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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현대영미철학

실재론과 반실재론을 넘어서

실재론과 반실재론을 넘어서

노양진 (전남대․철학)






1 머리말

실재론/반실재론(realism/antirealism) 문제는 ‘언어적 전환’(Linguistic Turn) 이래로 가장 가열되고 복합적인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언어철학적 주제의 하나이다. 그러나 최근에 들어 이 논쟁은 뚜렷한 결론 없이 마치 한 시대의 유행처럼 철학적 논의의 중심에서 서서히 벗어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상황은 마치 근세의 인식론자들 사이에 벌어졌던 실재론/관념론 논쟁이 뚜렷한 결말 없이 서서히 철학사의 한 부분으로 가라앉게 되었던 것과 매우 흡사하다.
그렇다고 해서 그 동안의 논의가 우리에게 아무런 소득도 남기지 않고 사라져 가는 것만은 아니다. 이 글에서 보이려는 것처럼 실재론/반실재론 논쟁은 처음부터 끝이 없는 논쟁 구도와 함께 출발했으며, 이러한 사실은 이 문제에 대한 단일한 해결이 아니라 이 문제에 대한 전적으로 새로운 철학적 시각의 전환을 낳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환의 과정에서 주목할 만한 논의를 제시하는 영어권의 철학자들로 퍼트남(H. Putnam)과 로티(R. Rorty)를 들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은 공통적으로 이 문제에 대한 시각의 전환을 촉구하면서도 각각 전혀 다른 성격의 미해결의 과제를 남겨 두고 있다.
이 글에서는 실재론/반실재론 논쟁의 핵심적 소재를 퍼트남과 로티의 논의를 따라 검토하고, 이것을 바탕으로 최근 미국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가고 있는 ‘체험주의’(experientialism)의 시각을 빌어 이 문제에 대한 새로운 접근 방식의 윤곽을 제시하려고 한다. 체험주의는 최근에 인지과학(cognitive science)의 성장과 함께 급속히 증가하는 경험 과학적 증거들을 토대로 우리의 경험과 사고의 구조에 대한 포괄적인 해명을 시도한다. 체험주의는 우리의 경험에 신체적․물리적 차원(일차적 경험)과 정신적․추상적 차원(이차적 경험)이 있으며, 이 두 차원은 단절된 독립적 영역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상호 작용하는 연속성을 드러낸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우리의 경험은 이 두 측면의 어느 한쪽으로 설명되는 평면적인 ‘인식’이 아니라 이 두 요소들의 다면적이고 복합적인 활동의 산물이다.
이러한 체험주의의 주장에 따르면 실재론과 반실재론은 각각 우리의 ‘경험’에 대한 일면적이고 제한적인 이해의 방식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경험은 실재론적 요소들과 반실재론적 요소들의 상호 작용적 공존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우선 오늘날 드러나는 실재론/반실재론 논쟁의 이분법적인 대립 구도가 부적절하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래서 그것은 인식에 있어서 정신과 세계의 공동 작용을 주장했던 퍼트남의 ‘내재적 실재론’(internal realism)의 요구에 부합한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퍼트남의 내재적 실재론이 그 바탕에 유지하고 있는 근세의 인식론적 구도의 포기를 요구한다. 한편 그것은 로티가 원했던 것처럼 실재론/반실재론 논쟁의 근원적 구도 자체를 거부한다. 그러나 체험주의의 거부가 ‘해체’(deconstruction)로 머물지 않는 이유는 그러한 거부를 넘어서서 우리의 경험의 구조에 관한 좀더 포괄적이고 적절한 경험적 탐구를 요청하기 때문이다.


2 세계와 정신

실재론/반실재론 구분은 우리의 인식 구조에 관한 언어철학적 접근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인식 구조의 문제는 우리의 믿음이 우리 밖의 세계에 의해서 결정되는지, 아니면 우리의 정신 활동에 의해 결정되는지의 문제로 집약된다. 이것은 이미 근세의 인식론자들 사이에 실재론/관념론 논쟁 구도를 통해 집중적으로 논의되었던 문제이다. 이 문제는 금세기에 들어 더미트(M. Dummett)에 의해 실재론/반실재론이라는 언어철학적 구분을 통해 재구성된 이래로 지난 수십 년 동안 영어권의 언어철학적 논쟁의 핵심적 주제가 되었다. 더미트는 실재론의 문제를 문장의 진리치 문제로 전환하여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실재론은 주장된 명제들이 그 진리치에 대한 우리의 인식 방식과 상관없이 객관적 진리치를 갖는다는 신념이다. 즉 그 명제들은 우리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재에 의해서 참 또는 거짓이 된다. 반실재론자들은 이에 반대하여, 주장된 명제들은 우리가 그 명제의 증거로 간주하는 어떤 것에 의해서만 이해된다고 주장한다.

더미트의 이러한 제안 이래로 더미트 자신을 포함한 반실재론 진영과 이에 반대하는 실재론 진영 사이에 매우 복합적이고 전문적인 논의가 한 동안 지속되었다. 그러나 이 논쟁이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 것은 실재론/반실재론 대립 구도 자체의 정당성에 대한 물음이 제기되면서부터이다. 이러한 물음은 퍼트남의 ‘내재적 실재론’(internal realism)을 통해 적극적으로 제기된다. 퍼트남은 실재론/반실재론의 대립적 구도를 포함한 여러 가지 형태의 이분법적 사고를 오늘날 가장 심각한 철학적 문제로 지적한다. 그래서 퍼트남의 내재적 실재론은 실재론과 반실재론 사이의 ‘중간 지대’를 정교하게 탐색함으로써 이 이분법적 대립이 사이비 대립이라는 것을 보이려고 한다. 실재론은 우리 밖의 대상들이 우리의 인식을 결정한다고 보며, 반실재론은 우리의 정신이 인식을 결정한다고 본다. 여기에서 퍼트남의 내재적 실재론은 “정신과 세계가 공동으로 정신과 세계를 구성한다”는 기치를 통해 그러한 이분법적 대립을 근원적으로 와해시키려고 한다.
적어도 실재론/반실재론의 이분법적 대립을 극복하려는 퍼트남의 시도는 이 문제에 관한 그의 깊은 철학적 통찰을 드러내는 의미 있는 시도이기는 하지만, 그가 대안적으로 제시하는 내재적 실재론은 그 자체로 성공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무엇보다도 퍼트남의 내재적 실재론이 직면하는 가장 큰 난점은 ‘세계 자체’의 인식 문제이다. 퍼트남의 주장처럼 내재적 실재론이 개념 체계에 주어지지 않은 인식을 부정하는 입장이라면, 그 인식에 주어지기 이전의 인식의 재료로서의 실재, 즉 ‘세계 자체’는 무엇일까? 그것은 존재한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으면서도 근원적으로 인식될 수 없는 수수께끼이다. 그러나 그것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은 일종의 실재론적 신념을 지지하는 것이 된다. 이러한 난점은 인식의 구조로 개념 체계 개념을 수용하는 모든 철학자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난점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철학사에서 이 문제가 처음으로 정형화되어 드러난 것은 칸트(I. Kant)의 구성설적 인식론을 통해서이다. 즉 퍼트남에게서 드러나는 ‘세계 자체’라는 딜레마는 칸트의 인식론에서 드러나는 ‘물 자체’와 본성상 동일한 딜레마이다. 즉 정신이 인식을 구성한다는 생각을 받아들이게 되면 그 정신에 주어지지 않은 인식의 재료가 하나의 수수께끼로 남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구도 안에서 반실재론자들은 실재론이 인식 영역 밖의 대상에 대한 인식 가능성을 주장한다는 점을 들어 비판한다. 반실재론자의 시각에서 실재론자들은 인식 가능성 밖의 대상의 존재에 대해 주장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실재론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적극적으로 구체적인 대상에 대한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적어도 우리의 밖에 최소한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차원의 소박한 실재론적 믿음은 양도될 수 없는 원초적인 것이다. 데비트(M. Devitt)는 이러한 믿음을 ‘소극적 실재론’ 또는 ‘무화과 잎 실재론’(Fig-Leaf Realism)이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무엇이 존재하는가에 대해서는 전혀 규정하지 않으며, 단지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것만을 요구하는” 입장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처럼 최소화된 실재론은 누구도 거부하기 힘든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하나의 이론이라고 말하는 것 또한 새삼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써얼(J. Searle)은 이러한 믿음이 가설 또는 이론이라기보다는 가설들을 가능하게 하는 하나의 조건이라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실재론을 지지하는 철학자들은 데비트의 실재론이 ‘존재’의 문제와 관련된 이론일 뿐이며, 그러한 믿음을 옳은 것으로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인식’의 문제에 있어서 반실재론적 믿음이 적절한 것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실재론적 믿음을 받아들인다고 해서 반실재론자들이 옹호하려는 것처럼 인식에 있어서 정신의 작용이 제거되거나 거부되어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적어도 반실재론자들은 그러한 주장을 위한 충분한 증거들을 제시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엇이라고 인식적으로 규정되기 이전에도 무엇인가 존재한다는, ‘원초적 있음’이라고 부를 수 있는 어떤 것에 대한 믿음은 옳은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서 실재론적 주장은 강력한 지반을 갖는다. 반실재론자는 정신 이전의 세계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며, 실재론자는 세계의 존재가 전제되지 않는 인식이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들의 논란의 쟁점이 정신 활동에 주어지기 이전의 세계, 즉 ‘세계 자체’로 모아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실재론자와 반실재론자는 ‘어찌할 수 없는 세계’를 가운데 두고 공방을 거듭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어느 쪽도 상대방을 확고하게 논파하지 못하는 이유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실재론자와 반실재론자의 끝없는 논쟁이 그 근원적 구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라는 물음을 제기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구도를 극복하는 새로운 시각을 모색해야 할 필요성을 보게 된다. 이러한 주장은 로티를 통해서 매우 급진적인 방식으로 제기된다. 로티는 실재론/반실재론 논쟁의 배후에 자리잡고 있는 하나의 구도를 로크-데카르트-칸트 전통으로 불리는 인식론적 구도라고 지적한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구도를 객관과 주관의 분리, 즉 세계와 관찰자의 분리로 특징짓는다. 사실상 이러한 지적은 일찍이 듀이(J. Dewey)를 비롯한 실용주의자들을 통해 제기된 것이지만 로티의 입을 통해 오늘날 철학적 논의의 전면에 다시 부각되었다. 듀이는 이러한 이원론적 분리 구도 자체보다도 더욱 심각한 것이 이러한 구도를 바탕으로 인식 작용에 있어서 중심적 역할을 세계 아니면 관찰자에 두는 ‘선택적 강조’(selective emphasis)라고 지적한다. 그리고 그 귀결로 주어진 것은 소외된 이론들이다.
듀이의 시각에서 볼 때 우리는 세계와 지속적으로 ‘상호 작용’(interaction)하고 있으며, 그러한 상호 작용의 종결은 유기체 자체의 존재의 종결을 의미한다. 이러한 상호 작용에는 관찰이라는 평면적인 작용뿐만 아니라 우리의 신체적 활동과 같은 다양한 직접적 작용이 포함된다. 근세의 인식론이 설정했던 순수한 인식론적 ‘주체’는 정신에 관한 매우 그릇된 철학적 은유의 산물이다. 예를 들면 데카르트(R. Descartes)적 정신은 신체와 전적으로 독립된 별개의 실체이다. 그리고 그것이 데카르트의 인식론이 원했던 ‘생각하는 나’의 전부이다. 이러한 나는 이 세계와의 상호 작용을 통해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세계를 ‘순수하게 인식하는’ 존재이다.
듀이는 세계와 절연된 바로 이러한 인식론적 주체를 해소되어야 할 철학적 문제로 지적한다. 우리는 몸을 가진 유기체적 존재이며, 그 몸을 통해 이 세계와 단절이 없는 상호 작용을 한다. 신체적 요소가 전적으로 배제된 데카르트적 주체는 사실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이상화된 이론의 차원에서만 존재한다. 따라서 그것은 우리의 실제적 경험에 의해 주어지는 것도 아니고, 또한 우리의 실제적 경험을 적절하게 해명해 주지도 않는다.
전통적인 철학적 문제들에 대한 로티의 시각은 듀이로부터 온 것이지만 철학적 탐구에 대한 결론적 태도에서 그는 듀이와 분명히 길을 달리 한다. 듀이는 전통적 구도의 부적절성을 지적하고 새로운 자연주의적 탐구의 방향을 설정하지만 로티는 과거의 이론들을 넘어서서 새로운 탐구의 가능성도 필요성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는 이러한 구도의 근원적 용도 폐기를 주장하고 그저 ‘이야기의 주제를 바꾸자’고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로티의 시각은 ‘해체적’이다. 그러나 실재론/반실재론 논쟁 구도가 근원적으로 부적절한 것이라는 로티의 주장에 동의한다 하더라도 이 문제에 관해 로티의 해체적 결론만이 유일한 대안은 아니다. 로티의 태도에 대한 퍼트남의 응답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내가 생각할 때 철학에서 중요한 것은 “나는 실재론/반실재론 논쟁을 거부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양편이 개념들과 함께 살아가는 우리의 삶을 (어떻게) 잘못 표상하는지를 보여 주는 일이다. 어떤 논쟁이 ‘공허하다’는 것은 그 경쟁적 구도들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 나는 철학이 로티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며 동시에 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로티의 방식은 우리가 우리의 경험에 관해 필요한 모든 것을 충분히 알고 있다는 가정 아래에서는 설득력 있는 것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의 경험 과학은 완결된 형태의 지식은 아니라 하더라도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았던 것들에 대해 끊임없이 새로운 것들을 알려 주고 있으며, 그것들은 과거의 이론들의 근원적 가정들에 대한 재검토를 요청한다. 그리고 이것이 과거의 이론들에 대해 해체적인 시각을 가진 철학자라 할지라도 여전히 탐구의 과제로 삼아야 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로티는 자신의 선언적(宣言的) 주장을 통해 의도적이든 아니든 바로 이러한 가능성을 건너뛰어서 모든 이론화와 체계화를 거부하는 급진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급속히 성장하는 경험 과학들은 로티가 주장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많은 것을 우리에게 알려 준다. 그것은 로티를 따라 단순히 실재론/반실재론 논쟁이 유용성이 소진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을 넘어서서, 왜 그 논쟁이 적절하지 않은지를 좀더 구체적으로 보여 줄 수 있는 탐구의 성과들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3 경험의 두 차원

실재론/반실재론 논쟁의 구도에 대한 새로운 시각의 가능성은 ‘경험’의 구조에 대한 체험주의의 새로운 탐구를 통해 제시된다. 체험주의는 전통적인 철학적 탐구가 대부분 순수한 ‘선험적 사변’에 의존해 왔다는 점에 주목하고 오늘날 ‘인지과학’(cognitive science)이 제공하는 경험적 증거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선험적 방법과의 결별을 촉구한다. 체험주의는 이러한 방법을 스스로 ‘경험적으로 책임 있는 철학’(empirically responsible philosophy)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이러한 제안은 실재론/반실재론의 대립적 논쟁에도 유효하게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체험주의가 중요하게 강조하는 것처럼 우리의 경험에는 분명히 대별되는 두 차원이 있다. 우리는 몸을 통해 외부의 사물들과 직접 상호 작용한다. 그리고 이러한 상호 작용은 매우 원초적이다. 말하자면 그러한 접촉은 특정한 이론이 개입되어야 할 틈이 없을 만큼 우리와 밀착된 경험이다. 계단을 오르다가 넘어졌을 때 나는 신체적으로 반응한다. 거기에 무언가 깊은 철학적 해명의 여백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지나친 철학적 희망으로 보인다. ‘과도한 회의주의자’가 아니고서는 그러한 직접적 경험에 대해 아무런 이론적 증명이나 해명을 해야 할 이유가 없어 보인다. 반면에 나는 우주와 시간의 시작과 끝에 관해서, 모든 것을 포괄하는 ‘전체’에 관해서, 그 모든 것을 넘어서는 초월자에 관해 사유한다. 시간과 공간 밖의 어떤 것들이 우리의 머릿속에 떠오르며, 우리는 그것들에 관해 길고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할 수도 있다. 나와는 시․공간적으로 절연되어 직접적인 경험 영역으로부터 벗어난 것들 또한 나에게 물리적 대상이 주는 것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특별한 의미를 준다. 이러한 두 갈래의 경험은 너무나 분명하게 차이를 드러낸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이 두 차원의 경험에 관해 별개의 이론을 구성하도록 강력하게 유혹한다. 그러나 이 두 차원을 나누는 것보다도 그 두 차원의 상호 작용을 설명하는 문제가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미해결의 숙제로 남아 있다. 그것이 정신의 세계와 감각의 세계를 나누었던 플라톤의 숙제였으며, 정신과 신체를 두 개의 독립적 실체로 간주했던 데카르트의 숙제였다.
체험주의의 제안의 중요성은 경험을 신체적․물리적 차원(일차적 경험)과 정신적․추상적 차원(이차적 경험)의 두 갈래로 구분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두 영역의 상호 작용 방식에 관해 좀더 구체적인 해명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데 있다. 체험주의의 이러한 견해는 존슨(M. Johnson)을 통해 매우 상세하게 전개되고 있는데, 그는 이차적 경험이 일차적 경험에 뿌리를 두고 상상적인 구조들을 통해 은유적으로 확장된다고 주장한다. 그는 ‘신체적 활동으로부터 직접 발생하는’ 비교적 소수의 ‘영상 도식들’(image schemas)이 존재하며, 그것들을 토대로 우리의 경험이 ‘은유적 투사’(metaphorical projection)라는 방식을 통해 확장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확장 방식 때문에 이차적 경험은 그것의 뿌리를 이루는 일차적 경험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이처럼 체험주의는 경험의 이 두 차원을 지속적인 상호 과정 속에 있는 전체론적 구조로 해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경험을 두 차원으로 나누는 것은 대립적 이론들의 근원을 추적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열쇠를 제공한다. 말하자면 대부분의 철학적 이론들은 이 두 차원의 한편에 초점을 맞추고, 거기에 근거해서 통일적 해명을 시도한다. 그리고 그러한 시도는 경험의 다른 편을 소외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다시 말해서 그러한 이론들은 우리의 경험을 해명하는 이론으로서 제한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경험적 해명’이라는 차원에 눈을 돌린다면 그러한 이론들의 부적절성은 쉽사리 드러난다. 여기에서 경험의 구조에 대한 체험주의의 포괄적 해명은 중요성을 갖는다.
이러한 시각에서 본다면 이러한 이분법적 구도 안에서 실재론 또는 반실재론을 선택적으로 옹호하는 대부분의 논의들은 포괄적인 체험주의적 해명으로 쉽게 포섭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정대현은 실재론/반실재론 문제를 지칭 문제를 중심으로 정형화시키고, 매우 정교한 방식으로 실재론을 옹호하려고 시도한다. 그는 진리, 믿음, 규칙 등의 문제들과 관련해서 실재론적 지칭 이론에 대해 공격적인 일련의 반실재론적 이론들을 검토한다. 정대현은 이러한 반론들이 넓은 의미에서 외부 실재와의 지칭 가능성을 고려함으로써 폭넓은 실재론으로 흡수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의 이러한 논의는 실재론을 전적으로 거부하는 이론들에 대해 부분적인 대응으로서 성공적일 수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의 논의를 통해 모든 반실재론적 현상이 실재론적 믿음으로 흡수되지는 않을 것이며, 또 그것이 그의 의도도 아닐 것이다. 더욱이 그가 중요하게 강조하는 ‘넓은 문맥’, ‘넓은 관계’, ‘넓은 길’로의 방향 전환은 실재 세계의 변화가 아니라 그것에 대한 우리의 정신 활동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러한 점에서 그의 논의는 여전히 암암리에 반실재론적인 믿음을 전제하고 있음을 지적할 수 있다. 결국 실재론에 대한 그의 확장적 옹호가 성공적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반실재론적 요소들을 완전히 해소시키지 않는 한 필자가 이 글을 통해서 제안하려는 것처럼 실재론과 반실재론의 대립적 구도에 대한 반성적 탐구로 무리 없이 전환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은 실재론뿐만 아니라 반실재론을 선택적으로 옹호하는 논의들에도 동일한 방식으로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실재론/반실재론의 대립적 구도와 관련해서 경험의 두 차원에 관한 체험주의의 해명이 중요하게 함축하는 것은 일차적 경험 차원으로 갈수록 더 큰 ‘공공성’(publicity)이 나타나며, 이차적 경험 차원으로 갈수록 더 큰 ‘상대적 변이’(relativistic variation)가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여기에서 이차적 경험에서 점차로 증가하는 변이 가능성은 대상 세계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관찰자의 정신 활동의 개입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외부 세계의 제약이 점차로 감소된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것은 반실재론적 요소들의 확장을 의미한다.
우선 물리적 세계의 존재는 사유를 통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몸을 통해서 직접 경험된다. 말하자면 이러한 접촉은 어떤 추가적 논증이나 해명에 의존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더 이상의 어떤 것으로 환원되거나 거슬러 올라갈 수 없는 종류의 원초적 경험이다. 그래서 물리적 대상들의 존재에 대한 증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나의 몸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처럼 불필요한 일이다. 나는 나의 몸이 존재하는 것과 유사한 방식으로 타인은 물론 외부의 물리적 대상들의 존재를 이해하며, 그것은 결코 증명이나 논증의 결과가 아니다. 마치 내 손이 내 눈앞에 있다고 믿는 것처럼 방안에 컴퓨터와 탁자가 있으며, 도서관 앞 언덕에 소나무가 서 있다고 믿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다. 엄밀히 말하자면 내가 다른 사물이 될 수 없다는 이유 때문에 그 사물에 대한 경험적 증명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지만 적어도 신체적․물리적 차원의 경험 영역에서 물리적 대상의 외적 존재에 대한 믿음, 즉 실재론적 믿음은 대부분 적절하다.
나아가 단순히 대상의 존재 문제가 아니라 경험 내용에 있어서도 대체로 물리적 경험에 관한 한 실재론적 신념은 훨씬 더 적절한 설명력을 갖는 것으로 보인다. 물리적 경험이 주는 상대적 안정성은 추상적 경험의 다양한 변이 가능성을 큰 폭으로 제약한다. 말하자면 봄이 되면 어김없이 꽃이 핀다든지, 같은 장미는 거의 비슷한 시기에 시들게 되는 것 등이 그것이다. 야구공에 일정한 힘을 가하면 일정한 방식으로 운동하며, 전파는 일정한 메시지를 법칙적으로 송신하고 수신한다. 이 모든 것들은 물리적 세계에 대한 우리의 안정적인 이해 방식을 제공한다.
그러나 일차적 경험 차원에서 동일하게 간주되는 사물에 대한 이해와 해석의 방식은 이차적 경험의 영역으로 갈수록 점차 커다란 상대적 변이를 보이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변이를 낳는 것이 우리가 동일한 것이라고 간주했던 사물 자체가 아니라는 것은 너무나 자명하다. 거기에는 사물 자체의 속성이 아니라 우리의 상황과 맥락을 포함한 정신 작용이 부가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이차적 경험 영역으로 갈수록 반실재론은 더욱 설득력 있는 이론이 된다.
그런데 이차적 경험의 영역에서 관찰되는 상대적 변이의 근원은 무엇일까? 우리는 그러한 변이가 대상의 본래적 속성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관찰자에 의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야스트로의 ‘토끼-오리’ 그림이 보여 주는 것처럼 매우 일상적인 일차적 경험의 차원에서도 관찰자의 정신 작용이 지각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분명하다. 관찰자에 따라서 또는 동일한 관찰자의 다양한 의도에 따라서 하나의 그림은 ‘토끼’로도, ‘오리’로도 지각된다. 이러한 변이의 폭이 이차적 경험의 영역으로 갈수록 더욱 커지리라고 예상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다. 변이의 폭이 증가한다는 것은 우리의 지각에 있어서 공공성이라는 제약이 약화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반실재론적(또는 관념론적) 주장은 강력한 입지를 얻는다. 우리의 인식이 우리 밖의 대상들에 의해서라기보다는 관찰자의 정신 작용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다. 반드시 필연적인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반실재론과 상대주의가 매우 밀착된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그러나 이러한 반실재론자의 주장을 옳은 것으로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매우 제한적이다. 그것이 모든 경험 영역에 적절하게 부합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반실재론자들은 실재론자들의 비판에 직면하게 된다. 그리고 적어도 경험 영역의 일정 부분에 대한 해명에서 반실재론은 실재론에 비해 난점을 갖는다. 이 때문에 반실재론자들은 실재론의 이론적 난점을 집중적인 공격의 대상으로 삼는다. 그러나 실재론의 이론적 난점이 반드시 반실재론을 옹호해 주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전략은 우리에게 오로지 ‘실재론 아니면 반실재론’이라는 가정된 이분법에 근거해서만 유용한 전략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러한 두 갈래의 경험이 우리에게 모두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그러한 방식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순수한 이론들일 뿐이다. 체험주의의 경험적 해명에 따르면 실재론과 반실재론은 우리의 경험에 대한 부분적인 이해의 방식들이다. 그보다는 오히려 그것들은 우리의 ‘경험의 방식들’이라고 불리는 더 적절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론들은 우리에게 암암리에 모종의 이분법적 선택을 강요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실은 이론과 경험 사이에는 우리가 되돌아보아야 할 어떤 거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말해 준다.


4 경험과 이론화

우리의 경험은 결코 평면적이거나 단선적이지 않다. 경험은 오히려 복합적 중층성으로 특징지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경험을 기술하려는 우리의 언어는 분명히 경험과는 다른 본성, 즉 ‘평면성’을 갖는다. 이 때문에 언어와 경험 사이에는 근원적으로 다양한 거리(距離)가 존재하며, 그러한 거리는 언어적 변형을 통해 극복될 수 있는 유형의 것이 아니다.
언어와 세계 사이의 거리를 은폐하는 것의 하나는 ‘대응 이론’이라고 부르는 의미 이론이다. 우리의 기술과 외부 세계의 사실 사이에 고정된 모종의 관계―흔히 ‘대응’(correspondence)이라고 부르는―가 존재한다는 생각은 오래된 것이며, 그만큼 익숙한 것이지만 결코 옳은 것은 아니다. 모든 철학적 이론들이 언어를 통해 구성된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언어에 대한 이러한 부적절한 이해는 철학적 이론에 대한 이해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전기의 비트겐슈타인(L. Wittgenstein)에 의해 정교하게 정형화된 대응 이론은 매우 그릇된 두 가지 믿음에 근거하고 있다. 먼저 이들은 언어와 세계 사이의 대응 관계를 가정했다. 둘째, 이들은 언어의 본성을 명제적인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믿음은 언어와 그 언어가 기술하는 세계 사이에 아무런 거리도 설정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그저 ‘대응’하고 있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적 혼동의 주된 이유로 모든 단어들에 지칭체가 있을 것이라는, 또는 있어야만 한다는 전통적 철학자들의 무비판적 가정을 들었다. 비트겐슈타인은 그것을 ‘언어의 논리에 대한 오해’라고 불렀다. 그는 대신에 어떤 단어는 사실상 세계 안의 아무 것도 가리키지 않으며, 따라서 ‘무의미’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러한 비트겐슈타인의 지적은 매우 깊은 통찰을 드러내 주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는 여전히 세계 안의 무엇인가를 가리키는 관계, 그가 ‘의미 있다’고 판정하는 관계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단순하고 소박한 견해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그러한 관계를 단순히 ‘대응’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또 다른 중요한 사실은 대상들에 관한, 즉 지칭체가 있는, 그래서 ‘의미 있는’ 문장이라 하더라도 그저 ‘의미 있다’라는 말로 그 모든 것이 해명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언어와 세계 사이에는 훨씬 더 복잡한 ‘거리’(距離)가 존재한다. 그리고 그 거리는 우리의 언어를 통한 정신적 ‘도약’(跳躍)의 정도를 말해 준다. 언어는 그러한 거리를 항상 생략하고 은폐한 상태로 우리에게 주어진다.

① 새 강의실에 갈색 탁자가 있다.
② 초월적 세계에 절대자가 있다.

이 두 문장은 동일한 ‘있다’를 사용하고 있지만 그 두 표현이 담고 있는 내용은 우리의 일상적 경험을 기점으로 잡을 때 동일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론적 도약은 이러한 사실을 은폐―의도적이든 아니든―하고 있으며, 그것이 비트겐슈타인이 우려했던 ‘철학적 혼동’을 불러온다는 것이다. 경험의 구조에 대한 ‘경험적’ 탐구는 바로 거기에서 사용되는 언어가 이러한 도약을 줄이고 있다는 점에서 안정적인 해석 가능성을 갖는다. 예를 들어 물리학으로 대변되는 경험 과학적 이론들이 물리적 대상의 세계를 해명하는 데 훨씬 더 큰 안정성을 보이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로티와 같은 급진적 이론가들은 이러한 차이를 무시하는데 그치지 않고, 마치 과학 이론과 철학 이론 사이에 아무런 차이나 구별도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두 이론 사이에 단일하고 명확한 구분이 없다는 점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그것들이 아무런 차이도 없다고 말해야 할 이유는 없다. 말하자면 이 두 유형의 이론들 사이에는 우리가 ‘의미 있게’ 식별할 수 있는 다양한 차이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러한 차이는 우리가 직접적으로 경험하는 물리적 대상들로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에 관한 우리의 정신 작용의 산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은 실재론이나 반실재론이라는 이론들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그것들은 경험의 방식들의 양극단을 이루고 있지만 사실상 우리의 구체적인 경험들은 그 사이에 다양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반실재론자들이 앞세우는 정신 작용은 경험의 유형에 따라 매우 다양하게 나타난다. 말하자면 정신 작용의 자유로움은 무제한적이지 않다. 그것은 우리의 신체적이고 물리적인 조건에 의해 반실재론자들이 가정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강하게 제약되고 있다. 이 때문에 물리적 세계에 관한 한 실재론적 믿음이 훨씬 더 큰 설득력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나 실재론과 반실재론의 이분법적 대립 구도는 이러한 해명의 길을 가로막고 있다.
경험의 두 차원을 구분하는 것, 아니 오히려 그 두 영역 사이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통로를 제시한 것은 아마도 체험주의의 가장 큰 철학적 기여일 것이다. 이러한 이해는 더 나아가 실재론과 반실재론의 대립적 논쟁을 넘어서서 철학적 이론화의 본성에 대한 반성적 성찰을 가능하게 한다. 예를 들면 우리의 일상적 경험들은 ‘철학’이라는 이름으로 이론화되었을 때 이런저런 차이를 드러낼 수 있지만 우리가 실제로 살아가는 방식은 그러한 다양한 이론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거의 유사하다고 말할 수 있다. 비트겐슈타인이 지적하는 것처럼 “여기에 책상이 실재하는가?”라는 문제로 논쟁을 벌이는 사람은 실재론자든 반실재론자든 그 논쟁에 필요한 의자를 적당한 자리에 옮기기 위해 자신의 이론에 따라 색다른 방식을 취하지 않는다.
비트겐슈타인의 이러한 지적은 이러한 논쟁을 다루는 시각을 실제적인 우리의 경험 영역으로 전환시키려는 탈이론적(脫理論的) 접근 방식의 한 표현이다. 말하자면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적 이론들이 우리의 경험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떠나온 것인지를 지적함으로써 그것들이 이상화된 사유의 산물이라는 것을 보여 주려는 것이다. 그래서 비트겐슈타인은 “생각하지 말고 보라”는 기치를 통해 우리 삶의 일상적인 사실들로의 회귀를 권고하고 있는 것이다. 경험에 관한 체험주의의 해명은 비트겐슈타인의 이러한 권고에 적절하게 근접해 가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시각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지적되어야 할 것은 오늘날 실재론/반실재론 논쟁이 이분법적 대립의 구도에 묶여 있다는 점이다. 이분법적 대립은 경험적 사실이 아니라 이론화된 사유의 산물이다. 우리의 삶의 경험은 이 양극단의 이론들이 제시하는 것들의 복합적인 공존을 드러내고 있으며, 따라서 실재론과 반실재론은 경험의 차원에 따라 해명의 적절성이 달라진다. 매우 거칠게 말한다면 신체적이고 물리적인 차원, 즉 일차적 경험 영역에서 실재론적 해명은 더 큰 설득력을 가질 것이며, 정신적이고 추상적인 차원, 즉 이차적 경험 영역에서는 반실재론적 해명이 더 큰 설득력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두 차원의 경험 영역을 특징짓는 것은 ‘공공성’과 ‘상대적 변이’이다. 그리고 이 문제는 필연적인 것은 아니지만 왜 실재론/반실재론 대립이 흔히 객관주의/상대주의 대립과 병행해서 제시되는지에 대한 부분적인 설명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재론 또는 반실재론을 지지하거나 반박하려는 대부분의 논쟁자들은 반대편의 주장이 논박되기만 하면 자신의 견해가 정당성을 얻는 것 같은 태도를 유지한다. 그러나 실재론/반실재론의 이분법적 대립은 순수하게 이론적 차원에서의 문제이다. 우리의 실제 경험에 눈을 돌려보면 실재론과 반실재론은 우리의 경험의 구조에 관한 대립적인 이론들이 아니라 부분적이고 제한적인 이론들이다.


5 맺는 말

최근까지 지속되었던 실재론과 반실재론의 대립적 논쟁은 미해결의 논쟁으로 남은 채 서서히 그 생명력을 잃어 가는 것으로 보인다. 철학자들은 차츰 이 문제를 다루지 않게 되었으며, 새로운 방향으로 논의의 초점을 옮겨간다. 이것은 이례적인 현상도 불운한 현상도 아니다. 대신에 이러한 논의는 분명히 우리의 경험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방향을 촉구한다. 마치 하나의 씨앗이 새로운 싹을 틔워내는 것으로 그 소임을 다 하는 것처럼 실재론/반실재론 논쟁은 새로운 다음의 문제를 배태(胚胎)하는 것으로 그 소임을 다 한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그 동안의 실재론/반실재론 논쟁은 아무런 해결에 도달하지는 못했지만 결코 무용한 것만은 아니다.
체험주의적 시각을 수용하는 것은 실재론 또는 반실재론을 지지하는 것도 아니며, 동시에 그 어느 쪽을 거부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오늘날 논의되고 있는 형태의 실재론/반실재론이라는 이분법적 이해 방식이 우리 경험의 포괄적 해명이라는 차원에서 적절하지 않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을 뿐이다. 그것은 이러한 반성적 고찰은 경험에 대한 ‘이론화’를 통해 무엇이 억제되며, 무엇이 부가되는지를 되돌아봄으로써 경험에 대한 새로운 시각에로의 전환을 요구한다. 그래서 우리가 스스로를 부분적으로 실재론자라고 말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형이상학적 실재론’이 아니다. 그러나 형이상학적 실재론을 거부한다고 해서 곧 반실재론자가 되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단순히 대립적인 이론을 적절하게 화해시키려는 절충적인 견해가 아니라 오히려 그 논의 구도 자체에 대한 해체적 성향을 드러내는 또 하나의 새로운 메타적 시각이다. 로티의 표현을 빌면 그것은 논의의 유용성에 물음을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체험주의는 그러한 거부를 통해 그 자체로 철학적 작업이 완수되었다고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경험 과학을 통해 경험의 구조에 대한 더 나은 해명의 가능성을 제안한다. 그래서 그러한 철학적 태도는 ‘해체’와는 다른 새로운 이름을 필요로 한다.


참고 문헌

김여수. 「진리와 실재론」. 한국분석철학회 편(1993).
노양진. 「퍼트남의 내재적 실재론과 상대주의의 문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