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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근대철학

{순수이성비판}의 입체적 성격:인식론이자 형이상학으로서의 선험 철학*

{순수이성비판}의 입체적 성격:
인식론이자 형이상학으로서의 선험 철학*

이 엽(청주대)


[한글 요약]

{순수이성비판}에는 오랜 기간에 걸쳐 서로 독립적으로 전개된 다양한 철학적 숙고들이 담겨 있으나, 이 숙고들이 서로 분리된 단편들로서 나열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이것들은 하나의 유기체적 통일을 이루고 있다. 이 책은 하나의 입체에 비유할 수 있는데, 그 다양한 측면으로 인해 매우 상반되게 해석되기도 한다. 이 책의 핵심 주제에 관한 서로 상반된 해석으로는, 이 책의 중심 문제를 형이상학으로 본 입장과 인식론으로 간주한 입장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양 입장 모두 이 책의 한 면만을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다. {순수이성비판}은 인식론에 관한 책이자 동시에 형이상학에 관한 책이다. 칸트는 이 책에서 현상계의 존재 원리가 인간의 선천적 인식 능력이라는 것을 밝혀낸다. 현상의 배후에 놓여 있으면서 이 현상을 가능하게 하는 선천적 원리를 탐구하는 것이 형이상학의 기본 임무 중 하나라는 것을 염두에 둘 때, 칸트가 이 책에서 하고 있는 인간의 선천적 인식 능력에 관한 분석, 즉 인식론적 탐구는 곧 형이상학적 논의인 셈이다. 그는 이 책에서 정립한 자신의 새로운 존재론을 선험 철학이라고 부른다.

주제분야 : 서양근세철학, 인식론, 형이상학
주 제 어 : 순수이성비판, 현상계, 인식론, 형이상학, 선험철학

1. 들어가는 말: 하나의 입체로서의 {순수이성비판}

{순수이성비판Kritik der reinen Vernunft}에는 오랜 기간에 걸쳐 서로 독립적으로 전개된 다양한 철학적 숙고들이 담겨 있으나, 이 숙고들이 서로 분리된 "단편들"(B 860)로서 단순히 나열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이 다양한 숙고들은 하나의 "체계"(B 860) 내에서 내적 연결성을 지닌 채 "전체"(B XXXVII 이하)와 분리될 수 없는 "유기체"적인 "통일"(B XXIII)을 이루고 있다. 기하학적으로 설명하면 여러 개의 평면[개별적인 숙고]들이 흩어진 채 아무렇게나 나열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이 평면들이 서로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입체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2. {순수이성비판}의 중심 주제에 관한 상이한 해석

칸트 연구가들이 {순수이성비판}의 중심 주제에 관해 상이한 주장을 하게 되는 것은, 이 책이 이처럼 입체적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에서 그 근본 원인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들은, 각자의 관점 내지는 관심에 따라 이 책의 입체적인 모습 중 다만 한 면(面)만을 이야기하고 있기에, 불충분하거나 불만족스러운 것일 수밖에 없다. 이제껏 있어 왔던 {순수이성비판}에 대한 서로 상반된 두 종류의 대표적인 해석으로 이 책의 중심 문제를 '형이상학'으로 간주한 입장과 '인식론'으로 본 입장을 들 수 있는데, 양 입장 모두 반론의 여지를 안고 있다.

칸트 철학 전반을 살펴볼 때 {순수이성비판}이 형이상학에 관한 책이라는 주장은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여겨진다. 칸트는 처녀작에서, 동시대인들의 생각과는 달리, 당시의 형이상학은 아직 학(學)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처녀작 이후 그는 자신의 철학적 주요 목표를 형이상학을 학으로 완성하는 것에 두게 되는데, {순수이성비판}도 이러한 노력의 한 결과였다. 그는 이 책에서 학으로서의 "형이상학"의 "예비학Prop deutik"(A 841)에 관한 작업을 완성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기반 위에서 동시대인들이 "협조자"(A XXI)로서 힘을 합쳐 "학"으로서의 "형이상학"(A 841)을 건설할 것을 기대한다. 그러나 동시대인들의 {순수이성비판}에 대한 몰이해와 침묵은 그를 매우 실망시켰고, 이러한 실망은 6년 후에 출간된 재판 머리말에서 그로 하여금 "학의 안전한 길"(B VII)을 걷고 있는 논리학, 수학, 물리학과는 달리 우리의 형이상학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학이 아니라고 명시적으로 다시 한번 강조하게끔 하게 한다(B XIV 이하 참조). 이처럼 칸트 철학의 전체적인 흐름이라는 큰 틀 안에서 이 책을 바라볼 때, {순수이성비판}은 형이상학에 관한, 또는 적어도 형이상학과 연관된 책이 분명한 것 같다.

반면 {순수이성비판} 그 자체만을 주목한다면, 우리는 이 책을 인식론에 관한 책이라고 주장해야만 할 것 같다. 이 책의 전반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칸트는 여기서 주로 선천적 이성 능력의 분석, 즉 인식론적 탐구를 수행하고 있고, 그리고 형이상학의 문제와 연관해서는 주로 종래의 이른바 독단적 형이상학을 비판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적지 않은 칸트 연구가들, 특히 영미의 학자들은 이 책은 인식론에 관한 책이고, 칸트는 여기서 형이상학은 학으로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밝히고자 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은, 이 책의 중심 주제가 형이상학이라는 견해가 이 책의 전반적인 내용을 언급함으로써 반박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반론의 여지를 안고 있다. 여러 근거를 제시할 수 있지만 무엇보다도 칸트가 논리학과 형이상학을 위한 정교수였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가 자신이 담당하고 있는 전공, 그것도 매우 오랫동안 담당하기를 절실히 원했던 전공이 학으로서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는 것은, {순수이성비판}의 실제 내용이 어떻든 간에 상식적인 관점에서 쉽게 믿어지지 않는다. 더욱이 칸트는 "형이상학"을 "본래의 철학이자 진정한 철학"으로 보았으며, 편지글에 나오는 그의 육성(肉聲)을 빌려 말한다면, 그는 "형이상학에 인류의 진정한 그리고 영구적인 안녕이 달려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런 그가 자신의 주저 가운데 하나인 이 책에서 형이상학의 불가능성을 이야기했다는 것은 거의 믿을 수 없다. 이것은 그가 이 책의 초판 머리말의 맨 처음을 형이상학적 물음은 인간의 본성상 "회피할 수 없는"(A VII)물음이란 말과 더불어 시작하고 있다는 것과, 같은 곳에서 형이상학을 "사람들이 무엇보다도 포기해서는 안될"(A X 이하) 학문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고려할 때 더욱 분명해진다.

이처럼 {순수이성비판}의 중심 주제에 관한 서로 상이한 양 주장은 반론의 여지를 안고 있다. 그러나 한 편으로 칸트 철학의 전체적인 전개와 형이상학에 관한 그의 언급을 염두에 둘 때 그리고 다른 한 편으로 이 책의 실제 내용에 근거할 때, 양 주장은 각기 나름대로 부분적이기는 하나 정당성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여기서 우리는 양 입장의 타당한 부분을 합친 또 하나의 입장을 생각해볼 수 있다. 그것은 이 책은 인식론에 관한 책이기는 하나, 이 인식론적 탐구를 형이상학을 학으로 완성하기 위한 예비 단계로 간주하는 것이다. 형이상학은 이성에 의해서만 수행할 수 있고 또 수행해야만 하는 순수 학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형이상학에 관한 논의에 앞서 이성 능력을 검토해볼, 그러니까 인식론적 탐구를 수행해볼 필요가 있다. 즉 이성은 어떤 능력이며, 무엇을 할 수 있으며 또 그 한계는 무엇인지에 관해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사실 이성의 점검은 올바른 형이상학적 논의를 위해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형이상학은 쉽게 오류에 빠질 수 있고, 또 한번 빠지면 그곳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형이상학의 경우 논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오류는 경험 과학의 경우와는 달리 경험에 의해 반박되지 않는다. 따라서 형이상학이라는 학문을 수행하는 주체인 이성에 관한 탐구는, 형이상학적 논의에 앞서 필히 행해져야만 할 것이다.

{순수이성비판}의 주제에 관한 이러한 설명은, 이 책이 "형이상학"의 "예비학"(B 869)이라는 칸트의 규정과 더불어, 초판 머리말에 나오는 이 책에 관한 그의 첫 번째이자 널리 알려진 정의에 근거할 때 타당한 것으로 그리고 아무런 문제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정의에 의하면 "순수이성비판"은 "이성이 어떤 경험에도 의존함이 없이 추구할 수 있는 모든 인식에 관한 이성 능력 일반의 비판, 따라서 형이상학 일반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의 결정, 형이상학의 원천 및 범위와 한계의 확정을 의미한다"(A XII: 강조 따라서는 필자). 이 문장을 선천적 인식 능력인 이성에만 의지할 수 있는 또 의지해야만 하는 형이상학을 정초하기 위해서는, 우선 이성에 관한 비판, 즉 탐구 및 한계 설정이 필요하다는 식으로 해석할 경우, 위의 설명은 칸트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의 설명이 과연 칸트가 이 책에서 진정으로 이야기하고자 한 것을 드러내고 있는지는 다음 장에서 알아보기로 하자.


3. 인식론이자 형이상학으로서의 {순수이성비판}

방금 인용한 {순수이성비판}에 대한 정의에서 칸트는 접속 부사인 "따라서"를 가지고, 철학의 일반적인 분류에 따를 때 '인식론'이라는 분과에 소속시킬 수밖에 없는 선천적 인식 능력의 탐구 및 한계 설정과 '형이상학'의 밀접한 연관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는 "따라서"의 의미를 두 가지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나는, 위에서 했던 것처럼 선천적 인식 능력인 이성에 대한 탐구와 한계 설정은, 이성에 의해서만 수행할 수 있고 또 수행해야만 하는 순수 학문인 형이상학을 따라서 확실하게 정초하기 위한 예비 단계로 이해하는 방식이다. 이렇게 이해했을 경우 {순수이성비판}은 인식론에 관한 책으로 형이상학의 예비학이다. 그러나 "따라서"를 이처럼 선후(先後) 관계를 나타내는 접속 부사로 반드시 이해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는 동시적 관계를 나타내는 '곧'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즉 이 책에서 행할 선천적 인식 능력에 대한 탐구 및 한계 설정(인식론적 탐구)은 따라서[곧] 형이상학적 탐구라는 식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이 경우 {순수이성비판}은 인식론에 관한 책이자 동시에 형이상학에 관한 책이 된다.

"따라서"에 대한 이러한 방식의 이해는, {논리학}에 나오는 칸트의 다음의 언급과 서로 부합되고 있다. 여기서 그는 철학이 궁극적으로 관심을 지녀야 할 문제로 다음의 네 가지 물음을 들고 있다. "1)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2) 나는 무엇을 행해야만 하는가? 3) 나는 무엇을 희망해도 좋은가? 4) 인간이란 무엇인가?"(A 25). 그리고 그는 "첫 번째 물음은 형이상학이, 두 번째 물음은 도덕이, 세 번째 물음은 종교가 그리고 네 번째 물음은 인간학이 그 답을 준다"고 한다(A 25). 칸트는 첫 번째 물음을 {순수이성비판}에서 답하고 있다. 그가 {순수이성비판}에서 답하고 있는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는 오늘날 행해지고 있는 철학의 일반적인 분류에 따를 때 인식론이라는 분과에 소속시킬 수밖에 없는 물음이다. 그런데 칸트는 이 물음에 대한 답을 형이상학이 주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그는 {순수이성비판}은 인식론에 관한 책이자 형이상학에 관한 책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셈이다.

어떻게 한 권의 책이 인식론에 관한 것이면서 동시에 형이상학에 관한 것일 수 있는가? 이 물음은 현상계의 존재 원리에 관한 칸트의 생각을 이해함으로써 대답될 수 있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현상계의 존재 원리가 인간의 선천적 인식 능력이라는 것을 밝혀낸다. 현상의 배후에 놓여 있으면서 이 현상을 가능하게 하는 선천적 원리를 탐구하는 것이, 형이상학의 기본 임무 중 하나이다. 따라서 칸트가 이 책에서 하고 있는 인간의 선천적 인식 능력에 관한 분석, 즉 인식론적 탐구는 곧 형이상학적(존재론적) 논의인 셈이다. 이제 우리는 이에 관해 다음 장들에서 좀 더 상세히 살펴볼 것이다.


4. 현상계의 존재 원리에 관한 구명

'세계'라는 용어는 매우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그 중 중요한 의미를 용례와 더불어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1) 지구 위의 모든 지역 (예: 세계 평화).
2) 우주 전체 (예: 신이 세계를 창조하다).
3) 동일한 이념을 지닌 사람들의 집단 (예: 예술가의 세계) 또는 사람이 아니라도 동일한 종류의 집단 (예: 곤충의 세계).
4) 사물 현상의 특수한 범위 (예: 과학의 세계)
5) 특정한 심리적 영역 (예: 의식의 세계, 미의 세계) 등이 있다.

이러한 여러 의미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어떤 것이 - 생물체 또는 무생물체 일 수도 있고, 추상적인 것 또는 구체적인 것일 수도 있는 어떤 것이 - 그 안에서 존재하고 있는 곳을 가리켜 '세계'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 안에 어떤 것이 존재하고 있는가에 따라 다양한 세계가 있을 수 있고, 또 이 각각의 세계는 서로 그 질(質)을 달리한다. 이를테면 곤충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는 서로 그 질을 전혀 달리한다. 즉 하나의 세계가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존재하는 것들의 능력 또는 모습에 따라 무수히 많은 세계가 있을 수 있다.

칸트에 의하면 인간의 세계는 인간이 지닌 상이한 능력들로 인해, 다른 존재자들의 경우와는 달리, 서로 질을 달리하는 두 세계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그는 이 두 세계를 고대 그리스 철학 용어를 빌려 '현상계(Phaenomena)'와 '예지계(Noumena)'라고 부른다.

여기서 인간이 현실 속에서 실제로 살아가는 모습을 한 번 살펴보기로 하자. 우리는 여러 종류의 앎에 의존해서 살고 있다. 우리는 아침에 눈을 뜨면 새로운 하루가 시작된다는 것을 알고, 배달 사고가 없는 경우 문 앞에 조간 신문이 와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현재 내가 보고 있지 않지만 텔레비전에서는 아침 뉴스가 진행되고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또 아침 밥맛이 없지만 안 먹으면 오전 내내 허기 때문에 고생하리라는 것도 알고, 집 앞에서 몇 번 버스를 타고 몇 정거장을 가면 직장 또는 학교에 도착할 수 있다는 것도 안다. 그리고 유리창에 부딪치면 아프다는 것도 알고,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거나 자동차에 부딪치게 되면 심하게 다친다는 것도 안다. 또 부패된 음식물을 먹거나 술을 과도하게 마시면 몸이 상한다는 것도 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앎에 기초해서 행위한다. 이를테면 아침에 일어나 문 밖에서 신문을 가져오는 행위, 배가 고프지 않지만 나중을 생각해서 아침밥을 먹는 행위, 학교에 등교하는 또는 회사에 출근하는 행위, 그리고 유리창에 부딪치지 않기 위해 조심하는 행위 등은, 바로 이러한 앎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그리고 이처럼 앎에 기반을 두고 있는 인간 삶의 모습은, 지구 위의 다른 존재자들, 이를테면 곤충의 삶의 모습과는 전혀 다르다.

앞서 언급된 앎의 종류들은 단지 주관적인 추측이나 믿음이 아니라 실제(實際)로 일어난 또는 일어나고 있는 일에 기반을 두고 있기에 그리고 이것들이 지시하는 사태가 동일한 방식으로 반복된다고 가정할 수 있기에 '경험(Erfahrung)'이라고 불려질 수 있는 것들이다. 이러한 앎 내지는 경험에 의해 구성된 세계가 다름아니라 경험 세계 내지는 현상계이다.

우리에게는 현실 세계인 이 세계(현상계)는 그러나 사실은 객관적인 실재(實在) 세계는 아니다. 그렇다고 플라톤의 경우처럼, 실재 세계인 예지계의 이른바 모사물도 아니다. 칸트는 현상계를 플라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플라톤이 예지계를 현상계의 근원으로 파악하고 있었던 데 반해, 칸트는 그 근원이 인간의 지성적 능력이라고 여긴다. 칸트에서 현상계는 인간의 감각적 인식 능력에 의해 단순히 지각된 세계가 아니다. 현상계는 인간의 지성적 능력이 '건설'한 세계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현상계)는 나름대로 질서가 주어져 있고 또한 예측이 가능한 세계이다. 즉 우리는 이 세계가 일정한 법칙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법칙은 우리에 의해 세계에 부여된 것이다. 이를 통해 세계는, 특정한 법칙에 의해 지배되는 따라서 '경험'이 가능한 또는 '앎'을 형성할 수 있는 우리의 삶의 터전(현상계)이 된다. 이러한 법칙에 해당되는 것이 감성 형식과 오성 형식이다.

우리는 이 세계 내의 모든 현상을 시간적, 공간적 현상으로 경험하고 있다. 이러한 시간적, 공간적 인식이 가능한 것은 세계 자체 또는 사물 자체가 이러한 속성으로 이루어져서가 아니라, 수용하는 인식 능력인 '감성'이 주관 외부로부터 여러 [감각] 자료들을 받아들이는 방식이 시간과 공간의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수용된 자료들을 '오성'은 오성 형식인 순수 오성 개념, 즉 범주들을 가지고 결합하여 하나의 앎(경험 판단)을 이끌어 낸다.

'이것은 하나의 책상이다'는 앎에는 감성을 통해 획득한 감각 자료도 담겨 있지만 또한 범주들도 들어 있다. 여기에는 단일성, 실체성, 현존재와 같은 범주들이 개입하고 있다. 이 책상은 하나라는 '단일성', 이것은 다른 것과는 독립되어 있는 하나의 실체라는 '실체성' 그리고 현재 존재하고 있다는 '현존재'와 같은 범주가 사용되고 있다. 또한 '이것은 책상이 아니다' 라는 앎에는 '부정성'을 비롯한 몇몇 범주들이, '모든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와 같은 앎에는 '전체성'과 '필연성' 등과 같은 범주들이 개입하고 있다. 그리고 '물이 담긴 주전자를 불 위에 놓으면 물은 끓는다'는 앎에는 '인과성'과 같은 범주가 개입하고 있다. 인과성이란 범주가 사용되지 않았을 경우, 우리는 불이 타고 있는 그리고 물이 끓고 있는 각각의 개별적인 사실들과 이러한 개별적인 사실들이 연이어 일어났다는 것만 알 수 있을 뿐이지, 물이 담긴 주전자를 불 위에 올려놓으면 물은 반드시 끓는다는 앎, 그러니까 진정한 의미의 경험은 성립할 수 없게 된다. 이처럼 오성 개념(범주)은 경험을 가능하게 하고, 따라서 이러한 경험으로 구성된 경험 세계(현상계)의 존재 가능성인 셈이다. {순수이성비판}의 주요 핵심 과제는 바로 이 현상계의 존재 가능성, 즉 존재 원리를 구명하는 것이다. 이 책에서의 인간 주관이 지닌 선천적 인식 능력에 관한 탐구는 분명 인식론적 탐구이기는 하나, 이 인식 능력이 현상계의 존재 원리를 제공하고 있기에, 이러한 탐구는 '동시에' 형이상학적(존재론적) 탐구이기도 하다. 칸트는 이러한 탐구를 선험 철학이라고 부르고 있다. 다음 장에서는 현상계의 존재 원리인 오성 개념의 성격을 구명하는 동시에, 칸트가 선험 철학이란 용어를 사용하게 된 과정에 관해 살펴보고자 한다.


5. 오성 개념의 근원과 선험 철학

오성 개념의 근원에 관한 칸트 이전의 설명은 크게 다음의 두 종류로 구분해 볼 수 있다. 먼저 근대 합리론 철학에서 주장하는 본유 관념설 또는 생득 관념설을 들 수 있다. 이 주장에 의하면 우리는 특정한 개념들을 태어날 때부터 이미 경험에 앞서서 본유적으로 지니고 있다고 한다. 왜냐하면 삼각형, 동일율, 완전 선(善), 신(神)과 같은 수학적, 논리적, 윤리적, 종교적 개념들은 우리가 감각을 통한 외부 세계와의 접촉을 통해 획득할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되는 설명으로 우리는 경험론 철학을 들 수 있다. 로크는 {인간오성론(An 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 제1부 [본유 관념에 관하여]에서, 본유적인 어떠한 사변적, 실천적 개념도 없다고 한다. 로크를 비롯한 경험론 철학자들에 의하면 개념이란 경험으로부터 추상된 것이다.

칸트는 로크와 마찬가지로 오성 개념을 본유적인 것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모든 개념은 경험으로부터 추상된 것이라는 로크의 주장을 따르지도 않는다. 오성 개념이 본유적으로 주어진 것도 아니고 우리가 경험을 통해 획득한 것도 아니라면, 어떠한 설명이 가능할 수 있을까?

{현상계와 예지계의 형식과 이 형식의 근거들에 관하여(De mundi sensibilis atque intelligibilis forma et principiis)}라는 제목을 지닌 1770년의 교수 취임 논문 8항에서 칸트는 로크와 마찬가지로 오성 개념을 "획득된"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그러나 이 획득은 로크에서처럼 '경험으로부터'의 획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칸트에 의하면 오성 개념은 로크에서와는 달리 "순수 오성의 본성 자체"에 그 연원을 지닌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것이 순수 오성에 '경험에 앞서서' 본유적으로 주어져 있는 것은 아니고, 로크에 있어서와 같이 획득된 것이기는 하나, 다른 점은 "경험의 기회에(bei Gelegenheit der Erfahrung)" "인식력에 심어져 있는 법칙들로부터" "획득된"것이다(A 11).

{교수취임논문}에서 이처럼 간략하게 언급되고 있는 오성 개념의 근원에 관한 칸트의 견해는 여러 다양한 전거들을 통해 다음과 같이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우리는 단지 감각적 지각의 기회에 오성을 활동시킬 수 있고, 그리고 특정한 개념들이 … 오성의 법칙에 따라 우리에게 알려진다"({단편} 3930; XVII 352). 즉 감각 또는 "감관의 인상들"은 "개념을 산출하는 데" 있어 그 "첫 번째 동인(動因)"을 제공한다({순수이성비판}, B 118). 그리고 오성은 우리의 오성을 활동케 한 이 "감각들에 대한 숙고(Reflexion)"을 한다. "감각들로부터가 아니라" 바로 이 "감각들에 대한 숙고로부터 이끌어낸 개념들"이 바로 순수 오성 개념들이다({푈리츠 형이상학}; XXVIII 233). 오성이 감각에 대한 숙고를 통해 오성 개념들을 이끌어낼 때 그 길잡이 역할을 하는 것이 "인식력에 심어져 있는 법칙들"({교수취임논문}, A 11) 내지는 "오성의 법칙들"({단편} 3930)이다. 이것은 다름아니라 "사고 일반의 단순한 형식"이기도 하지만 또한 "오성과 이성 일반의 필연적인 법칙"({논리학}, A 4)이기도 한 논리적 규칙으로서 "판단 형식"이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오성의 논리적 기능"(B 95)에서 사용되는 12개의 판단 형식으로부터 12개의 범주를 그리고 더 나아가서 "이성의 논리적 사용"(B 359)에서 쓰이는 3개의 추론 형식으로부터 3개의 이념을 이끌어내는데, 그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다.

칸트는 오성 개념의 근원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1790년에 발표한 볼프 학파의 학자인 에버하르트(Johann August Eberhard) 교수에 대한 반박 논문에서 "원천적 획득(urspr ngliche Erwerbung)"(B 68) 또는 라틴어로 "acquisitio originaria"(B 71)이라고 부른다. 원천적 획득의 '원천적'의 의미는 행위 이전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가 '행위'를 통해서 획득하게 된다는 의미에서 원천적이다({발견}, B 68 참조). 그러므로 오성 개념의 원천적 획득이란 '오성의 행위'를 통해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즉 본유적으로 주어져 있던 것이 아닌 그렇다고 "허구로 날조한 것이나 감관을 통한 표상들로부터 추상해낸"({필리피 논리학}; XXIV 452) 것도 아닌 오성 개념이 "사고의 자발성"({발견}, B 70)을 통해 획득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고의 자발성에 의해 산출되는 오성 개념(범주)을 통해 특정한 법칙에 의해 지배되는, 따라서 앎 또는 경험을 형성할 수 있는 인간 삶의 터전인 현상계가 마련된다. 따라서 오성 개념의 원천적 획득이란 현상계를 건설하기 위한 "입법(Gesetzgebung)" 행위인 셈이다.

'오성 개념의 원천적 획득' 이론은,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이미 1770년의 {교수취임논문}에서 그 완성된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러나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칸트는 오성 개념을 현상계의 존재 원리로 간주하고 있지는 않았다. {교수취임논문}에서 그는 오성 개념을 가지고 '예지계'에 관한 지식에 도달할 수 있다고, 즉 사물들을 "그들이 존재하는 대로(sicuti sunt)"(4항; A 8), 그러니까 사물들의 실재를 구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다름아니라 바로 '오성 개념의 원천적 획득' 이론으로 인해 계속 유지될 수 없게 된다.

칸트는 그 유명한 1772년 2월 21일자 헤르츠(Marcus Herz)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후 그의 철학 발전에서 매우 중요한 물음을 제기하고 있다. "나는 나에게 아직 어떤 본질적인 것이 결핍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것은 내가 오랜 기간의 형이상학적인 그리고 그 밖의 탐구에 있어서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이 본질적인 것은 우리가 그것에 이르기까지는 스스로를 아직 감추고 있는 형이상학의 전 비밀을 여는 열쇠이다. 나는 요컨대 스스로 다음과 같이 물었다: 우리가 표상이라고 일컫는 것과 대상과 관계는 어떤 근거에 기인하는가?"(X 130).

칸트는 이 편지에서 우선 이 물음에 대한 두 종류의 가능한 답을 제시한다. 첫 번째 가능한 답은 대상이 주관에 작용을 함으로써 표상을 야기시키는 것이다. 두 번째 가능한 답은 첫 번째 것과는 반대로 주관은 능동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여기서는 대상은 신적 인식에 있어서와 같이 표상을 통하여 산출되는 것으로 여겨진다(X 130 참조). 이어서 그는 말하길, "그렇지만 우리의 오성은 그의 표상을 통해서 대상의 원인도 아니고 (선한 목적의 도덕의 경우를 제외하고), 또한 대상이 오성 표상의 원인도 아니다 … 순수 오성 개념들은 … 정신의 본성에 그 원천을 지닌다. 그리고 바로 이런 이유로 해서 이것들은 객관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도 아니고 또한 객관 자체를 산출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X 130). 여기서 그는 {교수취임논문}에서와 마찬가지로 오성 개념은 정신의 본성에서 원천적으로 획득되는 개념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오성 개념의 근원에 관한 이러한 생각은 표상과 대상의 일치에 관한 물음에 있어 그를 곤란함 속에 빠뜨린다. 만약에 칸트가 오성 개념을 본유적으로 주어진 것으로 간주했다면 또는 경험으로부터 유래한 것으로 여겼다면, 그는 표상과 대상과의 일치에 관한 회의적 물음을 던질 필요가 없게 된다. 이러한 회의적 물음은 그가 오성 개념을 오성에 그의 "자리(Sitz)" 뿐만 아니라 그 "원천(Ursprung)"({형이상학의 진보}, A 10)을 지닌 것으로 파악했기에 제기될 수밖에 없었다. 즉 그는 오성 자체로부터 생성된 오성 개념들이 대상과는 독립적으로 생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대상과 관계를 지닐 수 있는가 라는 의문을 제기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이 편지에서 그 답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X 131 참조).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순수이성비판}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오성 개념은 사물의 실재를 파악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따라서 경험 세계(현상계)을 건설하기 위한 도구라는 것이다. 즉 오성 개념(범주)은 전통적인 사변 형이상학에서 믿고 있듯이 예지계 또는 세계 그 자체의 보편적 성질이 아니라, 다만 현상계 또는 경험 세계의 "존재론적 술어"({판단력 비판}, B XXIX)일 뿐이다.

존재론적 술어로서의 오성 개념에 대한 한계 규정은, 존재론의 가능한 탐구 영역을 더 이상 물자체로서의 사물이 아니라, 경험의 대상에로 제한하게끔 한다. 이러한 칸트의 생각은 아디케스(Erich Adickes)가 1780년대에 작성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는 {단편} 5936(XVIII 394)에 잘 드러나 있다. "존재론은 사물 일반, 즉 사물에 관한 우리의 선천적, 즉 경험으로부터 독립적인 인식의 가능성에 관한 학문이다. 존재론은 우리에게 물자체에 관해서는 전혀 아무 것도 가르쳐주지 않고, 단지 우리가 사물들을 경험 일반에서 인식할 수 있는 선천적 조건들에 관해 가르쳐 준다. 즉 경험의 가능성의 원리들."
이제 칸트는, 존재에 관한 단순한 개념에서 존재의 필연성을 이끌어내려고 했던, 당시의 존재론과 자신의 새로운 존재론을 구별짓기 위해 새로운 용어를 필요로 하게 된다. 이것이 다름아니라 '선험 철학(Transzendentalphilosophie)'이었다. 선험 철학은 {순수이성비판}에서 칸트가 행한 "선험적"과 "선험 철학"에 관해 첫 번째 정의에서 알 수 있듯이 "대상 일반에 관한 우리의 선천적 개념들"에 관한 구명이라는 종래의 존재론적 과제를 염두에 두고 있으나, 여기서의 "대상 일반"은 '경험 대상 일반'을 의미한다.


6. 맺는 말: 인식론이자 형이상학으로서의 선험 철학

선험 철학에서 '선험적'의 사용은 이중적이다. '선험적'은 '선천적 인식 능력에 관한' 그리고 '선천적 인식 능력에 의한'이라는 두 의미로 사용된다. 그리고 이 두 의미는 각기 인식론 그리고 형이상학과 연관을 맺고 있다. '선천적 인식 능력에 관한' 탐구로 간주되는 경우, 선험 철학은 인식론을 의미한다. 그러나 선험 철학이 '선천적 인식 능력에 의해' 제공된 존재 원리를 구명하고 이 원리가 현상계를 구성하는 경험 대상의 존재 가능성 및 근거라는 논의로 이어지는 경우, 선험 철학은 형이상학(존재론)을 의미한다. 이러한 의미는 {순수이성비판}의 다음과 같은 짧은 구절에 잘 드러나 있다. A XX에서 칸트는 형이상학은 모든 학문들 중 짧은 시간 내에 그리고 공동의 작업을 하는 경우 적은 노력만 기울여도 그 완성을 기약할 수 있는 유일한 학문이라고 하고 나서, 그 이유를 "형이상학이란 순수 이성을 통한[에 의해 주어진] 우리의 모든 소유물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재산 목록이외의 그 어떤 것도 아니기 때문"이라고 한다.

주관과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객관적 실재에 대해 탐구하는 학문이 형이상학이라는 일반적인 견해에 비추어 볼 때, 칸트의 이러한 형이상학에 대한 규정, 즉 이성이 주관으로부터 그러니까 제 자신으로부터 산출해낸 소유물을 정리하면, 이것이 곧 형이상학이라는 주장은 잘못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순수이성비판}에서 문제삼고 있는 이러한 소유물이란 다름아니라 현상계의 존재 원리인 순수 오성 개념들이다. 이것들은 신에 의해 주어진 것도 아니고 경험을 통해 추상해낸 것도 아니고, 이성이 제 자신으로부터 산출해낸 것이고(원천적 획득), 이를 정리했을 경우 형이상학의 한 분야인 존재론은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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