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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현대영미철학

콰인과 분석/종합 구별


콰인과 분석/종합 구별


한 상 기*전북대학교


1. 머리말


전통적 인식론에서 이성주의와 경험주의는 인간 지식의 원천 및 정당화 근거를 놓고 첨예한 논쟁을 벌여 왔다. 그 논쟁의 과정에서 우선 이성주의는 인간 지식의 주요 원천이 경험이 아닌 순수 추론(이성)이라고 주장한다는 식으로 모호하게 규정되는 수가 많다. 그런가 하면 경험주의도 인간 지식의 주요 원천이 경험뿐이라고 주장한다는 식으로 규정된다. 하지만 양쪽에 대한 이런 식의 규정은 이성주의 대 경험주의 논쟁의 초점을 정확히 이해하는 데 별 도움이 못된다. 논리학이나 수학의 명제들에 대한 지식은 경험의 도움 없이도 가능한 것처럼 보이며, 지각에 근거한 많은 지식들은 경험적 근거가 반드시 필요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성주의 대 경험주의 논쟁의 핵심에는 무엇보다도 진술들에 대한 분석/종합, 선천/후천, 필연/우연 진술의 구별이 자리잡고 있다. 이 구별들은 통상 각기 의미론적, 인식론적, 형이상학적 구별이라고 불린다. 경험주의자들은 진술들에 대한 이 세 가지 구별 쌍에서 세계에 관한 지식 이론이 두 번째 집합에만 적용된다고 주장한다. 세계에 관한 지식은 종합진술에 대한 지식이고, 그 지식을 우리는 후천적으로 알게 되며, 그 진술은 기본적으로 우연진술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경험주의자는 종합진술, 경험을 통해 후천적으로 알려지는 진술, 우연진술이 서로 외연이 같다고 본다. 경험주의자에 의하면, “종합진술 = 후천적으로 알려지는 진술 = 우연진술”이라는 도식이 성립한다는 것이다. 이성주의자는 이를 부정한다. 그래서 이성주의자들은 이를테면 선천적으로 알려지는 종합진술, 후천적으로 알려지는 필연진술이 있을 수 있다는 식의 주장을 하게 된다. 특히 칸트 이후 선천적 종합진술의 존재에 대한 동의 여부는 이성주의와 경험주의를 가르는 중요한 구별 기준으로 인정되어왔다.
진술들에 대한 이 세 구별 중에서 가장 논란이 되었던 구별은 분석/종합 구별이었다. 20세기 들어와 콰인, 굿맨, 화이트 등을 필두로 하여 여러 철학자들이 분석/종합 구별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였는데, 그런 공격의 목표는 대체로 경험주의자들의 이론을 반박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들은 세계에 관한 지식이 후천적 종합진술에 대한 지식이라는 경험주의자들의 이론에 분석진술과 종합진술이 선명하게 구별된다는 신조가 전제로 깔려 있으며, 이 신조는 더 나아가 선천/후천, 필연/우연의 구별과도 연관되어 있다고 본다.
경험주의자의 이론을 직접적으로 반박하려면, 모든 종합진술의 집합을 확정짓고 그 집합의 원소를 이루는 낱낱의 진술들이 모조리 다 후천적으로 알려지는 진술임을 일일이 검사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모든 종합진술이 다 후천적으로 알려지는 진술이면 경험주의가 옳다는 게 입증되고, 하나라도 후천적으로 알려지는 진술이 아닌 진술이 있으면 경험주의가 그르다는 게 입증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일은 애초에 불가능한데, 우리가 종합진술 집합의 외연을 확정지을 수 있을 정도로 그 집합이 유한하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분석/종합 구별에 대해 공격하는 철학자들은 경험주의에 대한 직접적 반박보다는 간접적 반박이라는 전략을 채택한 것으로 보인다.
이 글은 분석/종합 구별에 대한 공격, 특히 콰인의 공격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려는 게 목적이다. 과연 분석진술과 종합진술이 선명하게 구별된다는 신조가 경험주의의 필요조건인가? 두 진술이 선명하게 구별되는 게 아니라는 콰인의 지적이 과연 올바른가? 콰인의 지적에도 불구하고 이 구별을 유지해야 할 어떤 근거들이 있는가? 이런 점들이 이 글의 주요 검토 사항이 될 것이다.



2. 분석성 원리와 경험주의


우선 분석진술과 종합진술이 선명하고 예리하게 구별된다는 신조를 편의상 분석성 원리(principle of analyticity)라 하자. 이 원리는 베르크만(G. Bergmann)의 말로는 경험주의의 초석이고, 콰인의 말로는 경험주의의 근거없는 두 독단 중 하나이다.
이 분석성 원리를 부정하는 일의 귀결이 무엇인지 고찰하기 전에 먼저 “분석적”(analytic)이란 말이 애매하게 사용되기 때문에 몇 가지 의미를 정리할 필요가 있다. 가장 넓은 의미로 사용되면 구성 용어들의 의미 때문에 옳은 진술은 모두 “분석진술”이라 불린다. 이보다 좁은 의미로는 논리학의 진리들을 “분석진술”이라 하는 수도 있고, 그밖에 동의어에 동의어를 대입함으로써 논리학의 진리로 환원시킬 수 있는 진술도 “분석진술”이라 불린다. 또 좀더 좁은 의미에서 “분석진술”은 논리적 진술과 대비시켜 사용되기도 한다. 팝(A. Pap)은 “분석적”이란 말의 이러한 여러 가지 의미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① 광의적 분석진술(broadly analytic statement) - 구성 용어들의 의미에 의해 옳은 진술.
② 명시적 분석진술(explicitly analytic statement) - 논리적 진리의 대입 실례들.
③ 함축적 분석진술(implicitly analytic statement) - 동의어를 대치시킴으로써 명시적 분석진술로 환원시킬 수 있는 진술.
④ 엄밀한 분석진술(strictly analytic statement) - 명시적 분석진술이나 함축적 분석진술.

②의 명시적 분석진술의 예로는 이를테면 논리적 진리 “p 또는 ~p”의 대입실례인 “비가 오고 있거나 오고 있지 않다” “소진이는 학교에 가거나 가지 않았다” 등을 들 수 있다. 또 “p는 p다”의 대입실례인 “총각은 총각이다” “김치는 김치다” 등도 명시적 분석진술의 예일 것이다. “총각은 미혼의 성인 남자이다”는 ③의 함축적 분석진술의 예이다. “미혼의 성인 남자”가 “총각”이라는 동의어로 대치되면 이 진술은 “총각은 총각이다”가 되어 ②의 명시적 분석진술로 바뀌게 되기 때문이다.
④의 엄밀한 분석진술은 ②나 ③에 속하는 진술들이면 다 그 실례인데, 그런 의미에서 위에서 예로 든 진술들은 모두 엄밀한 분석진술이다. 게다가 위 진술들은 모두 의미에 의해 옳다고 할 수 있기 때문에 ①의 광의적 분석진술이기도 하다. 엄밀한 분석진술이 아닌 광의적 분석진술의 예로는 흔히 “동일한 관찰자에게 붉으면서 동시에 녹색인 대상은 있을 수 없다”와 같은 진술이 거론된다.
“분석진술”이 이처럼 서로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되면, 분석성 원리도 그에 따라 달리 해석되게 될 것이다. “광의적 분석성 원리”는 광의적으로 분석적인 진술과 광의적으로 종합적인 진술이 선명하게 구별된다는 원리가 되고, 명시적 분석성 원리는 명시적으로 분석적인 진술과 명시적으로 종합적인 진술이 선명하게 구별된다는 원리가 되며, 그런 식으로 해서 함축적 분석성 원리, 엄밀한 분석성 원리가 있게 될 것이다.
따라서 어떤 철학자가 분석/종합 구별을 반대한다고 했을 때, 그 철학자가 이 여러 분석성 원리들 중 어떤 원리를 공격했는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콰인의 경우에는 일단 함축적 분석성 원리를 거부하고 있다. 게다가 명시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콰인이 명시적 분석성 원리까지도 거부하고 싶어했다는 것은 분명한 것처럼 보인다. 또 콰인은 모든 광의적 분석진술이 엄밀한 분석진술이라고 가정한 것처럼 보이며, 따로 거부할 광의적 분석성 원리가 그에게는 없었던 것처럼 보인다. 설령 광의적 분석성 원리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의 실용주의를 감안할 때 그는 그 원리 역시 거부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제 분석성 원리를 어떤 식으로 해석하든 이 분석성 원리와 경험주의의 관계를 보자. 분석진술은 세계에 관한 진술이 아니라 언어적 진리나 논리적 진리를 진술하며, 그래서 하나마나할 정도로 뻔한 진술이다. 반면 종합진술은 세계에 관한 진술이며, 그래서 경험적 의미를 갖는다. 분석진술과 종합진술은 상호 배척적이며, 둘 사이에 중간 지점이 없다. 만일 어떤 진술이 분석진술이 아니라면 그 진술은 종합진술이며, 종합진술이 아니라면 그 진술은 분석진술이다. 경험주의자에 따르면, 분석진술은 선천적으로 알 수 있고, 종합진술은 선천적으로 알 수 있는 게 아니다. 따라서 경험주의자들에는 선천적 종합진술이란 없다. 어떤 진술이 선천적으로 알려진다면 분석진술이고, 종합진술이라면 후천적으로 알려지는 진술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이성주의자들은 선천적 종합진술이 있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경험주의자들이 선천적 종합진술이 없다고 주장할 때, 그들은 세계에 관한 지식이라면 어쨌든 경험적 근거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말하자면 경험주의자들이 보기에 선천적 종합진술이 있다는 이성주의자들의 주장은 비경험적이고 신비스러운 방식으로 세계에 관한 진리들을 직관하거나 통찰하는 능력을 가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경험주의자들의 진정한 의도는 이성적 통찰이나 직관을 통해 세계에 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는 이성주의자들의 생각을 거부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결국 경험주의와 이성주의의 논쟁은 세계에 관한 인간의 인식 능력을 놓고 벌이는 의견 차이에서 비롯된 논쟁이라 할 수 있다. 경험주의자는 인간이 세계에 관한 지식을 획득할 때 근본적으로 한 가지 능력, 즉 경험을 통해 획득한다고 본다면, 이성주의자는 경험이라는 능력 외에 이성 능력을 천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이성주의와 경험주의의 논쟁은 인간의 인식 능력이 한 가지냐 두 가지냐의 논쟁이 된다.
그렇지만 이 대목에서 경험주의와 분석성 원리의 관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한 가지 지적할 것은 어떤 철학자가 분석성 원리를 거부한다 할지라도 여전히 “경험주의자”로 불릴 수 있다는 것이다. “경험주의”란 용어도 “분석적”이란 말과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닐 수 있다. 그래서 “경험주의”는 특정 신조들의 체계에 대한 이름으로서가 아니라 어떤 전통에 대한 이름으로 사용될 수 있으며, 분석성 원리를 거부했던 콰인, 굿맨, 화이트 등도 이런 의미에서 확실히 경험주의자라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경험주의자가 아닌 철학자들 가운데서도 많은 철학자가 분석/종합 구별과 비슷한 구별을 제시해왔다는 사실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플라톤은 일찍이 마치 흄이 관념들의 관계와 사실을 구별한 것처럼 관념의 영역과 사실의 영역을 구별하였고, 라이프니츠도 이성의 진리와 사실의 진리를 구별하였다. 따라서 경험주의와 비경험주의의 차이는 단순히 분석성 원리를 승인하느냐 거부하느냐의 차이가 아니다. 경험주의자라도 이 원리를 거부할 수 있고, 비경험주의자라도 이 원리를 승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경험주의자와 비경험주의자가 이 구별을 어떻게 사용했는가에 있다. 플라톤, 데카르트, 라이프니츠와 같은 이성주의자들은 사물의 영역에 관한 지식이 관념의 영역에 대한 명상, 즉 이성만으로 얻어질 수 있다고 믿었다. 반면에 경험주의자들은 이를 부정한다. 경험주의자들의 이러한 믿음은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선천적 종합진술이 없다는 말로 표현될 수 있다. 헴펠과 파슈(A. Pasch)는 분석진술과 종합진술이 선명하게 구별된다는 분석성 원리로부터 선천적 종합진술이 없다는 이 신조를 구별하여 경험주의 원리(principle of empiricism)라 불렀다.
따라서 분석성 원리와 경험주의 원리는 일단 구별할 필요가 있다. 비록 여러 철학자들이 분석성 원리가 경험주의의 기본신조, 초석, 또는 독단이라고까지 말했다 하더라도, 이 두 원리는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분석성 원리는 경험주의 원리의 필요조건이 아니며, 경험주의 원리 역시 분석성 원리의 필요조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분석성 원리를 어떻게 해석하느냐, 또 경험주의 원리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두 원리 사이에 의미있는 어떤 관계를 도출해낼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여기서는 두 원리가 서로의 필요조건이 아니라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만으로 충분한데, 그것은 분석성 원리를 경험주의의 필연적 전제가정으로 간주하고 분석성 원리를 공격함으로써 경험주의를 공격할 수 있다고 보는 철학자들의 전략이 너무 낙관적이었음을 드러내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분석성 원리는 경험주의 원리의 필요조건이 아니기 때문에 분석성 원리가 무너진다고 해도 경험주의 원리는 그대로 유지할 수 있다.



3. 분석/종합 구별에 대한 콰인의 공격


이제 분석성 원리 자체로 관심을 돌려 분석진술과 종합진술의 선명한 구별 문제를 살펴보기로 하자. 분석성 원리에 대한 공격은 콰인, 굿맨, 화이트 등 여러 철학자들에 의해 행해졌지만 여기서는 콰인으로 한정시켜 다루기로 하겠다.


3.1 분석성에 대한 표준적 정의들 비판

콰인은 “분석진술”에 대한 통상적 정의를 살핀 뒤에 그 정의들을 버린다.

정의 1 진술 S는 분석적이다 iff S는 모든 가능 세계에서 옳다.

이 정의는 문자 그대로 단순한 은유에 불과하며, 그래서 다음과 같은 정의로 다시 표현할 수 있다.

정의 2 진술 S는 분석적이다 iff S가 그르다는 게 가능하지 않다.

그르다는 게 가능하지 않은 진술이라는 개념은 분석성 자체만큼이나 불명료하며, 그래서 이 정의는 설명적 가치가 적다. 다음 정의 3 역시 설명적 가치가 적기는 마찬가지다. 모순이라는 개념도 분석성 만큼 불명료하기 때문이다.

정의 3 진술 S는 분석적이다 iff S의 부정진술이 자체모순이다.

그 다음에 콰인은 칸트에게서 비롯된 정의를 검토한다.

정의 4 진술 S는 분석적이다 iff S는 이미 개념적으로 주어에 포함된 것을 주어에 귀속시킨다.

콰인은 “포함”이라는 개념이 은유라는 점과 이 정의가 주어-술어 형식의 진술에만 적용된다는 점을 들어 이 정의에 반대한다. 그는 이어서 칸트의 정의 배후에 숨어 있는 의도를 살리고 정의 4에 대한 두 가지 비판을 피하는 정식화를 제시한다.

정의 5 진술 S는 분석적이다 iff S는 자신의 의미에 의해 옳으며 사실과 무관하게 옳다.

이 정의와 관련하여 콰인은 “의미”를 어떤 종류의 것, 즉 “불명료한 중간적 실재(entities)”를 언급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고유명, 추상적 단칭 용어는 물론이고 일반 용어나 일반 술어의 경우에도 의미와 언급대상을 구별하고 나면, “의미”는 불필요하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의미 이론이 언급 이론과 분리되면, 의미론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언어 형식들간의 동의성과 진술들간의 분석성이 되는데, 그렇게 될 경우에 “의미”라는 모호한 중간적 실재는 폐기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제 의미 이론이 동의성, 분석성, 그리고 동의성과 분석성에 의거해 정의될 수 있는 다른 어떤 개념들에 대한 이론으로 환원되고, 논리적 진리와 동의성 개념이 주어지면 “분석진술”은 다음과 같이 정의될 수 있다.

정의 6 진술 S는 분석적이다 iff S는 동의어에 동의어를 대입함으로써 논리적 진리로 전환된다.

이 대목에서 콰인은 분석진술을 두 종류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첫 번째 종류의 진술은 “어떤 미혼 남자도 미혼이다”와 같은 진술로서 흔히 논리적 진리라 불리는 종류의 진술이다. 다른 한 종류는 “어떤 총각도 미혼이다”와 같은 진술로 동의어에 동의어를 대입함으로써 논리적 진리로 전환되는 종류의 진술이다. 여기서 콰인은 두 번째 종류의 진술을 분석진술이라 할 때 우리가 “분석성” 만큼이나 명료화될 필요가 있는 “동의성” 개념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두 번째 종류의 진술의 특징을 적절히 규정하지 못하며, 그로 인해 분석성 일반의 특징도 제대로 규정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한다.


3.2 동의성에 의거한 정의 비판

콰인에 의하면, 동의성은 분석성 만큼이나 문제가 많은 개념이다. 따라서 동의성에 의거해 분석성을 정의하려는 시도는 실패로 돌아간다.
우선 콰인은 동의성이 무엇인지 해명하기 위해 동의성에 대해 다음 네 유형의 정의를 살핀다.

① 정의에 의거한 상호 교환가능성
② 진리치 보존에 의거한 상호 교환가능성
③ 분석성에 의거한 상호 교환가능성
④ 확증에 의거한 상호 교환가능성

① 정의에 의거한 상호 교환 가능성.
우선 ①의 정의에 의거한 상호 교환가능성부터 보자. 만일 어떤 표현 E1이 다른 표현 E2로 정의된다면, E1은 E2와 동의어라고 말해진다. 그래서 두 표현이 동의적이라는 것은 정의에 의해 두 표현을 상호 교환해서 사용할 수 있다는 말이 될 것이다. 하지만 정의라는 것은 무엇인가? 두 표현이 동의어로 정의된다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발견했는가? 여기서 콰인은 세 종류의 정의를 구별하여 하나씩 검토한 다음, 정의가 동의성 해명의 기초가 될 수 없다고 결론짓는다.
첫째로 사전적 정의는 동의성이 관찰되는 표현들을 사전 편집자가 보고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사전 편집자가 정의를 제시하기 이전에 이미 두 표현이 사람들 사이에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었고, 그것을 사전 편집자가 보고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사전적 정의를 동의성의 기초로 삼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으로 인정될 수 없다.
둘째로 카르납이 말하는 해명적 정의(explication)는 기존의 동의어들을 보고하는 데 제한되지는 않지만, 동의성의 기초가 될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해명의 목적은 피정의항을 명백한 동의어로 바꾸어 쓰는 것만이 아니라 피정의항의 의미를 보충하고 다듬어서 실질적으로 피정의항을 개선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용어에 대한 해명은 그 용어의 의미를 변화시킨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명의 적절성을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은 이전 의미의 어떤 요소가 새로운 의미에 이월되어야 한다는 것이 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해명의 결과는 적어도 어떤 맥락에서는 이전의 용어와 동의적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해명적 정의도 동의성을 해명하기 위한 기초가 될 수 없다.
셋째로 약정적 정의는 순전히 생략을 위해 명백한 약정을 통해 새로운 표기법을 도입하는 것이다. 이 정의는 선언을 통해 동의성 관계를 창조한다. 콰인에게는 이 정의가 가장 명료한 정의이다. 하지만 자연언어 표현을 특징짓는 문제는 대부분의 경우에 약정적 정의에 의존하지 않는다. 따라서 약정적 정의도 동의성 해명의 기초가 될 수 없다.

② 진리치 보존에 의거한 상호 교환가능성
콰인이 두 번째로 살피는 동의성 정의는 진리치 보존에 의거한 상호 교환가능성이다. 두 언어 표현이 동의어라는 것은 모든 문맥에서 두 표현이 진리치에 아무런 변화없이 서로 교환해서 사용될 수 있다는 말이다. 이 정의에 대해 콰인은 우선 두 가지 제약조건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첫째로 동의성에 대한 진리치 보존 시험은 합성어나 인용부호 안에서 나타나는 낱말에 적용되지 않도록 제한을 가해야 한다. “총각김치”나 “‘총각’은 두 글자이다”와 같은 맥락에서는 “총각”과 “미혼의 성인 남자”가 동의어라 할지라도 서로를 대치할 수 없다.
둘째로 진리치 보존 상호 교환가능성 시험은 인지적 동의성(cognitive synonymy)에 대한 시험이지 “완전한 동의성”(full synonymy)에 대한 시험이 아니다. 콰인은 인지적 동의성을 완전한 동의성에서 “심리적 연상과 시적 특성”을 뺀 것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인지적 동의성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말할 수 없지만, 대체로 동의어에 동의어를 대입함으로써 어떤 분석진술이든지 논리적 진리가 되도록 만들어주는 그런 동의어이다. 따라서 분석성을 가정하면, 두 표현(“총각”과 “미혼의 성인 남자”)이 인지적으로 동의어라는 것은 “모든 그리고 오직 (총각)만이 (미혼의 성인 남자)이다”가 분석진술이라는 말과 같다.
그렇다면 문제는 다음과 같다. 즉 진리치의 변화 없는 상호 교환가능성이 인지적 동의성에 대한 충분조건인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은 현재 고려중인 언어의 유형에 달려 있다. 내포적 언어, 즉 예를 들어 “필연적으로”라는 표현을 충분히 많이 포함하고 있는 언어에서는 진리치 보존 상호 교환가능성이 인지적 동의성의 충분조건이다. 왜냐하면 다음의 뻔히 옳은 진술을 생각해 보자.

(1) 필연적으로 모든 그리고 오직 총각만이 총각이다.

두 번째 “총각” 표현을 “미혼의 성인 남자”로 대치시키면, 다음 진술을 얻게 된다.

(2) 필연적으로 모든 그리고 오직 총각만이 미혼의 성인 남자이다.

이 진술 또한 옳다. 대치시킨 결과 진리치는 그대로 보존되었다. 그러나 (2)가 옳다고 말하는 것은 (3)이 분석진술이라고 말하는 것이나 똑같다.

(3) 모든 그리고 오직 총각만이 미혼의 성인 남자이다.

그리고 (3)이 분석진술이라면, “총각”과 “미혼의 성인 남자”는 위에서 진술한 대로 동의어이다. 시험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지지만, 이 시험은 필연성 개념을 미리 전제하기 때문에 분석성 개념을 명료화시키지 못한다. 필연성은 다시 분석성을 미리 전제하게 되는데, 왜냐하면 “필연적으로”라는 표현은 분석진술에 적용될 때, 그리고 오직 그 때만 옳은 진술을 산출하는 표현으로 설명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포적 언어에서 진리치 보존 상호 교환가능성은 인지적 동의성의 충분조건임이 발견되지만, 분석성 개념을 명료화하기 위해 동의성에 대한 설명을 제시하면서 이 언어에 호소하는 것은 불만족스럽다.
외연적 언어는 “필연적으로”처럼 양상 부사 같은 장치가 없다. 콰인은 외연적 언어를 똑같은 대상에 적용되는 임의의 두 술어가 진리치의 변화 없이 상호교환가능한 그런 언어로 설명한다. 외연적 언어의 실례로 그는 진리함수적이면서 다음 네 종류의 표현을 포함하는 언어를 든다. (1) 개체 변항, (2) 개체를 불변화사로 간주하는 술어, (3) 보통 연결사, (4) 양화사. 똑같은 외연을 갖는 임의의 두 용어는 그런 언어에서 진리치의 변화 없이 대치가능하므로, 진리치 보존 시험은 그런 유형의 언어에서 인지적 동의성의 충분조건이 아니다. 이렇게 해서 진리치 보존에 의거한 정의는 내포적 언어와 외연적 언어 모두의 경우에 적절한 설명을 제공하지 못한다.

③ 분석성에 의거한 상호 교환 가능성
콰인이 세 번째로 살피는 동의성 정의는 분석성에 의거한 상호 교환가능성이다. 두 개체명사는 “ = ”로 결합되는 동일성 진술이 분석진술이라면 동의어라고 할 수 있다. 또 두 술어는 변항들에 적용했을 때 보편양화된 쌍조건문이 분석진술이라면 동의어라고 할 수 있다. 두 진술은 “만일 그리고 오직 그 경우에만”으로 두 진술을 결합해서 이루어진 쌍조건문이 분석진술이라면 동의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두 표현은 분석성 보존 상호 교환가능하다면, 동의적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만일 “A = A”라는 분석진술에서 나타나는 한 “A”를 분석성의 손실없이 “B”로 대치시킬 수 있다면 “A”와 “B”는 동의적이다.
그러나 “동의성”을 이런 방식으로 살피는 것은 막다른 골목에 처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우리가 동의성 개념을 살피는 것은 분석성 개념을 명료화하기 위해서인데, 동의성 개념을 살피면서 도로 분석성 개념에 의거한다는 것은 순환적 정의를 하려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④ 확증에 의거한 상호 교환가능성
콰인이 네 번째로 살피는 동의성 정의는 의미 검증이론에 의거한 방식이다. 이 방식에 따르면, 두 진술이 똑같은 방식으로 검증되거나 확증되면 두 진술이 동의적이라고 할 수 있다. 퍼스 이후로 의미 검증이론은 어떤 진술의 의미가 그 진술을 확증하거나 확인시켜주는 방법이라고 말해 왔으며, 그래서 의미 검증이론은 진술들이 경험적 확증 방법에서 볼 때 유사할 경우, 그리고 오직 그 경우에만 그 진술들이 동의적이라고 말한다. 이 방식은 일반적으로 언어 형식들이 인지적 동의어임을 설명하려는 게 아니라 진술들이 인지적 동의어임을 설명하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분석성은 진술들의 동의성 및 논리적 진리 개념을 통해 간단히 정의될 수 있다.
그러나 의미 검증이론 또는 확증이론은 환원주의를 전제가정한다. 진술이 동의적이라는 것은 경험적 확증 방법이 유사함을 말한다. 이때 유사한 것으로 비교되어야 할 확증 방법이란 무엇인가? 달리 말해서 확증에 기여하거나 실패하게 되는 경험과 한 진술 사이의 관계는 무엇인가? 그 관계에 관한 입장은 그것이 직접 보고의 일종이라고 주장하는 입장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입장은 극단적 환원주의이다. 그런데 이러한 환원주의는 콰인이 보기에 아무런 근거없는 독단일 뿐이다. 따라서 의미 검증이론에 의거하여 동의성을 정의하려는 시도도 실패로 돌아간다.

이렇게 하여 콰인은 분석성과 동의성에 대한 통상의 정의들이 불만족스럽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어떤 정의는 단순히 은유에 불과한 것으로 밝혀지고, 좀더 유망해 보이는 다른 정의들은 분석성 개념 자체만큼이나 명료화할 필요가 있는 개념에 의존하거나 문제의 해결을 회피하는 순환적 정의임이 드러난다. 그런데 여기서 콰인은 “분석진술”에 대한 만족스러운 정의가 없다는 사실로부터 분석진술과 종합진술이 구별되지 않는다는 극단적 결론을 끌어낸다. “어쨌든 갈라야 할 그러한 선명한 구별이 존재한다는 주장은 경험주의자들의 비경험적 독단이자 일종의 형이상학적 신앙”이라는 것이다.
이제 분석진술과 종합진술의 구별에 대한 콰인의 이러한 공격을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동의성과 분석성에 대한 전통적 설명들은 만족스럽지 못하다. 둘째 분석진술과 종합진술은 구별해야 할 차이가 없다. 셋째 자연언어에서 동의성과 분석성은 적절하게 해명되었을 때 결국 정도 개념이 될 것이다.



4. 명료화 요구에 대한 검토


이제 콰인이 분석성 개념에 대해 요구하는 명료화의 수준에 대해 검토해보자. 우선 그가 분석성 개념에 대한 만족스러운 해명이 갖추어야 할 요건으로 무엇을 요구하는가가 분명하지 않다는 사실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그는 이 개념이 명료화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지만, 명료화 작업은 여러 가지로 진행될 수 있기 때문이다.
크게 보아 콰인의 생각에 대해서는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첫 번째의 좀더 강한 해석은 그가 “분석진술”에 대해 형식적 정의를 요구한다는 것인데, 이 형식적 정의는 의심스런 개념을 피하면서 모든 언어를 망라하여 “분석진술”을 정의한다는 의미에서 일반적이랄 수 있다. “분석적”이라는 용어는 “동의적” “자체모순적” “그르다는 게 가능하지 않은” “필연적으로” “의미” “내포” “의미론적 규칙”과 같은 용어들을 포함하는 상호 정의가능한 용어들의 가족에 속한다. 분석성 가족을 이루는 이 성원들 모두는 각자의 “내포”와의 연관 때문에 “내포적 용어”라고 할 수 있다. 콰인은 이 용어들 모두를 불명료한 것으로 거부하였다. 그러면 “분석진술”에 대한 정의는

S는 분석적이다 iff ........

라는 형식을 취하는데, 의심스런 개념을 피해야 한다는 조건으로부터 이 정의는 비순환적이어야 한다는 결론이 따라나온다.
콰인의 생각에 대한 두 번째의 해석은 좀더 약한 것이다. 이 해석은 그가 “분석적”에 대한 형식적 정의가 아니라 기준만을 요구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 기준은 분석진술과 비분석진술을 구별하는 데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콰인에게서는 동의성이나 분석성에 대해 행동주의적 기준의 요구를 강화시켜온 경향이 보인다. “실존과 필연성에 관한 글”(1943)에서 그는 동의성 관계가 “심리 용어나 언어적 용어로 표현되는 정의나 기준을 요구한다”고 말하였고, “경험주의의 두 독단”(1951)에서는 분석성 개념을 명료화할 때 “심적 요인이나 행동주의적 요인 또는 문화적 요인들이 고려되어야 한다”고 선언하였다. 또 『단어와 대상』(1960)에서 그는 “그저 언어적 행위에의 성향에 의거한 거친 특징짓기”만을 요구한다. 행동주의, 즉 내포 용어들이 행동주의적 해명항으로 대치되어야 한다는 견해는 이렇게 해서 콰인 의미이론의 지배적인 특징으로 자리잡는다.
콰인이 분석성이나 동의성에 대해 정의나 기준을 요구한다는 이 해석들을 통해 그가 정의나 기준에 대해 요구하는 사항들을 간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1) 일반적이다.
2) “ ..... iff .....” 형식을 갖는다.
3) 의심스런 개념들을 피한다.
4) 비순환적이다.
5) 행동주의적이다.

이제 이 요구들에 대해 검토해보자. 정의가 “S는 L에서 분석적이다”(여기서 S와 L은 모든 진술과 모든 언어를 포함한다)라는 표현으로 제시되어야 할 것을 요구하는 1)은 지금까지 어떠한 의미론적 용어에 대해서도 그러한 일반적 정의가 제시된 적이 없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지나치게 엄격한 요구인 것처럼 보인다. 2)와 4)를 합친 요구조건 역시 너무 엄격한 요구라서 충족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예컨대 “분석적”이란 말이 술어 F에 의해 정의된다고 가정해보자.

S는 분석적이다 iff S는 F이다.

만일 “분석적”과 “F”를 서로 다른 진술들에 적용하는 게 가능하다면, 이 정의는 만족스러운 정의가 못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정의가 만족스러운 정의라면 “분석적”과 “F”는 인지적으로 동의어이어야 한다. 그러나 만일 “분석적”과 “F”가 동의어라면, “F”는 바로 그 사실로 인해 분석성 가족에 속하게 되고, 그 정의는 순환적 정의가 될 것이다.
하지만 이 사실은 형식적 정의가 무가치하다는 것을 함의하지 않는다. 순환적 정의라고 해서 무조건 쓸모없는 게 아니라 순환적 정의는 경우에 따라 개념 가족 내의 관계를 정밀하게 그려낸다. 그리고 그런 정의를 통해 우리는 관련된 용어들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증가시킨다.
한편 마지막의 행동주의적 기준에 대한 요구는 나름대로 가치를 지닐 수 있다. 이런 식의 행동주의적 언어들로의 개념적 환원이 이루어질 수 있다면 그 환원을 통해 분석성 개념이 단순화될 것이고, 설령 그런 프로그램이 실패한다 해도 적어도 발견적 가치는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식의 요구를 내세울 때 공감할 수 없는 방식이 있다. 우리가 어떤 분야를 연구하기 위해 마련한 장치가 바람직한 결과를 산출하지 못한다는 것을 발견할 때, 우리는 우리가 명료화시킬 수 없었던 개념들을 환상이라거나 근거가 없다는 식으로 선언해버리는 수가 있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 잘못은 연구를 해온 분야에 있는 게 아니라 그 분야를 연구하면서 이용했던 장치에 있을 가능성이 많다. 그런데도 콰인은 내포적 용어가 “기초가 없다”거나 “공허하다”고 결론내린다. 하지만 내포적 용어가 행동주의적 용어로 환원될 수 없다는 게 발견된다면, 우리가 해야 할 말은 좀더 강력한 분석틀 내에서 좀더 주의깊게 분석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지 콰인처럼 말해서는 안 될 것이다.



5. 분석/종합 구별의 옹호


지금까지 분석/종합 구별을 거부하는 콰인의 생각을 살펴보았다. 콰인은 “분석성” 개념에 대한 만족스러운 설명이 없다는 사실로부터 분석진술과 종합진술의 선명한 구별은 존재하지 않으며, 적절하게 해명될 경우 결국 정도 개념이 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콰인이 내세운 명료화 요구들은 대체로 지나친 요구이며, 가치 있는 요구라 해도 독단적으로 사용해서는 안 됨을 지적하였다.
이제 이러한 콰인의 공격을 놓고 분석/종합 구별을 옹호하는 논증을 살펴볼 차례이다. 자연언어에서 분석진술과 종합진술 사이에 구별해야 할 차이가 있는가? 있다면 그러한 차이의 본성은 무엇인가? 그 차이는 종류의 차이인가, 아니면 정도의 차이인가?
이 문제와 관련하여 분석/종합 구별을 옹호하는 철학자들의 논증은 대략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1) 철학자들이 이 구별을 적용할 때의 한결같음에 호소하는 논증, (2) “분석적”이란 말과 함께 상호 정의가능한 용어들, 예컨대 “동의적” 같은 용어들의 일상적 사용에 호소하는 논증, (3) “분석적 태도”의 독특성들에 호소하는 논증.


5.1 철학자들 사용의 한결같음과 일상적 사용: 논증 (1)과 (2)

그라이스와 스트로슨은 철학자들이 보통 “분석진술”이라고 부르는 것과 “종합진술”이라고 부르는 것 사이에 구별해야 할 어떤 차이가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말한다. 철학자들은 무엇을 “분석진술”이라고 부르고 무엇을 “종합진술”이라고 부를 것인지에 대한 완성된 목록이 없다 하더라도 똑같은 경우들에 대해 어떻게든 진술을 상당히 정합성있게 두 집합으로 나누려 한다. 한데 이 일은 “분석진술”과 “종합진술”이라는 명칭으로 구별되는 두 종류의 진술이 있다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분석”과 “종합”이란 말을 철학자들이 사용할 때의 한결같음에 의거한 이 논증은 “똑같은 의미를 갖는”이나 “동의적인” 같은 구절의 일상적 사용에 의거한 논증이 입증 근거로 작용하고 있다. 왜냐하면 만일 분석진술과 종합진술 사이에 차이가 없다면, 동의어 표현들의 쌍과 그저 똑같은 외연을 갖는 표현들의 쌍이 구별되지 않으며, 분석진술 “모든 그리고 오직 A만이 B이다”와 종합진술 “모든 그리고 오직 C만이 D이다”(여기서 A와 B는 똑같은 의미를 갖는 반면 C와 D는 똑같은 사물들에 적용될 뿐이다) 사이에 차이가 없다는 결론이 따라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똑같은 의미를 갖는다는 속성과 똑같은 외연을 갖는다는 속성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역설적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될 경우 두 표현이 동의어이지 않으면서 똑같은 것에 적용된다고 말하는 것이 언제나 무의미하거나 불합리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번역이 올바르거나 올바르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훨씬 더 역설적인 결과를 낳게 된다. 왜냐하면 상호언어적 동의성 개념의 사용이 없다면 그러한 부정적 결과가 도출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분석적”과 “종합적”이란 말이 어떤 구별을 가리킨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로 보인다.
그런데도 콰인은 분석진술과 종합진술 사이에 그어야 할 구별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말한다. 하지만 콰인의 공격에 대해 지적할 것은 이 구별에 대한 “만족스러운 정의나 설명이 없다”는 주장과 아예 “이 구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구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설령 구별에 대한 만족스러운 설명이 없다 할지라도 그러한 구별은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족스러운 정의나 설명이 없다고 주장하는 콰인의 논증을 가지고서는 이 구별의 존재를 부정하기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5.2 분석적 태도: 논증 (3)

5.1에서 입증한 분석/종합 구별의 본성은 무엇인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은 분석적 태도에 대한 고찰을 통해 마련될 수 있는 답이다.
경우에 따라 분석진술과 종합진술의 차이는 느낌의 차이라고 주장되는 수가 있다. 그래서 팝에 따르면 우리는 “누구도 사실이 아닌 것을 알지 못한다”라는 진술이 바로 “안다”의 의미에 의해 옳다고 느끼고, 콰인에 따르면 “어떤 미혼 남자도 결혼하지 않았다” “어떤 총각도 결혼하지 않았다” “2 + 2 = 4” 같은 문장들에 대해 누구나 이해하는 느낌을 갖는다.
물론 분석진술을 직관적으로 식별할 수 있다는 이 느낌은 자연언어에서 분석진술과 종합진술의 차이를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되는 한 요인일 뿐이지 가장 중요한 요인은 아니다. 예컨대 자유는 기독교 국가에서만 가능하다고 믿는 누군가를 만난다고 생각해 보자. 그의 믿음에 대해 우리가 어떤 반대실례를 내놓든, 그리고 우리가 드는 경험적 증거가 어떤 것이든그는 자신의 믿음을 버리지 않으며, 우리가 제기하는 반론을 어떻게 해서든지 효과가 없는 것으로 만드는 구별과 회피거리를 만든다. 그런 경우에 이 진술은 그 사람이 분석적 태도를 갖는 진술일 가능성이 높다. 그의 행위를 볼 때 경험적 요인들은 그 진술의 진리치를 결정하는 데 관련이 없음이 분명하며, 그는 그 진술이 옳다는 것을 절대적으로 확실하다고 느끼며, 아마도 그는 그 진술이 갖는 어떤 분석적 느낌에 대해서도 의식하고 있을 것이다. 이 세 특징 ― 경험의 무관성, 확실성, 느낌의 성질 ― 은 분석진술을 규정할 수 있다. 하지만 분석성의 독특한 특징은 아니다. 종교적 진술이나 형이상학적 진술 역시 이 세 특징을 가질 수 있지만, 그것으로 인해 그런 진술이 분석진술이 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분석진술은 그 진술의 의미에 의해서만 옳은 진술이며, 분석적 태도의 두드러진 특징은 관련된 표현들의 적절한 의미에 의거함으로써 어떤 진술을 옹호하는 것이다.
분석적 태도의 심리적 기제는 분명히 분석진술도 아니고 분명히 종합진술도 아닌 경계선상의 경우라고 주장되어온 사례를 통해 설명할 수 있다.

(A) 나는 내 눈으로 본다.

(A)가 분석진술이라는 견해와 종합진술이라는 견해 사이의 차이는 무엇인가? 두 견해를 ‘A-견해’와 ‘S-견해’로 부르고, 그에 따라 두 견해를 갖는 사람들을 각각 ‘A-주장자’와 ‘S-주장자’라 부르기로 하자. 이제 다음과 같은 일이 일어난다고 가정해 보라. 우리는 코로 보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을 만난다. 그가 어떤 것을 향해 그의 코를 돌릴 때, 그는 자신의 눈으로 볼 때와 똑같은 감각인상을 얻는다고 말한다. 그는 그의 코가 그 사물을 외면할 때 그런 감각인상을 얻을 수 없고, 완전히 어두워졌을 때는 바로 가까이에 있는 사물들을 ‘볼’ 수 없다.... 즉 그 이상한 생물은 자신이 코에 의해 시각 인상을 얻는다고 말하고, 자신이 말한 것에 대해 전혀 의심하지 않는 방식으로 행위한다. 이런 경우에 A-주장자와 S-주장자는 뭐라고 말할 것인가?

S-주장자: ‘그는 그의 코로 보며, 그래서 당신이 당신의 눈으로만 볼 수 있다는 것은 그르다.’
A-주장자: ‘그 사람은 그의 코로 보는 것처럼 보이지만, 당신은 당신의 눈으로 볼 수 있을 뿐이므로 그는 실제로는 코로 보는 게 아니다.’

또는 대안으로 A-주장자는 다음과 같이 응답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사람은 코로 보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때 그의 코는 결국 일종의 눈이다. 왜냐하면 눈을 제외한 어떤 것으로 본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가 두 대안들 가운데 어떤 것을 선택하는가는 그가 ‘눈’과 ‘보다’로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달려 있을 것이다. 우리는 ‘눈’에 대해 해부학적으로 예시적 정의를 하고 해부학적인 눈의 기능에 의거해 ‘보다’를 정의할 수 있지만, 또한 봄으로부터 출발하여 ‘눈’을 ‘우리로 하여금 볼 수 있게 해주는 감각기관’으로서 정의할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두 용어는 상호정의가능하며, A-주장자의 태도는 상호정의가능성이 보존되어야 한다는 가정에 의존한다. A-주장자의 조처는 일상생활에서 반대실례에 대해 진술들을 옹호하려는 논증에서 사용되는 경우가 흔하다.
A-견해는 결정적인 용어들의 의미가 모든 미래의 사용에 대해 미리 절대적으로 고정된다고 전제가정하지 않는다. (1)은 ‘보다’와 ‘눈’이란 낱말의 미래 사용에 관한 절대적 결정을 표현하는 게 아니며, ‘보다’가 적용되는 상황의 범위가 확장될 경우 ‘눈’이 적용되는 상황의 범위 역시 똑같은 방식으로 확장될 것이며, 그 역도 마찬가지라는 결정을 보고할 뿐이다. 이와 유사하게 ‘모든 그리고 오직 총각만이 미혼 남자이다’가 분석진술이라고 말하는 것은 ‘총각’과 ‘미혼 남자’의 미래 사용에 관해 조건적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미혼 남자’의 의미가 변한다면, 그리고 오직 그 경우에만 ‘총각’의 의미가 변할 것이며, 두 낱말의 의미 모두 똑같은 방식으로 변할 것이다.
분석적 태도를 고찰하다 보면 이런 식으로 내포적 용어의 사용에 이르게 된다. ‘모든 총각은 미혼 남자이다’와 같은 진술은 그 진술의 구성요소의 의미들 때문에 옳다. ‘나는 내 눈으로 본다’는 이 진술 속의 결정적 용어들이 상호 정의가능하기 때문에 옳다. 그래서 만일 누군가가 어떤 분석진술을 부정한다면, 그는 그 진술을 어떤 특별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사용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그가 의도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가 그 진술의 올바른 의미를 모르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게 될 것이다. 그런 주장들이 어떤 해석에 따를 때 옳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며, 그 주장들을 옳게 만드는 의미를 명료화하는 것은 의미론의 임무이다. 어떤 분석들, 예를 들어 플라톤식 의미이론이나 심상이론이 불만족스럽다는 사실은 내포적 용어를 거부할 이유가 되지 못한다. 더 나은 분석을 제공하는 것이야말로 도전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진술 속의 결정적 용어들이 상호 정의가능하기 때문에 우리는 분석적 태도를 지니게 되며, 이러한 분석적 태도의 존재는 분석진술의 존재에 대한 증거로 작용한다는 사실이다.



6. 맺음말


이성주의와 경험주의의 논쟁에서 분석/종합 구별은 선천/후천 구별과 더불어 중요한 기능을 수행해왔다. 특히 분석진술과 종합진술이 선명하게 구별된다는 분석성 원리가 경험주의의 기본 전제로 간주되면서 콰인을 필두로 한 몇몇 철학자들은 이 원리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논증하였다. 그러나 필자는 분석성 원리와 경험주의의 원리가 같은 것이 아니며, 분석성 원리에 대한 공격이 곧바로 경험주의에 대한 공격이 될 수 없음을 지적하였다.
분석/종합 구별에 대한 콰인의 공격도 분석성 개념의 명료화에 대한 지나친 요구, 구별에 대한 만족스러운 정의나 설명이 없다는 사실로부터 구별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으로의 비약이 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나아가 구별에 대한 철학자들의 한결같은 사용이나 일상적 사용, 분석적 태도의 존재에 비추어 볼 때 최소한 자연언어에서는 분석/종합 구별이 존재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 같다.
20세기 들어와 분석/종합 구별을 공격한 철학자들은 각자의 목적이 무엇이었든 간에 나름대로 분석성 개념의 명료화에 기여함으로써 철학의 발전에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만족스러운 설명이 없다는 사실을 가지고 곧바로 그런 식의 구별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극단적 주장은 의미론이라는 목욕물과 함께 아기를 버리는 격이 될 것이다. 콰인 이후 분석성 문제에 대한 논의를 보면, 일단은 콰인이 제시한 좁은 틀을 깨는 게 유익한 것처럼 보인다. 조야한 순환성을 피해야 한다는 정도의 의미가 아니라면 분석성 설명에서 비순환성을 기대해서는 안 되고, 의미론적 개념들에 대한 행동주의적 해명 역시 발견적 장치라는 점을 제외한다면 별 가망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참 고 문 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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