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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삶의 지혜들

너와 내가 우리가 되는 사회 - 김영정


너와 내가 우리가 되는 사회

                                                               김영정(서울대 철학과)

  학생 여러분 안녕하세요. 저는 이 지면을 빌어 여러분들에게 앞으로 살아가면서 생각해 보아야할 조그만 이야기를 인생 선배로서 말씀드렸으면 합니다.
  제가 고등학교에 다닌 지가 벌써 35년여가 흘렀군요. 저는 고등학교 시절 이것저것 무척 고민이 많던 학생이었던 것 같습니다.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학교 제도가 압박으로 느껴졌고, 우리가 고민해야할 많은 문제들을 덮어두고 너무 지엽적이라고 여겨지는 문제에 매달리게 하는 학교나 주변 환경이 무척 저를 질식케 한다고 느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저는 학창시절에 문학작품들을 즐겨 읽었는데, 특히 헤르만 헤세의 작품들은 많은 감동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언젠가 ꡔ유리알 유희ꡕ의 서문 어디에선가 헤세가 고민한 중요한 3가지 인생 문제가 있는데 그것은 ‘어떻게 사느냐 하는 문제’, ‘어떻게 사랑하느냐 하는 문제’, 그리고 ‘어떻게 죽느냐 하는 문제’라는 내용의 글귀와 마주친 적이 있습니다. 그 후 이 문제들은 저에게 화두로 다가왔고, 결국 저는 철학을 공부하는 철학도가 되었습니다. 대학 입학이후 30여년 동안 철학적 문제들과 씨름해왔지만 이 문제들은 아직도 풀지 못한 숙제들로 남아있으며 아마 앞으로도 결국 풀지 못할 숙제로 영원히 남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사느냐 하는 문제는 삶의 의미와 가치에 관한 문제와 직결되어 있습니다. 가장 가치있는 목적을 추구하며, 가장 가치있는 일을 하면서, 가장 가치있는 성과물을 남길 수 있는 삶을 사는 것이 좋은 삶일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가치있는 목적이 무엇이며, 가치있는 일이 무엇이고, 가치있는 성과물이 무엇인지를 알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과연 가치있는 목적이나 가치있는 일이라는 것이 있기나 한 것일까요? 이 문제와 관련된 답변은 철학적 논의 속에서 개략적으로 3가지 유형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종교나 형이상학적 이론 속에서 그 답을 찾으려는 유형이고, 두 번째는 쇼펜하우어와 같은 염세적 내지 회의주의적 유형이고, 마지막은 자신의 결단과 자유의지 속에서 답을 찾으려는 유형입니다. 다시 말해, 첫째 유형은 종교적, 형이상학적 가르침 속에서 삶의 목적이나 의미 등을 객관적으로 찾을 수 있다는 것이고, 둘째 유형은 삶의 목적이나 의미 같은 것은 없거나, 있다 할지라도 우리가 알 수 없다는 것이고, 셋째 유형은 자신이 여러 숙고 속에서 자신의 의지에 의해 자유롭게 결단한 것이라면, 그것이 주관적이긴 하지만 삶의 목적이나 의미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삶의 목적이나 의미란 밖으로부터 객관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주관적으로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말이지요.
  여기서 제가 여러분들께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은 이러한 철학적 입장들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어떠한 입장을 택하더라도 어떻게 사느냐 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여러분들이 생각해 보아야할 보다 자명한 사실이 있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여러분들은 훌륭한 고등교육을 거쳐 사회 각계를 이끌어갈 위치에 서게 될 것으로 저는 판단합니다. 그렇지만 여러분에게 주어진 그러한 우월한 위치는 여러분들 개인에게 주어진 특권이 아니라 여러분들이 짊어져야만 하는 의무의 확대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보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이해하고 배려하고, 그들과 더불어 상생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을 희생해가면서까지 그들을 위해 헌신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물리적인 자아에 갇히지 말고, 심적 자아의 확대를 통해 너와 내가 우리가 되는 그리하여 모두 더불어 사는 사회를 만드는데 여러분들이 앞장서 주어야 할 것입니다.
  어떻게 사랑하느냐 하는 문제는 이성(logos)과 감성(pathos) 사이의 조화의 최적화(optimization) 문제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성과 감성 사이의 최적화 상태는 어떤 것이며, 어떻게 하면 그러한 최적화 상태에 도달할 수 있을까요? 나의 최적화 상태와 상대방의 최적화 상태는 같을 수 있는 것일까요? 이것 역시 어려운 문제들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인간의 삶에서 사랑이 매우 중요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우주에 만유인력이 없었다면 우주의 조화로운 운행이 불가능했듯이 인간들의 삶에 사랑이 없었다면 인간들 삶의 조화로운 진화는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여기서 여러분들에게 드리고 싶은 말씀은 단순히 사랑이 우리의 삶에서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넘어서서, 사랑하는 마음을 갖는 것 못지않게 그 사랑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방식을 익히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입니다. 영어에 ‘dogs and cats’라는 숙어가 있습니다. 개와 고양이는 서로 친구가 되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데, 그 친해지고 싶은 마음을 표현하는 방식이 정반대여서 만날 때마다 서로 그렇게 격렬하게 으르렁댄다고 합니다. 그래서 영어로 “It rains dogs and cats.”가 “비가 억수같이 쏟아진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지요. 진정한 사랑은 나의 방식대로 사랑을 가꾸어가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방식에 맞추어 사랑을 가꾸어가는 것입니다.
  독일의 철학자 마틴 하이데거는 인간을 ‘죽음에로의 존재(Sein zum Tode)’라고 했습니다. 실제로 인간으로 하여금 스스로를 반성하게 하고 겸허하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바로 인간이 지닌 한계성에 대한 인식이며, 이 한계성을 단적으로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 바로 죽음일 것입니다. 죽음의 문제는 학생 여러분들에게는 먼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죽느냐 하는 문제는 가치론의 중심적 문제로 우리 인간의 삶에서 중요한 방향타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추하지 않게, 고통스럽지 않게, 당당하게, 그리고 평화롭게 임종을 맞는 것이 좋은 죽음일 것입니다. 그러나 추하지 않은 죽음, 당당한 죽음이란 어떤 것일까요? 그리고 우리 마음대로 고통스럽지 않은 죽음, 평화로운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것일까요? 특히 인간 수명이 점점 길어짐에 따라 어떻게 죽느냐 하는 문제는 우리에게 더욱더 중요한 문제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더구나 유전자 복제와 같은 문제는 어떻게 죽느냐 하는 문제를 더욱더 어려운 문제로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죽음과 관련된 어렵고 복잡한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 인간 모두가 궁극적으로 맞이할 수밖에 없는 죽음을 통한 인간의 한계성에 대한 인식은 우리 인간의 삶을 보다 폭넓고 깊이 있게 그리고 욕심에 얽매이지 않고 진솔하게 영위할 수 있도록 인도해주는 근원적 요소가 된다는 것입니다.
  학생 여러분들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