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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현대영미철학

콰인의 예정조화

콰인의 예정조화



김 명 석(경북대)



[한글 요약]



20세기 철학의 한 지류로 등장한 논리경험론은 언어의 본성을 탐구함으로써 인간의 인식과 존재를 해명하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논리경험론의 완성자라고 알려져 있는 콰인은 특히 언어적 표현의 '의미'를 비의미론적 용어에 의거하여 설명하는 데 주력했다. 이 설명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의미의 상호주관성을 해명하는 것이다. 그런데 콰인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식주체들이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는 지각유사성표준들의 예정조화를 도입한다. 이 글의 목적은 그가 어떤 탐구과정을 통해 이 예정조화를 주장하게 되었는지를 추적하는 것이다.

콰인은 비언어적 신경유입에서 어떻게 언어적 의미가 생성될 수 있었는지 해명하기 위해, 먼저 신경유입에서 언어로 가는 중간다리로서 관찰문장을 도입한다. 그런 다음 그는 이 관찰문장들이 공유하고 있는 경험적 의미를 명시적으로 정의한다: 관찰문장의 의미는 그것의 자극의미이다. 그리고 한 주체에게 어떤 한 문장의 자극의미란 현재의 신경유입에 응답하여 그 문장에 동의하거나 이의하는 그 주체의 성향이다. 콰인에 의하면, 한 주체가 두 신경유입에 대해 유사하게 반응하곤 하는 것은 그 주체의 선천적 지각유사성표준 때문인데, 콰인의 예정조화설은 두 주체가 가진 지각유사성표준이 잘 맞추어진 시계처럼 조화롭게 작동한다는 논제이다.





주제분야 : 인식론, 언어철학, 현대철학

주 제 어 : 콰인, 라이프니츠, 예정조화, 의미, 상호주관성

1. 들어가는 말



철학이 창시될 때부터, 철학자들은 인간존재를 구성하는 본질요소를 규정·해명하려고 노력했다. 사람은 '말하는' 동물이다, 사람은 '생각하는' 동물이다, 사람은 '모이는' 동물이다, 등과 같은 표현들은 바로 이러한 노력의 산물이다. 특히 '말', '생각', '모임'은 20세기 철학의 흐름을 결정지었던 개념들이다. 논리경험론은 언어의 본성을 탐구함으로써 인간의 인식과 존재를 해명하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반면에 현상학은 의식의 본성을 탐구함으로써, 사회비판이론은 사회의 본성을 탐구함으로써, 인간의 인식과 존재를 해명하려고 시도한다. 언어·의식·사회의 본성을 탐구하기 위해, 논리경험론자는 언어의 논리적 질서를 분석하고, 현상학자는 의식을 현상학적으로 환원시키고, 사회비판이론가는 사회를 해방적 이성에 비추어 비판한다. 20세기 철학은, 말하자면, 언어·의식·사회를 분석·환원·비판하는 철학이다.

콰인(W. V. Quine; 1908∼2000)은 논리경험론의 완성자라 할 수 있는데, 그의 철학은 언어의 본성에 대한 탐구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그는 존재론이나 인식론을 하기 위해 먼저 언어철학을 해야 했으며, 그의 존재론과 인식론은 그의 언어철학에 기반을 두고 있다. 언어철학자들이 가장 먼저 직면하는, 동시에 흔히 예사롭게 간과해 버리는 과제는 언어적 표현의 '의미'(meaning)를 비의미론적 용어에 의거하여 정의·설명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설명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이면서 가장 어려운 문제는 의미의 상호주관성(intersubjectivity)을 해명하는 것이다. 콰인은, 언어철학의 '슈퍼스타'답게, 이 문제를 간과하지 않고 문제의 근원에까지 주도면밀하게 파고들어 갔다. 그는 언어의 상호주관성을 해명하기 위해 '원초적 번역'(radical translation)이라는 매우 획기적인 사고실험을 고안해 내었다. 그는 이 사고실험을 때때로 사변적으로 수행함으로써, 언어의 상호주관성을 자연주의적으로 설명해 낸다. 그런데 다소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는 이 설명에서 인식주체들이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는 지각유사성표준들(standards of perceptual similarity)의 예정조화를 도입한다.

원래 '예정조화'(preestablished harmony)는 라이프니츠(Leibniz; 1646∼1716)가 단자들(monads) 사이의 교류 즉 의사소통을 설명하기 위해 도입한 개념이다. 특히 라이프니츠가 주목한 예정조화는 정신을 구성하는 우세한 단자와 육체를 구성하는 열등한 단자 사이의 조화이다. 그는 [신체계](1695)에서 자기 이론을 '일치이론'(theory of agreement)이라 부르기도 했는데, 일치이론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정신의 본성은 (다소간 명확함의 [정도를] 지닌 채) 매우 정확한 방식으로 세계를 표상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신이 혼자 힘으로 산출해 내는 표상들의 계열은, 자연적으로, 세계 그 자체 속에서 [일어나는] 변화들의 계열에 대응될 것이다." 라이프니츠는 [신체계]를 발표한 후, 이 저술의 주내용을 요약하여 바스나지(Henri Basnage de Beauval)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바로 이 편지에서 그는 처음으로 자기 이론을 '예정조화의 방법'이라 표현했고, 사람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그 유명한 두 시계 유비를 소개해 놓았다.

라이프니츠는 정신현상을 설명하는 당시의 이론들, 예컨대 스콜라식 유출이론(influx theory), 데카르트식 기회원인론(occasionalism), 스피노자식 유물론 등에 만족할 수 없었다. 기회원인론은 라 포르지(La Forge)와 말브랑쉬(Malebran- che; 1638∼1715)에 의해 개발되었는데, 라이프니츠는 이 이론을 종종 '데카르트식 이론'이라 불렀고, 스피노자(Spinoza; 1632∼77)의 이론도 이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기회원인론에 의하면, 정신을 포함한 모든 존재들을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은 오직 신에게만 있고, 따라서 정신과 육체의 연합은 신의 '수시적인 협력'(occasional assistance)을 필요로 한다. 그리하여 기회원인론은 정신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자연세계에 매순간 '무대장치로부터 [튀어 나오는] 신'(deus ex machina)을 불러들인다. 라이프니츠의 예정조화설은 이러한 임시방편적인 기회원인론의 대안으로 제시된 이론이다.

라이프니츠는 스콜라식 유출이론처럼 외부로부터 안으로 흘러 들어오는 영향을 요청하거나, 기회원인론처럼 초자연적 힘의 수시적 협력을 요청하지 않으면서, 주체들 사이의 연합과 의사소통을 설명하기를 원했다. 콰인의 예정조화 역시 이런 의도를 지니고 있다. 그는 의미의 상호주관성이 대화하는 화자와 청자 간 상호작용의 결과이거나, 초월적인 어떤 것의 수시적 협력의 결과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상호작용은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난다기보다, 한 주체와 그 주체 외부의 주위환경 사이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며, 인간두뇌 속에 초월적인 어떤 것이 있다고 믿을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이 글의 목적은 언어의 상호주관성을 설명하려 했던 콰인이 어떤 탐구과정을 통해 예정조화를 도입하게 되었는지를 추적하는 것이다. 필자는 제2절에서, 콰인이 근세 영국경험론자들의 '관념'(ideas) 대신 채택한, '신경유입'(neural intakes)에 대해 해설해 놓았다. 그런 다음 이 신경유입에 직접적으로 조건화된 구두적 반응을 기술해 주는 '관찰문장'(observational sentences)에 대해 다루었는데, 관찰문장은 언어 또는 학문으로 가는 첫 단계, 즉 원시언어이다. 제3절에서 우리는 콰인이 신경유입과 관찰문장을 연결하는 중간고리로서 도입한 '자극의미' (stimulus-meaning)에 대해 살펴 볼 것이다. 제4절과 제5절은 콰인이 이 자극의미의 상호주관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도입한 '감정이입'(empathy)과 '예정조화'를 각각 분석하는 데 할애했다.





2. 신경유입과 관찰문장



콰인 인식론의 목표는 자극의 단순 입력에서 어떻게 휘황찬란한 언어가 출력될 수 있었는지 그 과정을 기술 또는 설명하는 것이다. 언어는 사회성 또는 공공성을 지니고 있는데, 이 성격은 의미의 상호주관성에 기인한다. 그렇다면 '의미'란 무엇인가? 고전적 설명에 의하면, 의미는 주체의 마음속에 있는 심리적 품목, 예컨대 '관념'(ideas)과 동일시할 수 있다. 그러나 콰인은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관념'을 도입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관념의 사밀성(私密性) 때문이 아니라, 관념이 경험론의 기준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콰인은 경험론의 주요 신조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첫째는 과학을 위해 존재하는 증거가 무엇이든지 간에 감각적 증거라는 것이다. 다른 것은…말의 의미에 대한 모든 가르침은 궁극적으로 감각적 증거에 의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언어의 의미를 터득하게 되는 것은 관념과 같은 심적 대상에 의해서가 아니라, 외부수용기를 통해 들어오는 자극작용들에 의해서이다. 콰인이 관념을 도입하지 않는 이유 중에 또 다른 것은 관념의 동일성 기준을 제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동일성 기준 없이는 존재도 없다. '관념' 개념을 유용하게 활용하기 위해서는 두 관념들이 서로 동일하다고 말할 수 있는 조건을 먼저 제시해야 한다. 관념의 동일성 기준을 제시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며, 이런 어려움은 인식론자들의 관심을 관념에서 단어로 돌려놓았다.

콰인은, 낱말 또는 문장 하나 하나의 의미가 (이데아의 세계나 제3의 세계에) 각각 독립적으로 존립할 수 있는 품목으로 간주하는, 플라톤이나 프레게(Gottlob Frege; 1848∼1925)의 입장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렇게 할 경우 각 표현들의 동의성 기준을 제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반면에 외부수용기의 격발들은 그 동일성 기준을 제시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하여 콰인은 {존재론적 상대성과 다른 에세이들}(1969)의 마지막 문장에서 자극작용(stimulation)의 동일성 기준을 제시하는 문제를 하나의 과제로서 설정하였다. "두 주체가 같은 자극작용에 이르렀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니면 이것이 실패할 경우, 두 주체가 다른 두 주체들보다 더욱 가깝게 같은 자극작용에 이르렀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대체적으로 말하는 문제." 자극작용을 적절히 정의하면, 예컨대 하나의 물리적 사건으로서 정의하면, 자극작용의 동일성 기준은 비교적 쉽게 규정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자극작용의 동일성에 대해 말할 수 있다면, 자극작용의 동일성에 근거하여 언어적 표현의 의미 동일성에 대해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콰인은 의미를 자극작용에 근거하여 정의함으로써, 언어의 출현과 그것의 사회성을 설명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자극작용에 대한 콰인의 정의는 여러 단계를 거쳐 수정 및 개선되었다. 자극작용에 대한 최근 정의는 다음과 같다. "한 주어진 경우에, 한 주체가 겪는 자극작용이란, 나에게 있어서, 단지 그 경우에 격발된 모든 외부수용기들의 시간적으로 순서지워진 집합을 의미한다." 콰인은 보다 최근에 '자극작용'이라는 표현대신, '신경유입'(神境流入; neural intake)을 자주 사용한다. 신경유입은 신경말초를 통해 유입되는, 그리하여 신경계를 거쳐 두뇌피질로 전송되는 입자, 음파, 광파, 충격, 에너지 등의 총량을 의미한다. 신경유입에 대한 콰인의 정의는 자극작용의 정의와 대동소이하다: "한 주어진 경우에, 주체의 광역 신경유입[은] 그 경우에 그의 외부수용기들의 모든 점화들의 시간적으로 순서지워진 집합으로서 정의[된다]"(RE, 349).

콰인에 의하면, "말의 의미에 대한 모든 가르침은 궁극적으로 감각적 증거에 의지해야 한다"(EN, 75). 다시 말해, 언어의 의미를 터득하게 되는 것은 외부수용기를 통해 들어오는 신경유입에 의해서이다. 콰인은 의미를 자극작용에 근거하여 정의함으로써, 언어의 출현과 그것의 사회성을 설명하고자 한다. 이처럼 의미를 추적하기 위한 콰인의 '증거'(evidence)는 다름 아닌 신경유입이다. 정말이지 자극작용 또는 신경유입은 '증거'의 첫째 후배가 될 만하다. '감각 표피에 닿는 광선과 분자의 충격'은 외부세계로 가는 우리가 가진 '모든' "실마리"(WO, 22)이자, "누구나, 궁극적으로 자기의 세계 그림에 이를 때[까지] 입각해야 했던 모든 증거"(EN, 75)이며, "외부세계에 관한 우리의 유일한 정보 출처"이다. 신경유입은 우리 주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들에 관한 모든 "정보"들을 포괄하고 있다. 그러나, 분명히 신경유입은 우리가 감지할 수 있는 것도, 그것으로부터 무엇인가를 추론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데이빗슨의 기준에 의하면, 진술과 그 진술의 증거 사이의 관계가 논리적 관계여야 하기 때문에, 명제적 내용을 가지고 있지 못한 자극은 하나의 진술 또는 믿음, 그 믿음을 표현하는 문장의 증거가 될 수 없다. 그래서 콰인은 "차선의 후보"로서 관찰문장(observational sentences)을 제시한다. 관찰문장들은 "외부세계에 관한 증거의 제일차적 명부"(PT, 39)이다.

관찰문장은, 정의상, 화자가 오직 어떤 특정한 관찰적 상황에서만 동의 또는 이의하는 문장을 말한다. 콰인에 의하면, 이 관찰문장은 실험실의 학자가 그의 이론들을 검사할 때 의지하는 모든 것이다. 관찰문장에 의거하여 이론을 수정하고 개선하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정책이다. 이런 관찰문장은 학문으로 가는 길목일 뿐만 아니라, 보다 근원적인 의미에서, 언어로 가는 문턱이다. 관찰문장은 개인적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인간종의 차원에서도 "언어의 기원"이다. 관찰문장이 어떻게 이런 역할을 할 수 있는지 묻는다면, 이것은 관찰문장에 대한 인식론적 해명을 추구하는 것이다. 콰인은 관찰문장의 의미론적 측면을 일단 도외시하고, 그것의 인식론적 측면에 집중한다. 이 포커스에서 볼 때, 관찰문장은 무엇보다 신경유입에 직접적으로 조건화된 문장이다. 만일 신경유입과 관찰문장의 이 관계가 철저하게 규명된다면, 우리는 언어의 기원에 대한 만족할 만한 이론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의미의 상호주관성은 이 관찰문장들의 의미 또는 번역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고 보면 될 것이다.





3. 자극의미



의미 학습의 출발점은 신경말초의 격발이고, 그 매개가 바로 관찰문장이다. 신경유입과 관찰문장의 발화 사이의 관계는 매우 간단하다. 그것은 자극과 반응의 관계이고, 그 관계는 인과적 관계이다. 관찰문장의 발화는 신경유입에 의해 야기된다. 관찰문장을 발화하는 것은 다양한 반응들 중에서 특히 구두적 반응에 해당된다. 관찰문장은 하나의 신경말초의 격발에 의해 그것을 동의 또는 이의하도록 야기되는 그런 구두적 반응을 문자들로 표현한 것이다. 그리하여 신경말초의 격발과 문장들의 집단 즉 학문 사이의 관계는 논리적 관계가 아니라 인과적 관계이다. 콰인은 이 인과적 관계가 "증거적 지지 관계"(PT, 1)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증거'라는 표현은, 콰인도 인정했듯이(RLH, 575-6), 부적절하다. 데이빗슨이 끈질기게 주장했던 것처럼(각주 17), 증거적 지지 관계에 있을 수 있는 것은 신경유입과 관찰문장 사이가 아니라, 관찰문장과 다른 문장 사이이다. 이것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여전히 남는 문제는 자극과 반응의 단순한 인과관계가 어떻게 문장들 사이에 성립하는 논리적 관계를 발생시킬 수 있는지 설명하는 것이다. 그리고 신경말초의 자극은 그 세부적인 면에서 사람마다 다른 내밀한 사건이지만, 구두적 발화는 공적으로 유통될 수 있는 공적 사건이다. 콰인은 물리적 자극과 언어적 반응 사이의 이 본질적 격차를 메우기 위해 '관찰문장의 의미'를 물리적 항목들을 통해 정의한다. 이 때 등장하게 되는 콰인 특유의 개념이 바로 그 유명한 '자극의미'(stimulus-meaning)이다.

자극의미는 콰인이 "정신주의적 사적(private) 의미 개념에 대한 물리주의적 패러디"(POS, 114n)로서 사용한 개념이다. 한 문장의 자극의미는 어떤 한 시점에 어떤 화자에 대해서 정의된다(WO, 33). "한 주체에 대한 한 문장의 자극의미는 현재의 자극작용에 응답하여 그 문장에 동의하거나 이의하는 그의 성향의 합계이다"(같은책, 34). 자극의미를 '신경유입'을 사용하여 규정하면 다음과 같다. 한 문장의 자극의미는 "그 문장에 대해 주체의 동의를 야기하기에 충분한, 지각적으로 유사한 신경유입들의 집합"(POS, 114n; 강조는 인용자)이다. '지각 유사성'에 대해서는 장차 따로 설명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관심을 가지는 관찰문장은 실제적 현장에서 원초적 번역을 수행하는 언어학자의 관찰문장이 아니라, 인식론자의 관찰문장이다. 인식론자는 관찰문장이 왜 현장 언어학자에게, 또는 아동에게 중요한지 인식론적으로 해명하고자 한다. 언어학적 또는 의미론적 관점에서 본 관찰문장은 외부 사물에 관계하지만(POS, 114n), 인식론적 관점에서 본 관찰문장은 (이 관찰문장이 직접적으로 조건화되는) 현재의 자극작용에 관계한다. 그래서 인식론자 콰인은 관찰문장을 처음부터 명사나 술어 등으로 구성된 언어적 복합물로 간주하지 않는다. 언어로 가는 문턱으로서 관찰문장은, 처음에는, 단순부분들로 분할할 수 없는 '일어문적'(holophrastic) 표현이다. 실제로 한 낱말로 구성된 문장이든, 여러 낱말로 구성된 문장이든, 하나의 관찰문장을 일어문적으로 간주한다는 것은 관찰문장을 원숭이나 새의 울음소리, 사람의 비명 등과 같은 것으로 보는 것과 비슷하다. "일어문적으로, 관찰문장들은 동물의 울음소리들의 인간적 대응물이다. […] 각 울음소리는 본능이나 조건화에 의해서 일정 범위의 신경유입과 결부되어 있다." 이런 의미에서 관찰문장은 이론이 아직 개입되지 않은 목청에 의한 단순 반응이다(PT, 8). 일어문적으로 간주된 관찰문장은 아무 이론이나 존재론도 연루되어 있지 않으며, 그래서 사물에 대한 어떠한 개별화나 실물화도 전제하고 있지 않다. 관찰문장을 이런 식으로 디플레이션하면, 관찰문장은 (신경유입의 다발로서) 자극의미와 부드럽게 결합될 수 있을 것 같다.

이제 관찰문장의 '의미'에 대해 정의할 때가 되었다. 콰인은 관찰문장의 의미를 그것의 자극의미와 동일시한다. "관찰문장의 자극의미는, 모순의 위구심 없이, 그것의 의미를 충분히 반영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WO, 42). 왜냐하면 통상적 정의에서 관찰문장은 부수적인 정보의 차이에 의해 그것의 자극의미가 변하지 않는 경우문장이기 때문이다. 한 주체가 주어진 자극작용에 대해 목청에 의한 일련의 발화에 동의하는 이런 저런 성향을 가지고 있을 경우, 바로 그 성향은 그 발화의 의미이고, 이 때의 발화를 문자들의 나열을 통해 재현한 것이 관찰문장이다. 만일 어떤 한 순간 한 주체에게 문장 p의 자극의미와 그 순간 다른 주체에게 다른 문장 q의 자극의미가 동일하다면, 문장 p와 문장 q는 동일한 (비슷한) 의미를 지니고 있고, 이 두 문장은 번역가능하다. 즉 두 관찰문장의 자극의미가 같다면, 두 문장은 번역가능하다. "의미는, 필경, 하나의 문장이 그것의 번역과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현재 상태에서, 번역은 오직 비구두적 자극작용과의 상호관련에 의해서만 결정된다"(WO, 32). 그리고 "자극의미는, 이론적으로 말하자면, 하나의 관찰문장에 대한 올바른 번역이 보존시킨 것[이]다." 이런 식으로 콰인은 구두적 표현의 동의성, 보다 정확히 말해, '자극-동의성'(stimulus- synonymy)을 정의할 수 있게 되었다. 예컨대 원주민의 '가바가이'와 현장 언어학자의 '토끼'는 자극동의어이다. 이처럼 콰인은 '자극의미'라는 매개적 개념을 통해 신경유입에서 어떻게 관찰문장이 출현할 수 있는지를 설명하고자 했다.





4. 감정이입



많은 사람들이 언어는 사회적 체계라고 말들 한다. 그러나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를 찾기란 어렵고, 더구나 이러한 생각을 일관되게 유지하기도 또한 어렵다. 콰인은 {말과 사물}에서 선도적으로 언어의 공적 성격을 진지하게 논구하였다. 언어의 출현과 발전, 언어학습 및 언어사용 등이 공적으로 접근가능한 증거 위에 기초되어야 한다는 것은 콰인의 기본 통찰 중에 하나이다. 이 통찰은 {말과 사물}의 [머리말] 바로 첫 문장에 나타나 있다. 여기에서 그는 "상호주관적으로 입수가능한 실마리들", "사회적으로 관찰가능한 자극작용들"을 언급한다(WO, ix; 강조는 인용자). 콰인의 이러한 통찰에도 불구하고, 그의 제자 Dagfinn F llesdal는 "콰인이 자극과 반응에 집중한 나머지 언어의 공적 성격을 포기해 버렸다"고 비판했다. 그가 그렇게 비판한 이유는, 비록 자극이 경험론적으로 연구될 수 있겠지만, 그것은 마치 프레게의 '뜻'(Sinne)이 그렇듯이, 공개적으로 접근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극작용은 사회적으로 관찰될 수 없다는 점에서, 콰인의 "사회적으로 관찰가능한 자극작용"이라는 표현은 매우 이상하게 들린다. 그렇다면 콰인은 언어의 사회성을 어디에서 이끌어내는가?

앞에서 보았듯이 콰인은 처음에 자극-동의성을 통해 언어의 공공성을 설명하려 했다. 언어학자는 특정한 현장에서 정글 원주민의 발화 '가바가이'가 그 장소 그 시간에서 자신의 발화 '토끼'와 같은 자극의미를 가지기 때문에, '가바가이'는 '토끼'로 번역될 수 있다고 간주한다. 콰인은 (관찰문장의) 번역 또는 의미를 자극의미의 동일성 즉 자극-동의성으로 환원시켰다. 그의 기획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은 거의 분명하다. 그것은 현장 언어학자가 원주민의 신경말초의 격발 패턴뿐만 아니라 자신의 그것을 보거나 감지할 수 없고, 감각수용기나 수용기의 격발 패턴을 원주민과 공유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에 놓여 있다. 사정이 이렇다면, 현장 언어학자는 어떻게 원초적 번역을 수행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기실 현장 언어학자는 신경해부학의 도움을 받지 않고 이런 일을 수행할 수 있고, 원주민들은 '신경말초의 격발'이나 '자극작용' 등에 상응하는 용어를 모른 채 일상적 생활에서 유창하게 의사소통을 수행하고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콰인은 관찰문장을 자극의미 개념을 통하여 정의하는 것을 기피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제 "자극작용의 상호주관적 유사함"을 언급하지 않지 않은 채 언어의 공공성을 확보하기를 원한다(PT, 42). 그는 현장 언어학자의 번역 방법이 자극작용들 사이의 대조에 의해서가 아니라, 소위 '감정이입'(empathy; 같은쪽)에 의해서 수행한다고 말한다. 언어학자는 상상력에 의해 자기가 원주민의 입장에 위치해 있을 때 볼 수 있는 것을 투영해 내고, 그런 위치에서 자기자신이 발화하도록 이끌리는 것을 생각해 낸다. 이렇게 하여 그는 '토끼'를 떠올리게 되고, 이것이 원주민의 발화 '가바가이'에 대한 잠정적 번역으로 채택된다(같은쪽). 감정이입은 일종의 "추정적 외삽법"(PT, 38)이다. 언어학자는 주어진 자료, 예컨대 원주민의 구두적 행동들과 외부적으로 관찰가능한 환경들로부터(같은쪽), 외삽법에 의해 원주민 언어를 위한 번역매뉴얼을 구성한다. 그런데 감정이입을 도입함으로써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새로운 문제는 인간들이 어떻게 이 능력을 가질 수 있게 되었는지 설명하는 것이다. 감정이입은 언어 이전의 본능인가, 언어 이후의 이론인가?

감정이입은 인식론적 주제라기보다, 언어학적 또는 의미론적 주제처럼 보인다. 콰인은 인식론적 관심 때문에 자극작용보다 사물을 먼저 말하지 않았다. 보다 정확히 말해, 번역자는 화자의 존재론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가정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감정이입은 콰인 자신이 세운 이 규칙을 어기고 있다. 감정이입은 번역자가 화자의 "위치"(position; PT, 42)에 섰을 때 발화할 만한 것이 무엇인지 상상하는 것인데, 만일 번역자가 "위치"의 변경이 그의 발화에 미치는 영향을 알고 있지 못한다면, 그것을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번역자는 자신의 위치가 변동될 때 신경말초의 격발 패턴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알 수 없다. 언어학자가 원주민의 발화를 번역하기 위해 감정이입할 때 활용해야 하는 것은 자신의 "배향"(orientation; 같은쪽)과 시공간적 "장면"(scene; 같은쪽) 사이의 관계에 대한 상식이다. 이것은 현장 언어학자가 번역시 감정이입을 활용할 때, 외부환경에 대한 자신의 이론을 사용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처럼 감정이입은 본능이라기보다, 언어 이후의 이론이다.





5. 예정조화



감정이입은 분명히 "의사소통의 외부"(PT, 42)를 참조할 것을 요구하고 있고, 그리하여 외부환경의 공유를 가정하고 있다. 그러나 콰인에게 환경이란 외부세계의 사물이나 사건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개체화되기 이전의 다양한 자극들의 복합이다. 그는 "공유하고 있는 상황의 막연함"(같은쪽)에 난처함을 느끼고 있고, 그래서 주체의 피부 바깥의 환경, 또는 외부세계의 물리적 사물과 사건들을 원초적으로 도입하기를 원치 않는다. 그는 시종일관, 외부세계의 공유를 전제하지 않고, 의미의 객관성 내지 공공성, 또는 학문의 성공을 설명하기를 원한다. 그리하여 콰인은 다시금 자극의미의 동일성에 대해 말하게 된다. 콰인은 의미의 상호주관성을 확보하기 위해 감정이입이라는 방법을 의지하였지만, 결국 원래대로 되돌아 왔다. 다만, 관찰문장을 요구사항에 걸맞게 보다 정교하게 정의하였을 뿐이다. 달라진 것은 두 화자들에 대한 한 자극의미의 동일성을 말하기 전에, 먼저 한 화자에 대한 두 자극의미들의 동일성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관찰문장의 동의성을 한 화자에 대해 정의한 후, 그 다음 그것을 확장하여 여러 화자에 대한 동의성을 정의한다.

{말과 사물}에서 관찰문장의 정의는 두 화자에게 있어서 한 자극의미의 동일성에 의존하고 있다(WO, 43). 그러나 나중에 콰인은 [경험내용](1981)이라는 논문에서 관찰문장을 단일 화자에 대해서 정의했다. 단일 화자에 대해 정의된 관찰문장은 곧장 쉽게 한 공동체에 대한 것으로 확장될 수 있다. 말하자면, 만일 하나의 문장이 어떤 공동체에 속하는 각각의 화자에게 관찰문장이 될 때, 그 문장은 그 공동체 전체에게 관찰문장이 된다(PT, 40).



관찰문장들은 그것들의 자극의미들이 한 화자에게 동일하다면, 그에게 있어서 자극-동의적이다. 한 사람의 자극작용들과 그것들의 변종들은 사적인 것인 반면, 자극 동의성은 사회적으로 의미를 얻는다. 문장들은 각각의 일원들에게 자극-동의적이라면, 그 공동체에 대해 자극-동의적이다(PT, 44).



콰인은 보다 최근에 '자극의미' 개념을 대체하는(RE, 349), 새로운 용어 '지각적 동치성'(perceptual equivalence)을 통하여 관찰문장의 동의성을 정의한다.



두 관찰문장들은 주어진 한 주체에 대해서, 만일 이것들이 동일한 범위의 신경유입과 관련된다면 지각적으로 동치적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들이 만일 각각의 개체에 대해 지각적으로 동치적이라면, 그 공동체에 대해 지각적으로 동치적이다고 부를 수 있다(같은글, 349; 강조는 인용자).



이제 남은 문제는 한 화자에게 있어서 두 자극의미의 동일성이 만족되는 조건, 보다 진보된 용어를 사용하자면, 지각적 동치가 만족되는 조건을 명시하는 일이며, 그 조건이 만족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설명하는 일이다.

이렇게 하여 콰인은 두 화자의 한 자극작용의 동일성 또는 유사성을 말하지 않고도, 관찰문장의 상호주관성을 확보하려 한다. 그러나 이렇게 하는 것은, 그의 표현대로, 문제를 "연기한" 것에 불과하고, 두 자극작용의 조화 문제는 계속해서 그의 마음을 괴롭힌다(PT, 41).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도입하는 것이 바로 예정조화이다.

콰인은 '감정이입'에 대한 H. A. Lewis와 D. Holdcroft의 불평에 응답하면서, 이 용어가 정밀하게 사용된 것이 아니라, "일상적 용무"를 위해서 사용했으며, 그것을 기초하여 자신의 인식론이 세워진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RLH, 576). 사실, '감정이입'을 대신하여 의미의 상호주관성을 설명할 이론적 장치는 따로 있는데, 그것은 바로 "예정조화"(preestablished harmony; SS, 21)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감각수용기나 감각작용의 상호주관적 유사성과는 무관한, 지각유사성표준의 예정조화이다"(PTF, 160; 강조는 인용자). 그리하여 "나의 초기의, 그리고 지지될 수 없는, 자극의미의 상호주관적 공유를 정말로 대체했던 것은 신경유입들에 대한 우리의 선천적 지각유사성표준의 예정조화이다"(RLH, 576; 강조는 인용자). 콰인의 예정조화는 라이프니츠의 예정조화에서 신의 개입을 뺀 것이다(같은쪽). 콰인은 이 지각유사성표준의 예정조화를 이미 {지시의 근원들}(1974)에서 어렴풋하게나마 선보였다.

콰인의 '지각유사성'(perceptual similarity)은 두 지각의 유사성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두 항목들이 지각적으로 유사할 때 사용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지각유사성'은 어떤 항목들 사이의 관계를 가리키는가? 지각유사성은 대략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한 주체가 어떤 두 상황에서 동일하게 반응할 때, 두 상황은 그에게 지각적으로 유사하다(RR, 16-19; SS, 17-21). 콰인은 지각유사성의 관계항들이 외부세계의 사물이나 사건들이 아님을 강조한다. 지각유사성이 적용되는 항목은, 이러 저러한 상황들, 광역자극들, 정확히 말하자면, 근촉적 자극작용들, 또는 주체의 신경유입들이다(PTF, 161; SS, 17; RE, 348; RLH, 576). 그리고 각 개인은 두 신경유입의 지각유사성을 판가름하는 기준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을 '지각유사성표준'(standard of perceptual similarity)이라 하며, 이 표준은 '선천적'(innate; RR, 19)이다. 여기서 선천성은 '보편성'이나 '필연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선천성 면역결핍증'에서 사용되는 '선천성'이다. 어떤 것이 '선천적'이란 '해부학적으로 미리 장착된' 또는 '유전 정보 속에 수록된'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하면 된다.

지각유사성표준의 예정조화는 두 개인들의 지각유사성표준들이 마치 잘 맞추어 놓은 두 시계처럼 조화롭게 작동되는 것을 말한다. 가령 정글 원주민은 어떤 두 상황에서 동일하게 "가바가이"를 발화하는 성향을 지니고 있고, 현장 언어학자 역시 그 두 상황에서 동일하게 "토끼"를 발화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 보자. 이때 두 상황은 정글 원주민의 지각유사성표준에 비추어 볼 때, 지각적으로 유사하고, 현장 언어학자의 표준에서 비추어 보아도 역시 지각적으로 유사하다. 이 경우, 두 주체의 지각유사성표준은 두 상황에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것은 '미리 설정된' 신비로운 조화이다. 콰인은 지각유사성표준의 예정조화를 다음과 같이 간단하게 정리한다.



만일 두 개체들이 두 사건들의 각각을 목격한다면, 그리고 두 개체들 중 하나가 그 두 경우들에 대해 자신의 [신경]유입들이 지각적으로 유사하다는 것을 발견한다면, 다른 개체도 마찬가지로 통상 그렇게 할 것이다(RLH, 576).



또는 "만일 두 장면이 한 목격자에게 지각적으로 유사한 광역자극들을 격발한다면, 그 두 장면은 다른 목격자에게도 그와 비슷하게 격발하려는 경향이 있다"(SS, 21).





6. 나오는 말



콰인의 자연화된 인식론이 관심을 가지는 것은 "자극으로부터 학문까지"의 연속적 연결로부터 자극과 학문 사이의 "증거적 지지 관계"(PT, 2) 또는 "증거의 흐름"(PT, 41)을 해부 및 추적하는 것이다. 콰인은 어떻게 비언어적 신경유입에서 언어적 의미가 생성될 수 있는지 심혈을 기울여 해명하고자 했다. 그에게 언어의 출현을 설명하는 것은 인식론이나 존재론을 포함한 다양한 이론들의 출현을 설명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자극작용은 공적으로 확인될 수 없는 사적 상태이기 때문에, 이것으로부터 의미의 공공성 또는 상호주관성을 도출해 내는 것은 쉬운 프로젝트가 아니다. 콰인은 자극에서 언어로 가는 중간다리로서 관찰문장을 도입하였데, 이것은 언어와 이론으로 들어가는 "쐐기"(wedge; PT, 39)이다. 그리하여 응당 콰인의 문제는 관찰문장들이 공유하고 있는 경험적 의미를 명시적으로 정의하는 일로 집약된다. 이 정의를 고안함에 있어서, 콰인식 인식론이 수행해야 하는 핵심 과제는 관찰문장의 상호주관성(의미, 번역, 학습)을 정립하는 일이다. 콰인이 최종적으로 제시한 시나리오는 신경유입들에 대한 지각유사성표준의 예정조화를 도입하는 것이다.

라이프니츠는 각 단자가 다른 단자들과 관계 맺지 않고 순수하게 내적 본성에 의해 살아가지만, 이러한 독립적 단자들로 구성된 세계가 무질서하지 않다는 것을 주장하고 싶었다. 그는 신에 의한 예정조화를 통해 조화로운 우주를 얻을 수 있었다. 반면 콰인은 우주에 대한 조화로운 인식을 확보하기 위해 자연(선택)에 의한 예정조화를 도입한다. 데이빗슨이 비판했던 것처럼, 비록 콰인 인식론이 일종의 방법론적 유아론을 채택함으로써 회의주의와 상대주의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지만, 그는 인간의 세계인식 또는 세계구성이 전적으로 무질서하다고 주장하기를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콰인은 자신의 예정조화 시나리오를 '학문적으로'(scientifically) 확립하기 위해 다시 한번 자연주의적 방책을 사용한다. 그것은 바로 진화론을 끄집어들이는 것이다. 콰인에 의하면, 지각유사성표준의 예정조화는 "한층 더 심층적인, 그러나 보다 불완전한 예정조화"(PTF, 160)로부터 유래한다. 이 예정조화는 '지각유사성과 환경 사이의 예정조화'인데, 콰인은 이것을 자연선택에 의해 설명한다(RR,19; SS; 21; PTF, 161).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는 자연선택은 환경의 추세와 잘 조화하도록 한 종족의 지각유사성표준을 맞추어 나간다(RLH, 576). 라이프니츠의 예정조화는 원래 정신의 표상 계열과 세계의 변화 계열 사이의 예정조화였다. 콰인이 두 주체의 지각유사성표준들 사이의 예정조화가 한 주체의 지각유사성표준과 환경 사이의 예정조화에 근거하고 있다고 말하는 순간, 그는 라이프니츠식 예정조화에 보다 근접하게 된다. 그러나 라이프니츠식 예정조화는 신에 의해 확립된 것이지만 콰인의 그것은 자연선택에 의해 확립된 것이라는 점에서, 두 예정조화의 결과는 판이하다.

우리는 콰인에게 다윈 진화론이 거의 제일철학의 지위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제일철학은 모든 형이상학을 녹여 없애 버리는 독특한 성격을 지니고 있는데, 이 성격은 콰인의 자연주의 인식론과 매우 잘 어울린다.



자연선택은 형이상학[을 녹이는] 다윈의 용매이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인, 그리고 목적론을 동력인 속으로 용해시켰고, 이제 라이프니츠의 예정조화 역시 용해시킨다(PTF, 161).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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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Quine on Preestablished Harmony



Kim, Myeong-Seok(Kyungpook National Univ.)



Logical empiricism, as one of trends of 20 century philosophy, can be thought as the attempt that, through inquiring logically and empirically into the nature of human language, tries to explicate the nature of his knowledge. W. V. Quine known as the last logical empiricist, has concentrated on defining meanings of linguistic expressions in terms of nonsemantic one. In this definition, the most crucial problem is to establish the intersubjectivity of meanings. To solve this problem, Quine employes a preestablished harmony of standards of perceptual similarity. The aim of this paper is to trace the development of his inquires the terminal of which he has proposed this preestablished harmony.

In order to explaining how linguistic meanings can be emerged from nonliguistic neural intakes, Quine at first introduces holophrastic observational sentences as intermediary bridges between neural intakes and natural language. Then he explicitly defines the empirical meanings being shared by these observational sentences: the meaning of an observational sentence is just its stimulus-meaning. Here the stimulus-meaning of a sentence for a subject amounts to his disposition to assent to or dissent from the sentence in response to present neural intake. According to Quine, it is by virtue of subject's standard of perceptual similarity that the subject finds the similarity of two neural intakes, where standards of perceptual similarity are given in part innately in part by experience to each subject. Quine's preestablished harmony is the thesis that two standards of perceptual similarity of two subjects cooperate harmoniously just as two well- adjusted clocks.





Key Words : Quine, Leibniz, preestablished harmony, meaning,

intersubjectivi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