 형이상학(박준호)

분석철학

크립키의 선천성 개념과 본질주의 형이상학 박준호(전북대) [한글 요약] 크립키는 흄의 포크(Hume's fork)로 알려진 경험주의의 전통적 이분법의 거부한다. 전통적 이분법에 의하면 모 든 선천적 명제는 필연적이며, 모든 필연적 명제는 선천적이다. 크립키는 선천성과 우연성이 병존한다고 논증 함으로써 이 구별을 부정하였다. 그리고 이것이 성립되는 이유를 자신의 직접 언급론에서 찾았다. 또한 크립키 는 이런 반이분법을 토대로 본질에 관한 후천적 지식이 성립한다는 본질주의를 형이상학을 내세웠다. 이 구별 자체도 중요하지만 여기서 귀결되는 철학적 신조들 때문에 그 중요성이 더 커진 것이다. 하지만 크립키의 본질 주의와 반이분법에 그의 언어철학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지는 불분명하다. 그간의 논의가 크립키의 반이분법 에 대해 필연성 개념에 대한 검토를 바탕으로 모든 필연 명제는 선천적이라는 주장을 부정하는 데 주력했으나, 크립키의 선천성 개념을 명확히 하는 것만으로도 그의 반이분법과 그 형이상학적 귀결을 이해하는 데 충분하다. 본고에서는 크립키가 자신의 논지를 강화하기 위해 제시한 미터(meter)의 예를 검토하여 이 점을 보다 명확히 밝히고자 한다. 주제분야 : 형이상학, 분석철학, 언어철학 주 제 어 : 본질주의, 선천 우연성, 반이분법, 직접 언급론 1. 크립키는 흄의 포크(Hume's fork)로 알려진 경험주의의 전통적 이분법의 거부한다. 전통적 이분법에 의하면 분 석적, 선천적, 필연적 명제 각각에 종합적, 후천적, 우연적 명제가 대응된다. 우리는 모든 분석적으로 옳은 명제 를 선천적으로 알 수 있고, 우리가 선천적으로 알 수 있는 명제는 모두 필연적으로 옳은 명제이며, 모든 분석적 으로 옳은 명제는 모두 필연적으로 옳은 명제이다. 그리고 반대로 필연적으로 옳은 명제는 모두 분석적으로 옳 은 명제이며, 우리는 필연적으로 옳은 모든 명제를 선천적으로 알 수 있으며, 모든 필연적으로 옳은 명제는 분 석적 명제이다. 크립키는 이 가운데 특히 필연성과 선천성에 관한 다음 주장에 도전하고자 한다. 1) 모든 선천적 명제는 필연적이다. 2) 모든 필연적 명제는 선천적이다. 이에 대해 의견을 달리하는 것은 철학적으로 중요한 함축을 갖는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흄을 통해서도 알 수 있 다. 흄은 사실의 문제와 관념의 관계의 구별을 근거로 삼아 형이상학을 다룬 책을 불에 넣으라는 권고한다. 형 이상학 책은 궤변과 환상을 담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크립키는 선천성과 우연성이 병존한다고 논증함으로써 이 구별을 부정하였다. 그리고 이것이 성립되는 이유를 자신의 직접 언급론에서 찾았다. 또한 크립키는 이런 반 이분법을 토대로 본질에 관한 후천적 지식이 성립한다는 본질주의를 형이상학을 내세웠다. 이 구별 자체도 중요 하지만 여기서 귀결되는 철학적 신조들 때문에 그 중요성이 더 크다. 하지만 크립키의 본질주의와 반이분법에 그의 언어철학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지는 불분명하다. 또한 그간의 논의가 크립키의 반이분법에 대해 필연성 개념에 대한 검토를 바탕으로 위의 2)를 부정하는 데 주력했으나 크립 키의 선천성 개념을 명확히 하는 것만으로도 그의 반이분법과 그 형이상학적 귀결을 이해하는 데 충분한 역할을 한다. 본고에서는 크립키가 자신의 논지를 강화하기 위해 제시한 미터(meter)의 사례를 검토하여 이 점을 보다 명확히 밝히고자 한다. 2. 위의 1)과 2)는 둘 다 보편적 명제이기 때문에 한 가지의 반대 사례만 들면, 이 주장들을 반박할 수 있다. 다음이 크립키의 논증의 얼개이다. 1a)적어도 하나의 선천 우연 명제가 성립한다. 그러므로 모든 선천 명제가 필연적인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전통적 이분법은 성립하지 않는다. 2a)적어도 하나의 필연 후천 명제가 성립한다. 그러므로 모든 필연 명제가 선천적인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전통적 이분법은 성립하지 않는다. 1a)는 1)의 주장에, 2a)는 2)의 주장에 반대 논증을 구성한다. 만일 그가 위의 두 논증 중에 아무것이든 성공시 키면, 그는 전통적 이분법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데 성공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그에게 중요한 형 이상학적 귀결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2a)를 성공시켜야 한다고 본다. 하지만 1a)만으로도 이런 일을 충분히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의 독특한 선천성 개념 때문이다. 결국 크립키가 논증하고자 했던 것은 다음이다.

1b)전통적 선천성 개념은 그르며, 사실적 선천성 개념이 옳다. 적어도 하나의 선천 우연 명제가 성립한다. 그러므로 모든 선천 명제가 필연적인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전통적 이분법은 성립하지 않는다. 2b)전통적 선천성 개념은 그르며, 사실적 선천성 개념이 옳다. 적어도 하나의 필연 후천 명제가 성립한다. 그러므로 모든 필연 명제가 선천적인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전통적 이분법은 성립하지 않는다. 크립키는 우선 선천성에 관한 필연성-기반의 선천성 개념에 반대한다. 이 개념에 의하면 필연성과 선천성은 서 로 바꾸어 쓸 수 있는 표현이다. 그러나 선천성은 우리의 인식 상태가 갖는 것이다. 필연성은 명제의 진리성의 양상이다. 선천성은 명제나 명제의 진리성의 양상이 아니라 인간이 명제를 아는 상태의 양상이다. 선천성과 후 천성이라는 인식론적 양상과 필연성과 우연성이라는 형이상학적 양상은 서로 구별되어야 한다. 우리는 어떤 명 제나 진술이 옳다는 것을 선천적으로 안다. 만일 우리가 감각 경험에 의존하지 않고 어떤 명제가 옳다는 것을 안 다면 우리는 그 명제의 진리성을 선천적으로 안다. 그래서 선천성의 담지자는 지식 상태이다. 그래서 명제의 수 식어로 ‘선천적’을 사용하는 것은 1차적인 용법이 아니며, 2차적인 용법이라고 하겠다. 칸트에 따르면 “선천적 진리는 어떠한 경험에서 독립되어 알려질 수 있는 진리이다.…이는…어떤 것을 어떠한 경험과도 독립적으로 아는 일이 가능하다는 의미”이고 결국 이런 개념에는 ‘가능성’ 양상이 포함되어 있다. 그 는 이 가능성을 신이나 화성인이 아니라 사람과 관련시킨다. 선천성이 사람의 인식 양상이라는 점을 부각시킨 다. ‘원리적 선천성 개념’은 신의 관점에 서 있는 선천성 개념이며, 이는 우리의 고려 사항이 아니다. 이 원리적 선천성 개념에 따르면, 선천성과 필연성의 외연이 똑같다는 주장을 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크립키가 생각하는 것은 바로 ‘사실적 선천성 개념’이다. 사실적 선천성 개념에는 두 가지가 있을 수 있다. 먼저 우리는 수학의 명제를 후천적으로 배운다. 다시 말해 1+1=2라는 것을 처음 배울 때, 우리는 손가락을 곱아보거나 사과를 보면서, 이를 배우고, 이해하고, 익힌다. 사실상, 우리는 복잡한 미분과 적분 계산 이 옳다는 것을 전문 수학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안다. 이런 후천성 개념의 짝이 바로 사실적 선천성일 것이다. 이 개념에 따르면, 선천적 진리란 감각 경험과 독립적으로 알려진 진리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진리는 이런 의미의 선천적 지식이 아니라, 이런 의미의 후천적 지식이다. 그러나 크립키가 주장하고 하는 선천성 개념은 이것이 아니다. 선천적 진리란 감각 경험과 독립적으로 알려질 수 있는 진리이며, 원리상 알려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상 알려질 수 있는 진리이다. 이 개념은 ‘수 있는’이 라는 가능성 양상 개념이 더해졌다. 그렇지만 ‘사실상’의 가능성이기 때문에 ‘원리상’의 가능성과는 다르다. 사 실상의 가능성이란 경험적 가능성을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선천적 진리란 우리가 경험과 독립적으로 아는 게 경 험적으로 가능한 진리이다. 골드바하의 추정을 지금 현재 아무도 옳다고 모르고 있다. 인간이 처한 사실적 한계 즉 인간이 발견할 수 있는 보다 큰 수가 언제나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볼 때, 이 추정을 사실상 선천적으로 알 수 없고, 원리상 우리는 선천적으로 알 수 없겠지만, 무한한 정신은 알 수 있다. 따라서 크립키의 선천성 개념에 따르면, 전통적 개념에 따라서 선천적 진리라고 해야 할 많은 진리가 선천적 진 리가 아니다. 수학의 명제들이 대표적인 예들이다. 좀 더 정확히 얘기하면, 선천성은 명제나 진리의 양상이 아 니며, 지식의 양상이므로, 우리는 수학의 명제들을 선천적으로 사실상 알 수 있거나, 후천적으로 사실상 알 수 있다. 전산기의 예가 이를 잘 보여준다. 선천성을 명제의 양상이 아니라 지식의 양상으로 취급해야한다고 말한 크립키의 말을 명심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더불어 그것이 원리상 선천성이 아니라 사실상 선천성이라는 것도 명심해야 한다. 필연적으로 옳은 수학의 명제를 우리는 사실상 선천적으로 알 수도 있고, 사실상 후천적으 로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그가 예로 들고 있는 필연 후천 명제들의 모든 예도 그의 선천성과 후천성 개념에 의해서 설명될 수 있는 것 같다. 모든 옳은 동일성 진술을 우리는 선천적으로 알 수도 있고 후천적으로 알 수도 있다. ‘개밥바라기 는 샛별이다’는 옳은 진술은 그 자체로 선천적이거나 후천적인 것이 아니다. 인간이 이 진술이 옳다는 것을 사실 상 선천적으로 알 수 있거나 후천적으로 알 수 있다. 진술이나 진술의 진리성 자체가 그것의 인식 양상을 결정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물은 H2O이다’는 진술도 마찬가지이다. (이 진술이 진정으로 필연적 진술인지는 논란거 리이지만) 아무리 필연적으로 옳다고 한다고 해도, 우리는 이를 사실상 경험에 의존해서 옳다고 알 수 있다. 그리고 똑같은 맥락에서 분석적 명제에 관해서 생각해보자. 분석성이란 명제나 명제의 진리성이 갖는 양상이 다. 그래서 크립키의 취지에 따라, 이는 선천성과는 독립적이다. 그런데 크립키는 이 분석성을 예외로 취급하는 것 같다. 그는 분석적으로 옳은 명제를 필연적이고 선천적으로 옳은 명제라고 말한다.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서라면, 분석성은 명제의 양상이므로 어떤 분석적 명제를 인간이 후천적으로 사실상 알 수 있다는 것을 방해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총각은 미혼이다’는 분석적으로 옳은 명제를 우리는 사실상 후천적으로 알 수 있 다. 우리는 사실상 경험적으로 이 진술의 진리성을 배우게 되며, 또 그럴 수 있다. 예를 들어, 전산기에 입력된 정보는 ‘총각은 미혼의 성인 남성’이다. 그런데 ‘총각’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으면서, ‘미혼’‘성인’‘남성’은 알고 있 는 사람이 전산기를 두드려보고 ‘총각은 미혼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면, 그 사람은 ‘총각은 미혼이다’는 분석 명제를 후천적으로 안 것이다. 그리고 이런 상황이 경험적으로 가능하다는 의미에서 크립키의 의미로 이런 지식 은 후천적 지식이다. 그러나 크립키는 분석성을 단순히 필연적이고 선천적이라고 규약하자고 말한다. “하여튼, 분석 진술이 어떤 뜻에서 그 의미에 의해서 옳으며 그 의미에 의해서 모든 가능 세계에서 옳다는 것을 규약의 문 제라고 보자. 그렇다면, 분석적으로 옳은 것은 필연적으로도 옳고 선천적으로도 옳을 것이다. (이는 일종의 규 약이다.)” 이것은 설명이 필요한 곳에 단지 규약을 도입하여 문제를 얼버무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크립키의 선천성 개념은 몇 가지 중요한 귀결을 갖는다. 우선, 그의 주장과는 달리 많은 선천 우연 명제라든지, 필연 후천 명제들이 그의 직접 언급론과는 상관없이, 오직 그의 선천성 개념만으로 설명될 수 있다. 그의 반이 분법은 직접 언급론과는 무관하게 성립될 수 있다. 크립키가 자신의 선천성 개념을 직접 언급론과 연결 시켜보 려는 시도는 다음 절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볼 것이며, 다른 각도에서 비판하겠다. 우리는 그의 선천성 개념을 수용하거나 그에 반대해서 전통적 선천성 개념을 계속 지지해야 하는가? 하지만 다 양한 선천성 개념이 존재하고 있다. 예를 들어, 칸트의 심리주의, 루이스(C. I. Lewis)의 실용주의, 에이어의 언 어주의, 비트겐슈타인의 인류학적 약정주의, 치섬의 이해력 직관주의, 퍼트남의 합리성-기반의 선천성 개념, 키처(Philip Kitcher)의 신뢰가능주의 등이 존재하고 있다. 따라서 양자택일의 선택 상황은 아니다. 또한 크립키 가 원래 의도한 바는 직접 언급론으로부터 앞의 논증 1b)와 2b)를 도출하는 것이었는데, 이런 원래의 의도가 의도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 직접언급론에서 1b)와 2b)를 도출하려는 그의 원래 논증은 타당성 이 의심스럽다. 이제 1b)에 관해서 살펴봄으로써, 직접 언급론에서 반이분법을 도출할 수 있다는 그의 주장을 살펴보자. 3. 지금까지 논증한 바에 의하면 크립키에게는 명제의 진리성의 양상과 이에 관한 지식의 양상이 다르기 때문에, 어떤 양상을 띤 명제가 어떻게 알려질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명제 자체의 성격이나 양상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 다. 인간이 그것을 사실상 어떻게 알 수 있느냐하는 것이 결정한다. 우선 논의의 대상을 1a)로 국한해보자. 1a)가 논증하려는 바는 모든 선천적인 명제가 필연적이라는 주장의 부 정이다. 이 논증의 가장 핵심 부분은 첫째 전제 즉 적어도 하나의 선천 우연 명제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를 정당화하는 방법은 선천적으로 알려지지만 우연 명제인 예를 하나만 제시하면 된다. 크립키는 미터의 예를 들고 있다. 그는 비트겐슈타인이  철학적 탐구  §50에서 제시한 미터에 관한 예를 달 리 해석하고 있다. 우리가 이것은 일 미터 길이라거나 이것은 일 미터 길이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 하나 있는데, 다름 아니 라 파리에 있는 표준 미터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은 그것에 비일상적인 속성을 귀속시키는 것이 물론 아니며, 미터법에 의한 측정이라는 언어 놀이에서 그것이 맡고 있는 특이한 역할에 주목하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표준 미터인 막대를 일 미터라고 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말한다. 그 막대가 길이의 표준이므 로 이 막대에 길이라는 개념을 적용할 수 없다. 만일 그것에 길이라는 개념을 적용한다면, 그것은 언어 놀이의 규칙을 위반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막대의 이름을 S라고 했을 때,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다음 문장은 무 의미하다. 3) 확정된 시간 t0에 막대 S는 일 미터이다 그러나 크립키는 이 막대가 39.37인치 길이인 막대라면 우리가 이 막대를 일 미터라고 못할 이유가 없다고 한 다. 이 문장이 의미가 있다면, 이 문장의 격위는 무엇인가? 경험주의자들은 이 문장을 선천적이며 필연적이라고 할 것이다. 이 문장은 정의에 의해 선천성과 필연성이 확보된다. 일 미터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4) 일 미터는 확정된 시간 t0에 S의 길이이다 경험주의에 따르면, 3)은 4)에 의해서 선천성과 필연성이 확보된다. 그러나 크립키는 이 입장을 거부한다. 이 때 크립키는 3)을 정의가 아니라고 거부하는 게 아니다. 그는 3)을 정의라고 인정한다. 그런데 바로 정의의 성격과 격위에 관해서 경험주의자들과 생각을 달리한다. 또한 그는 3)의 선천성을 부정하는 게 아니다. 그는 이것이 선 천적 진술이며, 이 선천성을 4)로부터 상속받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경험주의자들은 정의에 의해 필연성이 확 보된다고 여기지만, 크립키는 정의에 의해서 선천성은 확보될지 모르지만 필연성은 확보되지 않는다고 주장한 다. 정의에 의해 필연성이 아니라 우연성이 확보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는 이 진술의 선천성과 우연성을 자 신의 직접 언급론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여긴다. 크립키의 정의론(theory of definition)은 그의 직접 언급론보다 일반적인 이론이다. 그는 정의가 두 가지 종류가 있다 본다. 하나는 좁은 의미에서의 의미를 부여하는 정의가 있다. 또 하나는 언급을 확정하는 정의가 있다. 후 자와 달리 전자는 축약어를 제시하거나 동의어를 제시하는 일이다. 이 구별은 뭔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는 내포적 정의와 외연적 정의라는 해묵은 구별일 뿐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새로운가? 그는 이 구별에 토대를 두고 정의에 관한 새로운 해석을 한다. 정의 4)를 보자. 이는 미터에 관한 정의이다. 그 런데, 그에 따르면, 이 정의는 동의어를 제시하거나 축약어를 제시하는 정의가 아니다. 언급을 확정하는 정의 다. 정의는 두 가지가 있지만, 언급 확정은 정의의 한 가지이다. 필자가 직접 언급론을 크립키의 정의론의 하위 이론이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무엇의 언급을 확정하는가? ‘일 미터’라는 낱말이 S의 길이라는 사실이든 사물이든 세계에 존재하는 것에 적용된다고 확정짓는다. 이 정의는 서술문 형태를 띠고 있지만 사실은 제안이 다. 이는 마치 ‘나는 “개밥바라기”를 하늘 저 편에 있는 걸로 보이는 천체의 이름으로 사용하겠다’고 선언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어떤 언어표현의 언급이 확정되는 것은 예시(ostension)나 한정 기술(definite description)에 의해서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러면 예시와 한정 기술을 통한 언급 확정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둘 다 언급 확정이라는 언어 행위의 특정 사례라는 점이다. 결국 어떤 언어 표현이 띠고 있는 언급 기능은 언급 확정이라는 언어 행위에 서 상속받은 것이다. 최초의 명명식은 예시나 기술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렇게 확정된 언급은 사용의 인 과 고리에 의해 전달된다. 크립키의 이론을 특징짓는 것은 바로 이렇게 언급이 확정되는 과정에서 밀이 말한 내 포, 프레게가 말한 뜻이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데 있다. 그리고 그는 외연적 정의, 즉 언급 확정의 정의로 인해서 만들어지는 진술의 격위에 관해서 달리 생각한다. 앞 에서 인용한 ‘나는 “개밥바라기”를 하늘 저 편에 있는 걸로 보이는 천체의 이름으로 사용 하겠다’는 문장에서 볼 때, 크립키는 정의를 언어에 관한 제안이나 약정으로 보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4)는 5)와 같이 해석되어야 한 다. 5) ‘일 미터’는 확정된 시간 t0에 S의 길이를 언급한다. 이것을 염두에 두는 것이 아주 중요한데도, 크립키는 이를 잊은 것처럼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는 정의를 다음과 같은 동일성 진술로 해석하기도 한다. 6) 일 미터 = S의 길이 그는 이 정의가 언급을 확정하는 정의라는 것을 잊지 않고 말한다. 물론 정의를 진술이라고 볼 수 있다. 4)도 진 술이고 5) 역시 진술이다. 그러나 5)의 경우는 ‘일 미터’라는 언어 표현에 관한 진술이지 일 미터에 관한 진술이 아니다. 4)에서는 이런 점이 명확히 드러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가 4)를 5)로 바꾸어서 생각해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6)은 어떤가? 이는 명백히 언어 표현에 관한 진술이 아니라 일 미터에 관한 진술이다. 크립키는 4) 를 5)로 해석하지 않고 6)으로 해석하는 것 같다. 그러나 정의에 등장하는 ‘이다’는 동일성을 표현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런 크립키의 해석은 지지되기 어렵다. 그 렇다면 크립키가 6)을 표현했을 때, 실수로, 3)을 말하려고 하였다고 해보자. (만일 그런다면, 그가 주어와 술어 의 순서를 바꾸어썼다고 해야겠지만, 이것은 그냥 넘기자.) 그렇다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3)에 등장하는 ‘이다’ 역시 동일성을 표현한다고 말하기 어렵다. 필자가 보기에는 3)에 등장하는 ‘이다’는 속성을 귀속시킨다. S가 다른 길이를 갖는 것이 아니라 일 미터라는 길이를 갖는다는 것이다. 물론 크립키는 이에 반대할 것이다. 크립키는 한정 기술이 술어자리에 등장하는 일부의 경우에만 속성을 귀속시킨다고 인정한다. 일 미터는 고정지 시어이고 고정지시어는 아무리 술어 자리에 등장해도 속성 귀속에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언급을 확정하기 위해 사용된다. 그러므로 크립키는 이 문장을 속성 귀속 문장이 아니라 동일성 문장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이를 동일성 문장이라고 해보자. 이 문장은 선천적 문장인가? 크립키는 이를 선천적 문장이라고 한다. 왜냐하 면, 정의에 의해서. 이 명제를 아는 사람은 “자동적으로, 더 이상의 탐구 없이, S가 일 미터 길이라는 것을 안 다.” 그런데 정의에 의해서 이 문장이 어떻게 선천적 명제가 되는지 알기는 생각만큼 쉽지않다. 왜냐하면, 앞에 서 지적한대로 크립키가 정의를 표현하는 문장을 어떤 것으로 보는지 여부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접어두더라도 다른 문제가 생긴다. 크립키는 이 문장이 선천적이라고 생각하는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 한다. 크립키는 선천성을 명제나 진리의 양상이 아니라 지식의 양상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이 동일성 진술을 처 음 도입한 사람은 물론 이것을 선천적으로 알았겠지만, 나중에 이 사람에게서 언급을 전달받은 사람은 그렇지 않을 수 있다. 그 사람은 ‘일 미터’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지만 그것이 ‘S의 길이’를 언급하는지 모를 수 있다. 어 느 날, 그 사람은 파리에 있는 그 막대 S에 대해 듣게 되고, ‘일 미터’라는 말의 언급이 고정된 역사를 배우게 된 다. 그런 일이 생기고서야 그는 비로소 이 진술이 옳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에게 이 문장은 후천적으로 옳다고 알게 된 진술을 표현한다. 이 진술은 크립키의 의미로 선천적이거나 후천적일 수 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여기서 문제가 되고 있는 선천성이 그의 언급론과는 상관이 없다는 점이다. 그는 언급 확정의 정의와 동의어 정의를 구별하지만, 정의에 의해 만들어지는 옳은 진술은 선천적이라고 주장한다. 바로 이점은 그가 반대하는 경험주의자들의 주장과 일치한다. 따라서 그의 필연 문장이든 우연 문장이든, 분석 명제 이든 종합 명제이든, 우리가 어떤 문장을 선천적으로 알 수 있는지 여부는 그의 직접 언급론이 답해주지 못하 며, 단지 그의 선천성에 관한 독특한 견해가 답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는 3)의 우연성에 관한 설명을 다음과 같이 하고 있다. 그에 반해서, S가 미터의 표준으로 사용되었다고 하더라도, ‘일 미터’가 고정 지칭어로 간주된다는 조건하에서, ‘S는 일 미터 길이이다’의 형이상학적 격위는 우연적 진술의 격위일 것이다. 적절한 압력과 변형, 가열과 냉각을 겪으면, S는 t0에서조차 일 미터 아닌 다른 길이가 되었을 것이다. (‘물은 해수면 고도에서 100℃에 끓는다’와 같은 진술은 이와 비슷한 격위를 가질 수 있다.) 그러나 ‘S는 일 미터 길이이다’는 진술은 그를 수 있는 진술이 아니다. 이를 보기 위해 정의를 도입하는 장면으 로 되돌아가보자. 누군가 4)를 통해 용어 ‘일 미터’를 특정 막대에 특정 시간에 확정하려고 하고 있다. 그런데 그 막대의 길이가 시시각각으로 심하게 변한다고 하자. 가장 짧을 때(39.37인치)와 가장 길 때, 길이가 거의 두 배 (78.74)나 차이가 난다고 하자. 그러나 우리는 ‘일 미터’의 언급을 확정해야 하므로 특정 시간 단면에 과감히 그 길이를 일 미터로 정했다. 만일 우리가 막대가 가장 길게 된 시간에 일 미터를 정했다면, 그 길이가 일 미터이 다. 만일 우리가 가장 짧게 된 시간에 일 미터를 정했다면, 그 가장 짧은 길이가 일 미터이다. 아무리 길이가 계 속 변했어도, ‘일 미터’는 일 미터를 정한 시간에 그 길이에 확정된다. 이렇게 확정된 그 시간의 그 막대의 길이가 일 미터인가 아닌가? 물론 일 미터이다. 왜? 바로 우리가 그렇게 정 했기 때문이다. 일 미터가 지금이 길이와 달라졌을 수 있는가? (크립키는 반대하겠지만) 물론 달라졌을 수 있 다. 우리가 막대의 길이가 시시각각으로 변하고 있는 가운데 다른 시간에 일 미터를 정했으면, 일 미터라는 척 도는 지금과 달라졌을 수 있다. 그렇다면 일 미터를 정한 그 시간에 막대의 길이는 일 미터가 아닐 수 있는가? 그런 일은 벌어질 수 없다. 왜냐 하면, (크립키의 말대로) 그 시간에 그 막대의 길이를 일 미터라고 정했으므로. 만일 그 시간에 막대의 길이가 달랐을 수 있는가? (크립키의 말대로) 물론 달랐을 수 있다. 공기압이 좀더 가해졌다거나, 냉각기가 고장 났었 더라면 그 막대의 길이는 달랐을 수 있다. 만일 그 경우에 그 막대는 일 미터가 아닐 수 있었는가? (크립키의 주 장과 달리) 그럴 수 없었다. 그 시간에 일 미터를 정했다면 그 막대는 다른 길이였을 수는 있지만 일 미터가 아 닐 수는 없었다. 3)은 틀릴 수 없는 문장이다. ‘일 미터’를 정한 그 시간에 그 막대의 길이가 달리 될 수 있었다는 것이 3)의 진리 성에 영향을 미칠 수없다. 만일 막대의 길이가 바뀌었다는 상황만 생각하고, 4)를 잊어버린다면 이런 일은 가능 하다. 하지만 3)의 진리성은, 가정에 의하여, 즉 일 미터의 정의를 특정 시간에 S의 길이로 정하자는 약정에 의 하여, 언제나 4)에 종속되어 있다. 이를 보다 분명히 드러내보기 위해 4)가 도입되기 전에 벌어지는 일을 기술해 보자. 7) 확정된 시간 t0에 막대 S는 39.37인치 길이이다 7)이 바로 일 미터가 도입되기 이전의 상황이다. 우리는 ‘인치’라는 척도는 갖고 있지만, 아직 우리는 ‘일 미터’ 라는 용어를 갖고 있지 못하므로 인치로 표시해야 한다. 이것을 보고 나서 우리는 4)를 도입한다. 4) 일 미터는 확정된 시간 t0에 S의 길이(39.37인치)이다 그리고 난 뒤에 우리는 3)을 발언한다. 3) 확정된 시간 t0에 막대 S는 일 미터(39.37인치)이다

그러나 크립키의 말대로 분명히 시간 t0에 막대 S의 길이는 달라질 수 있었다. 달라진 상황은 다음과 같이 기술 할 수 있다. 7a) 확정된 시간 t0에 막대 S는 78.74인치 길이이다 (물론 이에 따라서, 확정된 그 시간에 막대 S는 78.74인치일 수 있었다는 것도 옳다.) 그 달라진 상황을 반영해 서 4)를 다음과 같이 써보자. 4a) 일 미터는 확정된 시간 t0에 S의 길이(78.74인치)다. 이 경우에 우리가 논의해야 하는 문장은 3)이 아니다. 다음의 문장이다. 3a) 확정된 시간 t0에 막대 S는 일 미터(78.74인치)이다. 3)을 바꾸려면, 4)를 바꾸어서 생각해야 한다. 가정에 의해서, 4)가 3)에 선행된다. 4)라는 언급 확정 정의가 주 어질 때만, 3)이라는 진술에 관한 논의가 가능하다. 따라서 우리가 4)라는 정의를 도입했으면, 정의에 의해서 3) 은 그를 수 없는 문장이 된다. 만일 상황을 7a)로 바꾸었다면, 우리는 정의 4a)를 도입했을 것이고, 막대 S에 관 한 진술은 3)이 아니라 3a)로 바뀌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3)과 3a)는 언급 확정 정의에 의해 필연적으로 옳다. 상황이 7a)로 바뀌었어도 크립키는 여전히 3)에 관해서 논의하자고 말할 수 있다. 그럴 수 있다. 그러나 그 경우 에는 크립키의 가정에 의해, 다시 말해 우리가 ‘일 미터’의 정의를 특정 시간의 S의 길이에 의해 확정한다는 방 침에 따라, 4)가 4a)로 바뀌게 된다. 그렇다면, 3)은 4a)와 똑같은 기호 ‘일 미터’를 사용하기는 하지만, 각각 다 른 것을 언급하는 동음이의어를 사용하는 있는 셈이다. 그러므로 이런 경우에는 크립키의 주장과는 달리 3)은 정의에 의한 선천 명제이기는 하지만, 4a)가 아니라 4)의 정의에 의한 선천 명제이다. 그리고 4)는 7a)에 의해 만들어진 정의이며, 7)이라는 상황 하에 제시된 정의가 아니다. 일 미터의 언급 확정 정의는 바뀌었고, 따라서 3)은 더 이상 선천 명제가 아니며, 후천 명제이다. 그래서 이 진술이 그를 수 있는 진술이라는 것은 너무나도 당 연하다. 그래서 3)은 바로 후천 우연 명제의 대표적인 예이다. 만일 크립키가 마음을 바꿔 3a)을 논의의 대상으 로 삼는다면, 이는 앞에서 본대로 선천 필연 명제가 될 것이다. 그런데 크립키는 ‘일 미터’를 고정지시어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4)를 4a)로 바꾸지 않겠다는 말이다. 그러면서 3)을 3a)로만 바꾸자는 제안을 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제안은 크립키가 ‘일 미터’의 언급을 확정하는 절차라고 제시한 것과 배치된다. 그렇지만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 이럴 경우는 3)은 그른 명제이다. 그런데 이는 후천적 명제이면서 우연적 명제이다. 어떤 막대가 특정한 시간에 일 미터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이런 상황을 서 술하는 명제는 우연 명제이다. 어느 경우가 되었든 그가 자신의 반이분법 주장을 확증하는 사례로 미터의 예를 사용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리고 언급 확정의 정의에 의해 선천성이 확보되는 진술의 후천성을 밝히는데도, 그의 직접 언급론은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의 언급 확정에 관한 이론을 적용하더라도, 그가 예를 들고 있는 미터의 예 는 우연성을 확보하지 못한다. 선천성도 그에 의해 확보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의 직접 언급론과 그의 반이분 법 주장도 논리적으로 별 관련이 없어 보인다. 5. 크립키의 저작은 언어 철학을 주된 주제로 삼았으나 이 영역을 넘어, 철학에 근본적인 사고의 전환을 촉구하였 다. 즉 그는 일차적으로 고유명과 자연류어의 의미와 언급에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또 한편 필연성과 가능성의 형이상학적 개념, 필연성과 선천성의 구분, 선천 우연성과 필연 후천성에 관한 논제를 주장하였고, 더 나아가 이를 바탕으로 본질주의 즉 대상이 가진 속성 가운데 일부는 본질적이고, 일부는 우유적이라고 말하는 것이 이 해가능한 주장임을 보였다. 또한 그가 경험주의자의 근본 가정에 의심을 제기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분석철학 내 부에 팽배하던 철학관 즉 철학이 언어 분석에 불과하다는 견해를 반박하였다. 이런 여러 주제들은 그 자체로도 의의를 가질 수 있겠지만, 서로 유기적인 통합체를 이루는 주장이라는 점에서 더 큰 의의를 찾을 수 있다. 만일 크립키의 선천 우연 명제에 관한 주장이 성립된다면, 이는 상당히 중요한 철학적 귀결들을 갖는다. 그는 언급 확정에 의한 정의가 동의어를 제공하는 정의와 다르다고 주장한다. 이에 의해서 선천 지식을 얻을 수 있을 지 모르지만, 다른 한편으로 필연 명제가 아니라 우연 명제를 얻게 된다. 그런데 모든 분석명제는 크립키의 규 약에 따라서 필연적이고 선천적이다. 따라서 크립키의 선천 우연 명제는 분석명제가 아니라 종합명제이다. 크 립키는 선천 종합명제의 존재를 긍정해야 한다. 이를 볼 때, 크립키의 선천 우연 명제에 관한 주장이 성립된다 면, 우리는 세계에 관한 선천적 지식, 세계에 관해서 경험 없이 알 수 있는 지식을 가질 수 있게 된다. 이는 선천 종합 진술을 부정하는 경험주의 원리를 정면으로 반대하고 있는 것이며 칸트 이래로 이성주의자들이 자각적으 로 추구했던 노선이다. 결국 크립키의 논의의 귀결은 이성주의 지식론의 부활이다. 또한 이와 더불어, 크립키의 선천성 개념은 이성주의자들이 가졌던 형이상학적 신조의 부활을 가져올 것이다. 그의 선천성 개념이 성립된다면, 우리는 세계에 관한 필연적 지식을 후천적으로 알 수 있게 된다. 과학은 경험 적 작업이지만, 우리에게 자연의 본질에 관한 지식을 가져다준다. 그럴 경우에 경험주의자들의 표준적 신조였 던, 반본질주의에 대한 반대주장, 즉 본질주의의 성립을 가능하게 만들어준다. 본질에 관한 지식이 경험적 지식 이라면 본질은 우리가 경험의 대상으로 삼는 세계에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렇듯 전통적 이분법에 대한 크립키의 반대가 성공한다면, 기존의 경험주의자들이 가졌던 인식론적 신조와 형이상학적 신조 가 성립되지 않게 될 것이다. 크립키의 반이분법은 이성주의 지식론과 이성주의 형이상학에 길을 열어준다. 이런 일을 위한 크립키의 전략은 적어도 하나의 선천 우연적 명제의 사례를 제시하여 기존의 이분법을 공략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가 들고 있는 예는 유망한 예가 아니었다. 물론, 다른 예를 제시할 수 있다. 여기서는 살펴 보지 않았지만, 그는 해왕성의 예를 들고 있다. 이에 관해서 그는 다른 전략을 사용했을 수 있고, 그래서 이 예 에 관해서는 다른 논의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어떤 예를 들어도 그의 선천성 개념에 따른다면, 기 존의 기준에 의해 어떤 격위를 갖는 명제든지 어떤 특정인에 의해서 선천적으로 알려질 수도 있고, 경험적으로 알려질 수도 있다. 결국 그는 선천성 개념을 상대화시켰다. 그렇기 때문에, 적어도 그의 선천성 개념에 관한 논 의가 그의 다른 예에도 적용된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그의 다른 예들이 선천 우연 명제의 유망한 후보로 보인다고 해도, 그것은 그의 선천성을 상대화시킴으로써 그가 논박하고자 하는 철학자들과 다른 선천성 개념을 사용 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선천성 개념이 다른 철학자들의 주장과 차별화되는 이유는 직접 지시론에서 도출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상대화된 선천성 개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이 선천성에 관한 주장은 직접 지시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이 성립될 수 있다. 결국, 그는 자신의 논의에서 결정적인 선천성 개념을 받아들여야할 이유를 성공적으로 제시하였다고 하기 어렵 다. 그는 기존의 원리적 선천성 개념이 가질 수 있는 문제를 성공적으로 지적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그와 달리 상대화된 선천성 개념을 사용한다. 그렇다면, 진정한 반대가 이루어졌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크립키 의미로 선천 우연성을 띤 것이 경험주의자의 의미로 선천 필연성을 띤다고 여전히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의미만 달리 사용한다고 반대가 성립되었다고 하기 어렵다. 게다가, 크립키는 자신의 의미로 선천 우연성을 보여주는 예도 효과적으로 제시하지 못한 것 같다. 크립키의 철학이 직접 지시론이라는 언어철학이 신조에서 출발하여, 이를 토대로 인식론적 신조와 형이상학적 신조를 옹호하고자 하였다는 점에서, 그는 전형적인 이십세기의 분석철학자였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는 분석철학자로서의 전형성을 깨고자 했다. 분석철학은 경험주의 전통에서 출발했으며, 그러다 보니 분석철학과 경험주의를 거의 동일하게 보는 것이 지배적 관점이다. 하지만 크립키는 분석철학과 경험주의의 밀착 관계에 이 의를 제기하였다. 그러나 그의 언어철학이 반이분법이라는 인식론적 주장을 지지하지 못하며, 그의 반이분법이 성립될 경우에 이루어질 수 있었던 본질주의 형이상학을 지지하는 일 역시 성취되지 못한다.

참고문헌 박준호,  현대 본질주의 연구 , 서광사, 1998. Devitt, M. and Kim Sterelny, Language and Reality: An Introduction to the Philosophy of Language, 2nd., MIT Press, 1999. Erwin, E., ‘Are the Notions “A Priori Truth” and “Necessary Truth” Extensionally Equivalent?,’ Canadian Jo urnal of Philosophy 3.4, 1974, pp. 595-597, 1974. Hempel, C. G., ‘Problems and Changes in the Empiricist Criterion of Meaning’, Revue internationale de ph ilosophie, Vol.n 11. Hume, Enquir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 XII, iii Kitcher, P., ‘Apriority and Necessity’, Australasian Journal of Philosophy, 58-2, 1980. Kripke, S., Naming and Necessity, Harvard University Press, 1980, 정대현 외 역,  이름과 필연 , 서광사. Moser, P., ed., A Priori Knowledge, Oxford University, 1987. Salmon, N., Reference and Essence, MIT Press. 박준호 역,  언급과 본질 , 한국문화사, 1981. Sloman, A., ‘Necessary, A Priori and Analytic’, Analysis, 26.1: 12-16, 1965/1966. Soames, S. Philosophical Analysis in The Twentieth Century, Vol. 2: the Age of Meaning. Princeton Univer sity Press, 2003 Wittgenstein, L., Philosophical Investigations, trans., G. Anscombe, Basil Blackwell Oxford, 1978. [Abstract] Kripke's a priori and essentialist metaphysics Joonho Park(Chonbuk National University) Kripke tried to deny the empiricist's dichotomy. It urges that all necessary proposition is a priori, and all a priori proposition is necessary. According to him, we do not have to admit the dichotomy, because of his philosophy of language, ie. the theory of direct reference. If the rejection is successful, we would get som e significant philosophical implication, for example, a strong argument for essentialism. But I cast a doubt about this relation between his philosophy of language and metaphysics because probably it is enough to have a new concept of a priori for refusing the dichotomy for Kripke. In order to make this point clear, the meter example which he presented in Naming and Necessity will be examined. Key words: essentialism, a priori contingency, empiricist dichotomy, theory of direct referen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