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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현대영미철학

근대과학의 본질 깊이있는 이해에 공헌

근대과학의 본질 깊이있는 이해에 공헌

해설 : 이중원(서울시립대 철학과 교수)

 토마스 쿤은 하버드대학에서 물리학부를 졸업한 후 물리학자가 되기 위해 대학원을 다니던 중 과학사와 과학철학에 매료되어 삶의 진로를 바꾼, 흔치 않은 경력을 지닌 과학사가이자 과학철학자이다. 학자로서의 출발을 과학에서 시작한 까닭에, 과학사를 해석하는 그의 독특한 시각이나 과학의 본성에 관한 철학적 분석 모두 매우 구체적이고 생생한 과학의 사례들에 대한 방대하면서도 포괄적인 분석에 기반하고 있다. 그가 40살이 되던 해인 1962년에 출판된 그의 대표 저서 <과학혁명의 구조>는 그의 이러한 편력이 가장 잘 드러난 책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학문전반에 영향을 준 사상
 이 책에서 그는 과학사, 과학철학, 과학사회학, 경제학 등의 분야에서 오늘날 매우 유용한 분석도구로 사용되고 있는 패러다임론을 제시함으로써, 과학과 관련된 20세기 사상의 흐름에 새로운 전환점을 제공하였다고 평할 수 있다. 20세기의 모든 학문적 연구들이 과학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볼 때, 과학을 보는 쿤의 새로운 시각은 학문 전반에 걸쳐 영향을 가할 수 있는 매우 위력적인 것임을 쉽사리 짐작할 수 있다.
 쿤에게서 패러다임이란 매우 복합적인 개념이다. 그것은 과학에서의 이론적 탐구와 실천적 활동이 이루어지는 일종의 모태적 토양과 같은 것으로서 학문 내적인 요소들, 가령 개념적, 도구적, 방법론적 요소들만이 아니라 학문외적인 요소들, 가령 교육, 문화 사회적인 전통이라든가, 세계에 대한 개개인의 암묵적인 믿음과 직관들, 그리고 가치관이나 형이상학적 믿음 모두를 포함하는 총체적인 개념이다. 이 패러다임은 어떠한 과학지식이 형성되고 그것이 어떻게 발전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중요한 인자다.

 예를 들어 근대 이전의 천문학이 천동설에 기초한 신(神)중심적인 패러다임 안에서 형성·발전했다면, 근대 천문학은 지동설을 포함하는 이성 중심적인 패러다임 안에서 형성·발전한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쿤은 과학이 패러다임에 절대적으로 의존한다고 말한다. 구체적으로 말해 과학의 한 분야 또는 한 집단에서 약간의 정도 차이는 있지만 비슷한 형태로 사용하고 있는 개념들, 법칙들, 이론들, 규칙들 등은 그 분야에 종사하는 여러 과학자들이 공유하고 있는 특정 패러다임의 산물로 간주한다.

매우 복합적인 개념, 패러다임

 이렇듯 패러다임 안에서 이루어지는 과학의 활동을 그는 정상과학이라 부르며, 패러다임이 바뀌지 않는 한 그 안에서 정상과학은 연속적이고 점진적이며 축적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쿤에게 있어 패러다임 자체의 형성은 다분히 우연적이며, 새로운 패러다임에로의 전이는 사회혁명처럼 매우 급격한 방식으로 진행된다.

 새로운 패러다임은 이전 패러다임 안에서 이루어지던 정상과학의 활동이 계속해서 심각한 변칙 사례들에 직면함으로써, 이의 모태가 된 기존의 패러다임 자체가 심각한 위협을 받게될 때 그것의 대안으로 등장하며, 새로운 패러다임에로의 전이(쿤은 이를 과학혁명이라 부름)는 어떤 필연적인 인과관계에 의해 연속적이고 점진적으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 개종처럼 어느 순간 급격하게 일어난다. 그 만큼 하나의 패러다임 안에 '갇혀' 정상과학 활동을 수행하는 과학자들의 경우, 기존의 패러다임을 여간해선 떨쳐 버리지 못하다가 일정한 조건이 성숙되면 어느 순간 게슈탈트적인 심리변화처럼 갑작스럽게 변화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과학혁명의 대표적인 사례로 쿤은 천동설의 천문학에서 지동설의 천문학으로의 전이, 결정론적 고전물리학에서 비결정론적 양자물리학으로의 전이, 플론지스톤에 의한 연소이론에서 산소에 의거한 연소이론에로의 전이 등을 들고 있다.

 이러한 쿤의 주장은 과학의 본성에 대한 철학적 이해나 과학의 발전에 관한 역사적 해석 모두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요구한다. 먼저 과학의 본성을 살펴보면, 쿤 이전의 논리실증주의에서 정립된 전통적 견해에 따르면 과학은 엄격한 수리 논리적인 기반 위에 형성된 실증적으로 검증 가능한 지식이다. 즉 자연에 대한 객관적인 경험과 엄격한 논리에 의존할 뿐, 쿤이 생각하는 그러한 패러다임에 무관한 패러다임-초월적인 지식으로 받아들였다.

 그 만큼 과학은 인간 혹은 과학자 사회의 집단적 사고에 좌우되지 않는 자연과의 순수한 대화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쿤의 주장처럼 과학활동 전반이 패러다임에 의존한다면, 직접적인 경험·관찰에서부터 추상적인 이론적 사고에 이르기까지 패러다임에 종속된 암묵적인 사고와 판단의 틀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며, 그러한 의미에서 과학은 더 이상 객관적·절대적이기보다는 상호주관적·상대적인 것으로 간주될 것이다.

연속과 불연속의 조화로운 반복
 한편 과학의 발전과 관련해서, 전통적인 견해는 과학지식이 연속적이고 축적적인 방식으로 발전하며 궁극적인 진리를 향해 계속 수렴해 간다고 본다. 그러나 쿤은 연속적인 축적에 의한 단선적인 발전 개념 대신, 불연속적이고 비축적적인 발전 개념을 주장한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해 안정된 패러다임 안에서 이루어지는 과학의 발전은 정상과학의 발전으로서 연속적이고 축적적으로 이루어지지만, 패러다임이 대체되는 과학혁명의 시기에 과학의 발전은 불연속적이고 비축적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과학사를 연속과 불연속의 조화로운 반복 혹은 축적과 비축적의 조화로운 반복으로 보는 것이다.

 쿤의 새로운 관점이 <과학혁명의 구조>를 통해 세상에 알려진 이래로, 이에 동조하는 많은 주장들이 과학사·과학철학·과학사회학 학계에 널리 형성되었지만, 이에 대한 비판도 매우 광범위하고 심도 있게 이루어졌다. 아직도 논쟁적인 그 비판의 요점들을 정리해 본다면 다음과 같다.

 과학이 전적으로 패러다임에 의존적이고 하나의 패러다임이 다른 패러다임과 공약적인 부분이 없을 정도로 상호 이질적이라면, 과학의 객관성 또는 과학의 보편성(한마디로 과학의 합리성)이 과연 주장될 수 있는가? 하나의 패러다임에서 다른 패러다임으로 전이과정이 종교적 개종처럼 지극히 우연적이라면, 하나의 과학이론이 새로운 과학이론으로 대체되는 과정 역시 어떤 합리적이고 보편적인 기준에 의거하지 않고 어떤 상대적인 요인들에 의해 임의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닌가? 등등

 흔히 합리주의 대 상대주의 논쟁으로 일컬어지는 과학철학에서의 이 논쟁은 쿤의 주장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에서 촉발되었지만, 쿤의 입장이 진정 무엇인가와 별도로 근대 과학의 본질을 보다 깊이 있게 이해하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바로 이점이 20세기 과학철학의 흐름에서 쿤을 주목받는 과학철학자로 보게 하고, 그의 과학철학을 하나의 큰 전환점으로 보게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인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