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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미분류철학

사이보그도 소외를 느끼는가? - 이진우

사이보그도 소외를 느끼는가?

― 디지털 시대의 자아와 정체성 ―

이 진 우(계명대 철학과)

1. 디지털 기술과 ‘포스트휴먼’ 시대

“인간은 지성을 통해 자기를 이중화하여 자기자신에 의해 창조된 세계 속에서 자기를 직관할 뿐만 아니라 (의식 속에서 이러한 일이 이루어진다), 활동적으로 또 현실적으로 자기를 이중화하여 자기자신에 의해 창조된 세계 속에서 자기를 직관하기도 한다.” 우리가 인간소외의 문제를 생각할 때 떠올리게 되고 또 반드시 전제해야만 하는 마르크스의 말이다. 자기자신만을 생산하는 다른 동물과는 달리 인간은 자신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세계를 스스로 만들어 간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문명을 인간의 자기실현과정으로 간단하게 정의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이중화”라는 마르크스의 개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인간은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려면 자신을 대상화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이미 주체와 객체로 분열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생산물을 낯설게 느낄 수도 있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물론 인류의 자기실현 과정에서 발생하는 인간과 문명의 모든 왜곡관계를 소외라고 규정한다.

그러나 노동과 생산이 인간에게 본질적인 것만큼이나 소외는 인류문명의 필연적 수반현상이다. 그것은 문명의 어느 단계에서나 이상과 현실의 간극이 존재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동물이 직접적인 신체적 욕구의 지배를 받는다면 인간 자신은 신체적 욕망에서 벗어나 비교적 자유롭게 자신의 세계를 생산한다. 동물에게는 자연의 환경세계만이 있다면, 인간은 자연을 이용하여 자신을 실현할 수 있는 인공세계를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소외는 대부분 인간이 만들어 놓은 인위적 환경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문명화 과정에 따라 소외의 정도와 성격이 변화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인간의 생산물인 문명세계는 우리에게 단순히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으며, 우리가 더 이상 통제할 수 없는 이질적인 세계로 대립할 수도 있는 것이다.

소외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인류의 문명을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현상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이 시점에서 소외를 다시 거론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어떤 사람은 마르크스가 산업사회의 모순관계를 비판하기 위하여 소외의 개념을 도입하였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후기 산업사회로 이미 진입한 지금 소외의 문제를 다시 끄집어내는 것은 진부할 뿐만 아니라 시대착오적이라고 꼬집을 수도 있을 것이다. 현존 사회주의의 붕괴, 자본주의 체제의 세계화, 이데올로기의 종언, 유토피아적 사유의 해체, 포스트모던 문화의 확산 등은 실제로 이러한 인식을 굳히고 있다. 소외가 인류문명의 필연적 요소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극복될 수 없다는 절망주의가

현대인의 영혼을 감염시키고 있는 것이다. 물론 소외 받지 않은 인간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커다란 문제점을 안고 있다. 만약 우리가 기존의 기술문명이 야기할 수 있는 소외현상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이미 인간에 의해 통제될 수 없는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는 기술문명의 논리에 수동적으로 예속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기술문명은 인간의 생산적 업적에 의한 “고유세계”로 체험되지 않고, 아무런 통제도 할 수 없는 “소외세계”로 체험된다. 다시 말해 현대사회에서 소외를 더 이상 거론하지 않는 것은 이미 소외가 보편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그런데 상황이 근본적으로 변하고 있다. 디지털 문명과 함께 출현한 사이보그는 인간의 소외와 정체성에 관한 물음을 다시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사이보그는 여기서 공상과학 영화에서나 등장하는 인조인간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이보그는 ― 사이버네틱스의 발전과 더불어 보편화된 ― 인간과 기계가 유기적으로 밀접하게 결합된 디지털 문명시대의 인간유형을 의미할 뿐이다. 육체적 실존과 컴퓨터 시뮬레이션, 인공두뇌학적 메커니즘과 생물학적 유기체, 로봇과 인간의 본질적 차이 및 절대적 경계가 점점 더 불투명해지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번 마르크스의 소외개념이 산업사회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마르크스가 인간소외의 문제를 제기하였던 시대는 두말할 나위 없이 인간과 인간의 생산물이 극명하게 대립되었던 시대였다. 그렇기 때문에 마르크스는 인간은 대체로 노동자로 이해하였으며, 인간이 스스로의 활동을 통해 자신의 본성을 실현할 수 있다는 휴머니즘의 관점에서 소외의 문제를 제기하였다. 노동자는 도구를 사용하여 생산물을 만들어 내지만 실제로는 생산과정에서 뿐만 아니라 생산물로부터도 소외된다는 것이다. 소외는 근본적으로 인간이 자기실현을 위해 사용하는 도구에 의해 야기된다고 보았기 때문에 마르크스는 생산력을 구성하는 과학과 기술의 발전은 소외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인간과 기술을 이원론적으로 파악할 뿐만 아니라 인간에 의한 기술통제를 확신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휴머니즘을 대변하고 있다. 디지털 시대의 도래와 함께 이러한 전제들이 깨지고 있다. 디지털 시대는 우리가 사용하는 도구와 기술이 예전의 그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첫째, 생산기술이 사회의 중심을 이루었던 산업사회와는 달리 디지털 시대에는 정보기술이 사회관계를 구성하는 핵심적 요소이다. 디지털 정보기술의 발전은 단순히 의사소통 수단이 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지각하는 세계가 근본적으로 변화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구술문화가 지배적이었던 고대의 농경사회에서 유통되는 정보는 대부분 주어져 있는 현실에 ‘관한’ 정보였고, 지식의 축적이 중요하였던 산업사회의 정보는 우리가 실현하고자 하는 현실을 ‘위한’ 정보였다. 이에 반해 디지털 시대에 유통되는 정보는 그 자체 현실‘로서’ 인식되고 있다. 간단히 말해 정보가 이미 주어져 있는 현실에 관해 무엇인가를 말해주는 대신 현실 자체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디지털 정보기술의 가장 커다란 특징은 정보가 그것을 전달하는 매체로부터 분리될 수 있다는 점이다. 아날로그 기술에서는 정보가 매체에 의해 영향을 받지만, 디지털 기술은 정보를 아무리 복제하고 유통시키더라도 그것을 원형 그대로 재현한다. 그러므로 정보가 상이한 물질적 수단 사이를 아무런 변화 없이 유통할 수 있다는 사실은 디지털 문화의 핵심을 이룬다. 엄밀한 의미에서 정보는 그것을 담을 물체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정보를 입력하여 필요할 때마다 출력하여 볼 수 있는 것처럼, 인간의 신체를 정보 패턴으로 탈(脫)물질화 한 다음 먼 곳에서 다시 물질화하는 ― 공상과학 영화 <스타 트랙 Star Trek>에서 많이 사용되는 ― 순간이동이 가능한 날도 멀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간단히 말해 어떤 실체가 정보를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정보 자체가 실체를 구성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사이보그는 비생물학적 요소의 존재여부에 따라서가 아니라 주체성이 구성되는 방식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만약 우리의 자아를 확인할 수 있는 방식이 선험적으로 주어지지 않고 다양한 정보의 관계에 따라 만들어진다면, 우리는 이미 포스트휴먼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셋째, 디지털 정보기술은 이상과 현실의 절대적 경계를 불투명하게 만든다. 우리는 물론 가상현실을 실체화할 필요는 없다. 예컨대 우리가 살고 있는 구체적 현실과 완전히 구분되는 가상현실이 과연 존재하는지 아니면 우리가 구체적이라고 생각하는 현실이 실제로는 가상현실인지를 묻는 것은 흥미롭지만, 우리의 문화적 현실을 이해하는 데는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한다. 가상현실은 존재론적 개념이기보다는 오히려 인식론적 개념이다. 왜냐하면 가상현실은 정보 패턴이 물질적 대상세계에 침투하여 영향을 미치는 시대의 문화적 지각방식이기 때문이다. 다양한 정보매체들은 물질적 실체를 전제하지 않는 현실 공간을 만들어낸다. 서로 다른 장소에 있는 사람들이 전화와 인터넷을 통해 의사소통을 한다면, 정보매체에 의해 만들어진 가상현실을 이미 구체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가상현실은 더 이상 구체적 현실과 동떨어진 세계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 자체로 지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생산기술보다는 정보기술이 사회를 구성하고, 정보가 구체적 물질로부터 분리하여 유통될 수 있고, 탈(脫)물질화된 정보가 가상현실을 구성하는 디지털 정보시대는 근본적으로 포스트휴먼 시대이다. 인간의 본성이 더 이상 명료하지 않고 불투명해졌다는 점에서도 그렇지만, 인간이 더 이상 도구와 기술을 통제할 수 없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인간이 자신이 사용하는 도구와 기술을 반성적으로 비판할 수 있는 거리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인간과 기계가 너무나 유기적으로 결합되어서 기계로부터 분리된 인간을 상상할 수 없다면, 우리는 이미 사이보그인 것이다. 도구의 세계가 인간 세계와 대립하기는커녕 오히려 인간의 생활세계를 구성한다면, 사이보그로 존재하는 현대인은 더 이상 소외를 느끼지 않는 것인가? 마르크스의 소외이론은 산업사회의 노동자에게만 해당할 뿐 디지털 시대의 포스트휴먼 현대인에게는 타당하지 않은 것인가? 우리는 디지털 시대의 정보기술 역시 마르크스가 말하는 이중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확인함으로써 그 유형과 양식이 달라졌을 뿐 소외는 역시 중요한 문제로 남아있다는 사실을 재인식하고자 한다.





2. 디지털 정보기술의 이중성



인간이 자연을 이용하여 인간다운 삶이 가능한 세계를 만들어 가는 것이 노동과 생산이라면, 인류의 역사는 바로 인간과 자연을 매개하는 도구의 역사와 다를 바 없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인류의 문명화 과정을 의식과 실천의 두 측면에서 고찰하고 있다. 지성을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세계를 비판적으로 고찰하는 것이 의식의 차원이라면, 노동과 생산을 통해 자신이 이상적이라고 판단한 세계를 스스로 구축하는 것이 실천의 차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의식의 차원에서는 현실과 이상, 실재적인 것과 이상적인 것의 구별이 본질적으로 필요하다. 물론 이 경우에도 현실과 이상은 단순한 대립으로 파악되지 않는다. 이상은 아직 실현되지 않은 현실이라면, 현실은 이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 현실과 이상은 변증법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이상을 현실화하기 위해 발전시키는 도구와 기술 역시 이러한 이중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기술은 한편으로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수단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의 삶에 영향을 주는 현실이기도 하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은 이미 기술적으로 조작되고 만들어진 현실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이상과 현실이 겹으로 중첩되어 있는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인 셈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다음과 같은 질문이 자연스럽게 제기된다. 실재하는 것은 정말 감각적 경험의 흐름과 무관하게 존립하는 것인가? 이상적인 것은 우리의 마음과 정신 속에 존립하는 완전한 모델인가? 만약 인류의 역사가 이상과 현실, 이상적인 것과 실재적인 것의 변증법적 발전으로 이해된다면, 디지털 정보기술이 만들어 내고 있는 가상현실과 사이버 공간은 기술의 변증법적 성격을 다시 한번 되새기게 만든다.

사이버 공간은 이미 기술적 문제를 넘어 윤리적 문제로 확장되고 있다. “사이버 공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또는 “우리는 어떻게 사이버 공간에 접속할 수 있는가?”와 같은 질문은 서서히 “사이버 공간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또는 “사이버 공간의 사회적 의미와 역할은 무엇인가?”의 질문으로 옮겨가고 있다. 물론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대답은 유토피아적 공상과 증오에 찬 냉소주의 사이를 오가고 있는 실정이다. 한편에는 인간성의 본질이 기술적으로 만들어진 세계의 바깥에 있다고 생각하는 순진한 실재론자들이 있으며, 다른 한편에는 새로운 기술의 어떠한 부정적 계기도 무시하는 미래지향적 이상주의자들이 포진하고 있다. 디지털 정보기술은 가상현실을 통해 현대인들에게 공포와 열광의 이중적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기술을 적대시하는 태도는 기술만큼이나 오래되었다. 오늘날 반기술적 경향을 대변하는 상징적 인물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유나바머(Unabomber)이다. 그는 현대 기술 중에서 특히 컴퓨터가 수많은 사회적 문제점을 야기한다고 강렬하게 비판한다. 그가 비행기 승객들에게 폭탄 테러를 하겠다고 위협하면서 1995년 9월 19일자 <워싱턴 포스트Washington Post>지에 게재한 “산업사회와 그 미래”라는 반기술 강령은 사실 별로 새로운 것이 아니다. 사적인 영역의 훼손, 유전공학, 과도한 경제성장에 의한 자연의 황폐화는 누구나 알고 있는 기술문명의 비의도적 산물이다. 순박한 기술비판주의자들의 논리는 간단하다. 현대의 디지털 정보기술은 인간으로부터 노동의 가능성을 박탈하거나 인간의 생산양식을 변화시킴으로써 인간의 실존을 억압하는 통제수단이라는 것이다. 인간이 자연 진화 과정을 통해 물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적응해 온 환경과는 철저하게 다른 기술환경이 디지털 정보기술을 통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입장은 “기술공학적 산업 체계”의 논리를 죄악시하고 있는 문명비판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이렇게 기술비판은 기술이 야기하는 부정적 현상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기술 자체를 겨냥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현실과 실재를 도구와 기술의 매개수단을 거치지 않고 직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다고 믿는 반기술주의자들을 “소박한 실재론자”라고 명명할 수 있다. 우리가 컴퓨터와 인터넷을 통해 만들어내는 가상현실은 우리의 일차적 감각 세계의 바깥에 존립한다. 그렇기 때문에 기술세계와 가상현실은, 순진한 실재론의 관점에서 보면, 현실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실을 기만하거나 억압하는 것으로 보인다. 미디어는 경험을 체계적으로 수집하고, 편집하고, 통제하기 때문에 디지털 정보시대의 대표적인 억압 수단으로 인식된다. 간단히 말해 미디어는 매개되지 않은 순수한 직접적 경험을 훼손하고 왜곡한다는 것이다. 소박한 실재론은 우리의 순수한 경험이 오염된 물과 공기처럼 정보기술에 의해 위협받고 있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구체적 실재는 정말 소박한 실재론이 전제하는 것처럼 우리의 신체적 기관을 통해 지각하는 물리적 현상들에 불과한가? 우리가 눈으로 직접 보는 것, 우리의 코로 냄새 맡는 것, 우리의 귀로 듣는 것, 우리의 피부로 느끼는 것만이 실재하는 것일까? 이렇게 감각적 세계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컴퓨터 체계는 일차적으로 실재의 세계로부터 추상화된 신기루에 지나지 않는다. 강과 산, 들판, 우리의 발 밑에 있는 이 거대한 대지는 컴퓨터가 있기 훨씬 이전부터 존립하고 있기 때문에 컴퓨터는 신성한 자연세계에 대한 침입자로 여겨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소박한 실재론은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 우리가 외부세계를 지각하고 인식하는 과정에서 우리의 몸 역시 하나의 도구이다. 다시 말해 우리의 신체를 통해 매개되지 않는 순수한 외부세계가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도구와 기술을 통해 매개되지 않는 실재와 현실은 근본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소박한 실재론자들이 주장하는 것과는 반대로 도구와 기술은 근본적으로 우리의 몸을 확장하는 것이다.

소박한 실재론의 반기술적 주장은 물론 공포에서 기인한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세계적 규모의 사이버 공동체에 들어감으로써 우리가 몸담고 있는 지역공동체의 가치를 상실할 것에 대한 두려움, 인터넷의 그물망이 더욱 촘촘해지면 우리의 신체적 친밀성과 상호 의존관계가 사라질 것이라는 두려움, 인간의 신체적 활동이 궁극적으로는 기계와 로봇에 의해 대체될 것이라는 두려움, 우리의 존재 자체가 유전 공학적 패턴에 의해 규정될 것이라는 두려움. 이러한 두려움들이 한편으로는 디지털 정보시대의 소외의식을 확산시키는 것은 틀림없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디지털 기술의 이중성을 무시함으로써 소외의 생성과정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그런데 미래지향적 이상주의자들 역시 디지털 정보시대의 인간소외를 간과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전통적 의미에서의 이상주의 또는 관념론은 이상이 물질적 세계를 넘어서는 관념과 의식 속에 있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반해 현재의 미래지향적 이상주의자들은 디지털 기술에 의해 우리의 의식세계가 인식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확장될 수 있다고 확신한다. 물론 그들도 새로운 정보기술이 고통과 사회적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러나 앨빈 토플러와 같은 미래주의자들은 개인들이 보다 광범위한 경제적-정치적 체계에 속해 있다고 전제함으로써 개인이 겪는 실존적 고통을 간과한다. 사회의 중심축이 생산기술에서 정보기술로 옮겨감으로써 권력이동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미래주의자들은 이러한 권력이동을 당연한 것으로 전제함으로써 정보기술이 야기할 수 있는 구체적 인간소외의 현상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도덕적 인륜이 완전히 실현될 수 있는 국가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과정에서 헤겔이 개인과 시민사회의 역할을 간과하였던 것처럼, 미래지향적 이상주의자들은 사회발전의 거대한 물결을 강조하느라 개인들이 겪게 될 고통을 경시한다.

미래주의자들은 디지털 정보기술을 통해 세계가 하나의 생활공동체로 압축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컴퓨터 네트워크와 인터넷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가상 공동체를 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우리는 서로 상이한 문화들 사이에서도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뛰어넘은 사이버 공간에서 교류할 수 있다. 인터넷의 사이버 공동체는 자신의 고립에 불만을 가지고 있는 고독한 사람들에게 다양한 형태의 연대 가능성을 제공한다. 유나바머의 예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 것처럼, 오늘날에는 누구나 개인 컴퓨터를 통해 자신의 의견을 전세계에 알릴 수 있다. 사이버 쇼핑, 사이버 강좌, 사이버 비즈니스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디지털 정보기술은 우리에게 어느 곳에나 존재할 수 있는 잠재력을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디지털 정보기술이 산출하는 가상현실은 우리의 구체적 생활세계를 대체하는 것일까? 자신의 신체를 실존의 토대로서보다는 단순한 패션 액세서리 정도로 인식하는 인공인간의 세계와 마찬가지로 구체적 현실과 사이버 공간의 가상현실이 전혀 구별되지 않는 세계 역시 우리에게는 악몽이다. 현대인이 군중 속의 고독을 느끼는 것도 소외현상이지만, 사이버 세계를 현실세계로 착각하는 것은 더욱 더 심각한 소외를 야기한다. 그러나 구체적 현실과 가상현실은 컴퓨터의 인터페이스를 통해 매개되어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디지털 정보시대의 인간소외는 컴퓨터와 가상현실 자체에 의해 야기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컴퓨터, 구체적 현실과 가상현실이 결합되는 방식에 따라 발생하는 것이다. 우리가 디지털 정보기술을 변증법적으로 파악하고자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소박한 실재론과 네트워크 이상주의는 이처럼 디지털 변증법의 양극을 이룬다.

물론 디지털 변증법은 헤겔의 변증법과는 달리 하나의 이상과 원리가 디지털 기술을 통해 실현된다고 파악하지 않는다. 디지털 변증법은 인간의 역사가 도구와 기술을 발전시킴으로써 인간의 유기체적 범위를 확대한다고 파악하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유물론적이다. 그러나 디지털 정보기술이 어떻게 소외를 야기하는가를 정확하게 파악하려면, 우리는 우선 소박한 실재론과 네트워크 이상주의를 수정할 필요가 있다. 도구와 기술에 의해 매개되지 않는 순수한 현실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사이버 공간의 가상현실 역시 구체적 현실로부터 완전히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 하나이며, 가상공간이 세계적 네트워크로 통합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디지털 정보기술이 국지적으로 존립하고 있는 구체적 인간관계에 미치는 영향에 따라 인간소외의 성격과 정도가 다르다는 사실이 다른 하나이다. 이런 관점으로부터 출발하여 우리는 디지털 정보기술이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과 상호 관계를 맺는 방식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분석할 필요가 있다.





3. 비물질적 정보에 의한 인간소외



우리는 분명 생산 패러다임이 쇠퇴하고 정보가 중심을 이루는 시대에 살고 있다. 마르크스가 분석한 것처럼 산업사회에서는 노동자가 상품을 많이 생산하면 생산할수록 그는 더욱 더 저렴한 상품으로 전락한다. 이렇게 노동자가 상품을 생산하는 과정에서 자기자신을 상품으로 생산하는 현상이 다름 아닌 소외인 것이다. 산업사회의 인간소외가 ‘노동’에 의해 야기되었다면, 후기 산업사회의 인간소외는 두말할 나위 없이 인간의 생산물인 ‘정보’에 의해 발생한다. 우리는 여기서 정보를 단순한 지식 생산물로가 아니라 그 자체 생산되고, 축적되고, 유통되는 과정으로 파악할 필요가 있다. 산업사회에서 계급적 인간관계가 노동생산물인 상품에 의해 결정되었다면, 후기 산업사회에서의 인간관계는 근본적으로 정보를 다루는 방식과 패턴에 따라 규정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디지털 정보사회에서는 노동의 소외과정을 분석한 마르크스의 이론이 더 이상 적합하지 않은 것인가? 마르크스가 노동을 인간과 자연의 ‘직접적’ 매개과정으로 파악하였다는 점에서 매개수단, 즉 미디어가 결정적 역할을 하는 디지털 정보시대를 이해하는데 그의 소외이론이 한계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마르크스가 비록 노동을 통한 인간의 직접적 자기실현을 이상으로 설정하기는 하였지만, 들머리에서 인용한 명제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소외이론이 도구와 기술의 이중성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노동은 근본적으로 인간의 신체를 매개수단으로 하는 실천적 활동이기 때문이다. 산업사회의 노동과정에서는 인간의 신체가 매개수단으로 작용한다면, 디지털 정보시대에는 인간의 생산물인 정보 자체가 결정적 매개수단의 역할을 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만약 인간의 소외가 ― 그것이 상품이든 아니면 정보이든 ― 매개수단의 성격에 따라 결정된다면, 우리는 디지털 정보시대의 소외현상을 분석하는데 마르크스의 소외이론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다.

마르크스 소외이론의 핵심은 인간들 상호간의 관계가 직접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노동생산물인 상품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만약 노동자가 자신에게가 아니라 결국에는 자본가에 속할 상품을 만들어 낸다면, 노동자는 더 많이 일하면 일할수록 자신은 더욱 더 가난해진다. 비유적으로 표현하자면 노동자는 자신의 생명을 대상 속에 집어넣지만, 자신의 노동이 소외된 까닭에 생명은 더 이상 그에게 속하지 않고 대상에 속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를 상품으로 전락시키는 노동이 노동자의 본질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이처럼 노동자는 한편으로 자신이 만들어낸 생산물로부터 소외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과 생산과정 자체로부터 소외된다. 그렇기 때문에 소외된 노동의 산물인 상품을 통해 매개되는 인간관계는 왜곡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상품에 의한 인간노동의 소외는 결과적으로 인간에 의한 인간의 소외를 야기한다.

산업사회에서의 인간소외는 근본적으로 물화로 서술될 수 있다. 물화(物化)는 인간의 생산물이 마치 인간의 생산물과 다른 것 같다는 견해이다. 즉, 그것이 인간에 의해 생산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자연적으로 주어진 것이나 우주적 법칙의 결과 또는 신적 의지가 나타난 것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인간과 생산물의 관계는 단절되고, 인간은 자신의 환경세계에 대한 창시자적 지위를 망각하게 된다.

그렇다면 후기산업사회에서의 인간소외는 어떻게 발생하는가? 우리는 여기서 마르크스가 분석할 수 없었던 정보의 세 가지 특징에 따라 그의 소외이론을 재구성하고자 한다. 첫째, 우리는 우선 디지털 정보시대에 인간과 기계의 관계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마르크스는 노동을 대상화로 파악한다. 노동자는 감각적인 외부세계인 자연 없이는 아무 것도 생산할 수 없다. 자연은 노동자의 노동이 현실화되는 질료이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자연이 자본가의 소유이기 때문에 이미 노동자의 생활수단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할 뿐 도구와 기술의 역할은 강조하지 않는다. 이에 반해 디지털 정보시대의 핵심적 문제는 ‘인간과 기계의 관계’이다. 인간 ― 도구(기계) ― 생산물이라는 삼중관계의 관점에서 보면 산업사회는 인간 신체를 도구로 파악함으로써 인간과 생산물의 관계를 중요시하고, 디지털 정보시대는 인간과 도구의 관계를 핵심문제로 설정한다.

“신체”와 “기계”는 변증법적 관계를 이루고 있다. 산업사회의 인간은 자신의 신체를 모델로 삼아 기계를 발전시켰다면, 우리는 현재 기계에 인간을 맞추려는 경향이 있다. 신체가 신의 이미지에 따라 창조되었다는 점에서 신성한 동시에 유한한 육체이기 때문에 세속적인 것처럼, 기계는 인간 지성의 산물인 동시에 영혼을 가지지 않은 단순한 도구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디지털 정보기술과 사이버네틱스의 발전은 “기계도 사유할 수 있는가?”하는 문제를 진지하게 제기하고 있다. 오늘날 기계는 자연과 마찬가지로 중요한 인위적 환경세계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전신, 전화, 인터넷과 같은 최첨단 통신수단들은 신체들 사이의 간격을 제거하고 있다. 이처럼 인간을 기계로부터 분리시키는가 아니면 기계와 통합시키는가 하는 것은 인간관계의 성격을 논하는 데 있어서 핵심적이다. 산업사회가 인간과 기계를 비교적 분리시켜 생각하였다면, 디지털 정보사회는 ― 사이보그(cyborg)가 사이버네틱 유기체(cybernetic organism)의 합성어라는 사실에 알 수 있듯이 ― 인간과 기계가 완전히 통합된 세계를 전제한다.

그렇다면 인간과 기계를 통합하고자 하는 정보화시대는 인간을 어떻게 소외시키는가? 마르크스에 의하면 자연은 인간의 직접적인 생활수단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인간의 생명을 위한 물질, 대상, 도구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인간의 비유기적인 몸”으로 인식된다. 그렇기 때문에 마르크스는 인간의 신체적, 정신적 활동이 자연과 긴밀한 관계를 맺지 못할 때 인간의 자기소외가 발생한다고 분석하였다. 그러나 디지털 정보사회는 자연보다는 오히려 인간에 의해 창조되는 인공세계, 즉 가상세계에 우선권을 부여한다. 인간은 기계를 통해 자신의 신체를 연장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인간과 기계가 만나는 인터페이스는 경계지점이기보다는 오히려 인간의 신체가 연장되는 접속점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신체는 현재 컴퓨터 네트워크에 연결되어 있으며, 우리의 의식은 사이버 공간 속에서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정보 테크놀로지의 영향을 받으면 받을수록, 물질적 실현보다는 정보 패턴이 우리의 삶을 규정하리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다시 말해 디지털 시대의 인간소외는 기계를 인간의 비유기적 몸으로 간주함으로써 인간의 의식세계마저 기계의 수반현상으로 본다는 데 있다. 인간관계의 물화가 산업사회의 소외현상이었다면, ‘인간관계의 기계화’가 디지털 정보사회의 소외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디지털 정보는 그것을 전달하는 매체로부터 분리될 수 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 물질이 유한한 까닭은 그것이 시간과 공간의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산업사회에서 지식을 축적하는 데 가장 중요한 수단이었던 문자 역시 물질의 영향을 받았다. 우리는 책이 없으면 지식을 획득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책마저도 시간이 흘러가면 사라질 위험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디지털 정보기술은 이러한 시간적, 공간적 제약을 근본적으로 제거한다. 우리는 지식을 컴퓨터에 입력하였다가 필요할 때마다 출력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세계의 여러 곳에 있는 사람들이라도 컴퓨터 네트워크를 통해 동시에 의견을 주고받을 수 있다. 사이버 공간은 이처럼 다양한 시간과 공간이 혼합되어 있다.

그렇다면 정보의 탈(脫)물질화는 어떤 소외를 야기하는가? 인간과 기계의 통합이 인간을 자연으로부터 소외시켰다면, 정보와 물질의 분리는 인간관계를 추상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우리는 사이버 공간에서 유통되는 정보의 주체를 알지 못한다. 구술문화 시대에도 화자의 주체는 고정적이지는 않지만 당연한 것으로 전제되었고 또 문자 시대에는 지식과 주체가 동일시되었다. 모든 지식은 그것을 생산한 주체로 환원될 수 있었던 것이다. 마르크스의 소외이론도 이와 같은 저자관계를 전제한다. 예술가가 작품을 생산하는 것처럼 노동자는 생산물을 만든다. 작품과 생산물이 예술가 및 노동자와 대립한다면, 그들의 노동은 소외된 것이다. 노동자로부터 소외된 상품을 통해 형성되는 인간관계 역시 상품의 관계처럼 물화된다.

만약 정보가 물질로부터 분리되어 어떤 감각적 성질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이러한 정보를 통해 매개되는 인간관계 역시 추상적일 수밖에 없다. 마르크스는 인간이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감성적 존재라고 주장한다. 인간이 신체를 가진 감성적 존재이기 때문에 자연은 인간과 감각적 관계를 맺고, 다른 사람들 역시 우리에게 감각적으로 존재하는 까닭에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통해 비로소 자신의 감성적 존재를 직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인간이 자신을 실현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고유한 감각적 능력의 덕택이다. 디지털 정보기술은 두 가지 측면에서 인간으로부터 이러한 감각적 능력을 박탈한다. 한편으로 디지털 정보기술은 직접적 순수경험을 추구함으로써 인간의 경험이 근본적으로 매체에 의존한다는 점을 망각하게 만든다. 눈빛, 표정, 몸짓, 언어를 통해 전달되는 다른 사람의 의식은 왜곡되고 굴절될 수 있지만, 정보기술은 다른 사람의 의식을 완벽하게 직접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는 꿈을 쫓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디지털 정보기술은 정보를 물질과 분리시키는 동시에 정보와 주체를 분리시킨다. 우리는 어떤 사람의 정체성을 확인할 때 그 사람의 감각적 특징을 주로 사용한다. 마르크스는 어떤 사람의 주체성이 그의 감각적 실존을 통해 표현되고 있다고 전제한 것이다. 구체적 현실에서 우리는 어떤 사람의 이름을 모르더라도 그를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의 아이디(ID)를 자의적으로 만들어 사용하는 사이버 공간에서는 그 주체를 확인할 길이 없다. 정보의 주체와 아이디 사이에는 아무런 직접적 관계가 없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상황과 맥락에 관계없이 어떤 역할도 맡을 수 있다는 근대의 유령적 자아가 사이버 공간을 배회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정보도 그 생산주체로 환원되지 않고 또 사이버공간에서 사용되는 아이디가 아무런 의미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사이버 공간에서 어떤 윤리도 기대할 수 없다. 윤리는 근본적으로 자신의 행위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주체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정보를 물질로부터 분리시키는 사이버공간은 결국 자신의 감각적 능력과 책임의식으로부터 소외된 인간을 산출하고 있는 것이다.

셋째, 이상과 현실의 경계가 불투명해짐으로써 사이보그는 가상공간을 실체화하는 경향을 보인다. 보드리야르가 시뮬레이션이라는 개념을 통해 정확하게 분석하였듯이 감각적 경험을 직접적으로 재현할 수 있는 수준까지 발전한 현대의 디지털 정보기술은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가상세계를 만들어내고 있다. 전통적 소외이론에 의하면 이 세계를 이질적 사실성으로 체험할 때 우리는 소외를 느끼게 된다. 만약 인간에 의해 생산된 인공세계가 추상적으로 독립하여 마치 고유한 세계처럼 인식된다면, 그것은 근본적으로 이 세계를 생산한 인간의 창시자적 성격을 박탈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한계에 부딪힌다. 한편으로, 가상공간은 인간의 의식 안에서만 존재하였던 환상 및 상상의 세계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것은 우리에게 감각적 직접성을 전달하기 때문에 구체적 현실처럼 느껴지고 인식된다. 다른 한편으로, 가상공간은 추상적 세계로서 인간과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 현실세계와 분리할 수 없을 정도로 결합되어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전통적 소외이론의 물화, 추상화, 대립의 개념은 가상현실의 의미와 효과를 분석하는데 한계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인터넷과 같은 가상공간의 소외는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인가? 마르크스의 소외이론은 이 물음에 대해서도 결정적인 대답을 제공한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개인은 자신의 사회적 존재를 박탈당하였을 때 소외를 느낀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사회’를 추상물로 고정시켜 개인과 대립하게 하는 일을 피해야 한다. 개인은 사회적 존재이다. 따라서 개인의 삶의 표현은 ― 비록 그것이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공동체적으로 수행되는 삶의 표현의 직접적 형식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해도 ― 사회적 삶의 표현이요, 확인이다.” 마르크스에게는 인간적으로서 활동한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현실적 사회에서 직접 표현되고 확인되는 “공동체적 활동과 공동체적 향유”만이 우리에게 인간성의 실현을 보장한다. 따라서 개인에게 자기인식과 자기실현의 가능성을 부여하는 사회는 근본적으로 개방적이고 공공적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표면적으로는 개방적이고 공공적인 것처럼 보이는 가상공간이 폐쇄적인 사적 영역으로 폭로된다. 물론 가상공간은 인터넷을 통해 누구나 접근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개방적인 것처럼 보이고, 또 ― 카피 레프트 운동에서 볼 수 있듯이 ― 누구나 공유할 수 있는 정보가 유통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의견을 마음대로 표현할 수 있다는 점에서 공공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이버 공간은 서로 다른 사람들이 교류하는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다양한 매체들을 연결시키는 전자 링크들로 구성되어 있는 가상의 공간일 뿐이다. 인터넷 중독증에서 알 수 있듯이 많은 사람들은 인터넷의 가상공간을 “제2의 고향이면서 소속감을 느끼는 특별한 장소”로 생각한다. 인터넷을 통한 사이버 공간에서만 자유를 느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누군가와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점점 더 증대하고 있다. 오프라인에서는 다른 사람과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못한 사람도 온라인에서는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털어놓기도 한다.

그러나 심리적 또는 정서적으로 문제가 있었던 인터넷 중독자들은 현실의 문제를 회피하기 위하여 가상공간을 탈출구로 삼는다. 그들은 구체적 현실과 사회에서 해결할 수 없었던 문제를 누군가와 공유하기 위하여 인터넷의 가상공간으로 빠져드는 것이다. 그들은 사이버 공간에서 사적인 동기와 관심에 따라 이 장소에서 저 장소로 옮겨다닌다. 다시 말해 사이버 공간은 누구에게나 열려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개개인들의 사적 이해관계에 따라 연결되고 구성되는 폐쇄적 공간인 것이다. 이처럼 구체적 현실과의 연대가 없는 사이버 공간은 개방성과 공공성을 가장함으로써 실제로는 개인의 사회적 연대가능성을 박탈하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종교를 민중의 아편이라고 규정하면서 이 세상을 실현할 수 없는 것을 저 세상에러 이루고자 하는 것은 가장 보편적인 소외의식이라고 분석하였다. 마찬가지로 현대의 사이보그들은 구체적 현실에서 성취할 수 없는 사회적 연대를 인터넷을 통한 사이버 공간에서 실현하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 자신의 기호와 신념에 따라 이리저리 옮겨다니고 자신의 공간을 만드는 네티즌들은 사이버 공간에서만큼은 스스로를 마치 신처럼 느끼는 것은 아닐까? 이러한 질문들이 어떻게 대답되든 간에 디지털 정보기술이 사이보그들의 정체성을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세계로 분산시키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4. 디지털 자아의 정체성



인간은 스스로를 실현하기 위하여 미디어를 발전시킨다. 인간이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실현하기 위하여 만들어낸 미디어는 동시에 이러한 정체성 형성에 거꾸로 영향을 미친다. 구술문화가 지배적이었던 시대에 말을 통해 구성되는 자아의 정체성은 분명 문자를 중요한 의사소통 수단으로 사용하는 근대인의 정체성과 다르다. 그렇다면 음성, 문자, 이미지를 통합하는 디지털 정보시대의 자아가 이전의 자아와 다른 방식으로 구성될 것이라는 것을 쉽게 추론할 수 있다. 미디어는 단순한 수단을 넘어서 우리 자아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문화적 관점이다. 사이버 공간에서 익명의 연쇄, 비트의 연쇄를 거치면서 나의 탈육체화된 전자적 정체가 구축된다. 나는 사이버 공간에서 필요에 따라 다양한 ID를 사용할 수 있으며, 특히 나의 디지털 자아인 leechinu@kmu.ac.kr이 피와 살을 가진 이진우와 다르다는 것은 분명하다.

오늘날 우리는 디지털 정보기술이 제공하는 다양한 미디어들에 묶여 있다. 미디어는 우리 가 스스로를 바라보는 관점을 제공하기 때문에 미디어에 따라 전혀 다른 자아가 형성된다. 원근법을 사용한 회화와 사진을 바라볼 때는 예술가와 사진가의 관점에서 자기자신을 이해한다면, 영화를 감상할 때 우리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것은 이와는 다른 유동적 관점이다. 고정되어 있는 관점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사람은 스스로의 자아 역시 확고부동한 것으로 파악한다. 이와는 반대로 세계를 유동적인 관점에서 이해하는 사람에게는 자아가 유동적인 것으로 인식된다. 그렇다면 현실세계와 가상세계를 분명히 구별되었던 시대와 그 경계가 불투명한 시대의 자아는 상이한 방식으로 구성될 것임에 틀림없다. 물론, 우리의 정체성이 미디어에 의해 전적으로 규정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단지 자아의 정체성과 문화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데 있어서 미디어가 핵심적 수단이라는 사실만을 강조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현대의 디지털 자아는 어떻게 형성되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립하고 있는 소외를 극복하려면 어떤 정체성을 가져야 하는가? 우리는 우선 미디어가 우리 정체성의 표현이라는 점을 수용할 필요가 있다. 과거의 모든 문화에서 그러하였듯이 우리는 현재의 미디어를 생산하고 사용하는 주체이며 동시에 이러한 미디어들에 의해 구성되는 객체이다. 우리는 한편으로 카메라가 초점을 맞추는 대상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을 규정하는 카메라이기도 한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생생한 천연색 사진을 통해 자기자신을 확인하며, 디지털 기술을 통해 구성된 영상과 필름을 통해 세상을 바라본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편지보다는 전화를 사용하고, 시도 때도 없이 울리는 전화의 폭력으로부터 벗어나 편리한 시간에 전자우편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간단히 말해, 우리는 전화, 인터넷, 디지털 영상, 컴퓨터 네트워크와 같은 미디어들을 통해 우리 자신을 정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디지털 정보기술이 제공하는 미디어들은 다중성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미디어는 필연적으로 다른 미디어들과 ― 그것이 전통적인 것이든 아니면 다른 유형의 매체이든 ― 결합되어 있다. 예컨대 우리는 무선 핸드폰을 통해 문자 메시지를 주고받지 않는가? 현실에서와 똑같은 경험을 할 수 있도록 가능한 한 미디어의 제약을 제거하려는 디지털 정보기술의 경향은 결국 다양한 미디어들을 중첩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사이버 공간은 그렇기 때문에 음성, 문자, 이미지와 같은 다양한 미디어들이 디지털 코드로 결합되어 있는 가상현실이다. 만약 우리가 사이버공간의 가상현실에 참여하면, 우리는 역사적으로 발전된 다양한 매체와 그것에 의해 구성된 다양한 관점들이 겹으로 결합된 다중의 관점을 통해 스스로를 이해하게 된다. 컴퓨터에서 멀티미디어 프로그램을 작동시키면 우리가 방문하는 ― 텍스트, 오디오, 비디오, 그래픽을 담고 있는 ― 다양한 창들의 성격에 따라 우리의 자아와 정체성을 구성하는 미디어도 달라진다. 이처럼 멀티 미디어 시대의 자아는 그 자체 다중성을 특징으로 한다.

디지털 자아는 근본적으로 다양한 미디어에 의해 매개된 중층적 자아이다. 그것은 데카르트가 전제하였던 확고부동한 자아의 토대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선 구체적 현실의 자아와 사이버 공간에서의 자아는 그 구성논리에 있어 본질적으로 상이하다. 사이버 공간은 본래 물리적 세계로부터 분리된 논리적 공간이라는 점에서 가능한 한 매체를 제거하려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미디어들에 의해 만들어졌지만 궁극적으로는 물질적 미디어가 가지는 제약을 극복하려는 기술적 경향은 가능한 한 자신의 육체를 떨쳐버리고 순수의식에 도달하려는 사이보그의 욕망과 맞아떨어진다. 우리는 사이버공간에서 형성되는 이러한 자아를 ‘가상 자아’(The Virtual Self)라고 명명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현실적 자아는 그가 관계를 맺는 다양한 매체에 따라 상이한 방식으로 구성된다는 점에서 ‘매개된 자아’(The Mediated Self)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구체적 현실과 가상 현실이 인터페이스를 통해 연결되어 있듯이 이 두 개념은 모순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보완적 성격을 띠고 있다. 왜냐하면 자아는 자신의 본성, 즉 잠재적 자아를 실현할 수 있는 다양한 수단들을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형성되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디지털 자아의 이중성이 칸트가 구별한 것처럼 경험적 자아와 초월적 자아의 이원론을 재현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칸트의 초월적 자아가 경험적 자아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이념적 토대라고 한다면, 가상 자아와 매개된 자아는 오히려 디지털 시대의 경험적 자아가 스스로를 인식하고 이해하는 방식을 말해준다. 경험적 자아는 ― 윌리엄 제임스가 말하는 것처럼 ― “어떤 사람이 자기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모든 것의 총합”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의 자아는 물론 물질적, 사회적, 정신적인 요소들을 함축하고 있다. 우리의 물질적 자아가 신체, 의상, 집 등을 함축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의 사회적 자아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획득하는 다양한 인정들로 구성된다. 그렇다면 우리를 인정하는 다양한 개인들의 수만큼이나 다양한 사회적 자아들이 존재한다. 이러한 자아의 분산이 디지털 정보기술을 통해 더욱 더 강도 높게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만약 현실적 자아가 다양한 미디어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한다면, 우리는 분산 자체를 부정적으로 인식할 필요는 없다. 분산은 근본적으로 미디어의 중첩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오히려 다양한 미디어들을 통해 구성된 상이한 자아들을 구성하는 관점의 일관성이다. 그것은 우리가 미디어에 의해 만들어지는 객체이면서 동시에 미디어의 주체라는 사실을 올바로 인식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 그러나 우리가 멀티미디어에 의해 만들어진 가상공간에만 머무른다면, 우리는 미디어의 객체로만 존재할 개연성이 높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 스스로를 미디어의 주체로 인식할 수 있는가? 우리의 자아를 구성하는 미디어들이 다양하다면, 우리는 미디어들과 이들이 제공하는 다양한 세계들을 자율적으로 결합시킬 수 있을 때만 비로소 스스로를 주체적으로 구성할 수 있다. 물론 여기서 중요한 것은 멀티미디어에 의해 구성되는 다양한 가상세계들의 결합보다는 구체적 현실과 가상현실의 결합이다. 미디어의 시대에 우리의 정체성과 관련하여 몸의 의미가 더욱 더 중요해지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왜냐하면 몸은 한편으로는 물질적 세계와 정신적 세계를 결합시키는 수단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구체적 현실세계와 사이버 공간을 연결시키는 주체이기 때문이다. 몸이 정신을 표현하는 단순한 물질적으로 수단으로 인식될 때에도 인간의 소외는 발생하지만, 의식이 다양한 미디어들이 빚어내는 수반현상으로 파악되어도 인간의 본성은 왜곡된다. 그렇기 때문에 디지털 시대의 소외를 극복하려면 우리는 이제 정신과 육체를 각각 절대화하여 이원론적으로 대립시키기보다는 그 둘 사이의 ‘관계’를 진지하게 규명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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