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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삶의 지혜들

과학도의 자세 - 이정모

과학을 지망하는 젊은이에게 주는 글

 

과학도의 자세

[The Credos of a Student of Sci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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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 모

jmlee@skku.edu

http://cogpsy.skk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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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여러 해 동안 몇 개 대학의 대학원생들과 일부 학부생들을 대상으로 강의한 실험심리학 또는 인지심리학 관련 강좌의 마지막 시간에 이야기한 내용을 과학도의 자세와 관련하여 축소, 재정리한 것입니다. 이 글이 젊은 과학도들에게 학문과 과학에 대한 회의의 시간을 다만 조금이라도 줄여 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공개합니다. 과학의 길을 가려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 길을 가고 있다가 좌절하거나, 또는 목표를 잊어버리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다시 바라볼 수 있는 아주 작은 실마리라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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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면서>

과학의 길을 추구한다는 것은 인간이 수행하는 하나의 행위이다. 따라서 그 행위에 참여하는 사람의 자세, 즉 과학도로서의 자세에 대한 문제가 제기된다. 이 글에서는 과학의 길을 가려는 젊은이들이 과학에 대하여, 과학을 함에 대하여 어떠한 자세를 취하여야 할 것인가의 문제를 생각해 보기로 한다. 이 문제는 과학에 대하여 비판적인 젊은이의 주장을 먼저 제시하고, 이에 대하여 과학에 몸담고 있는 한 과학자가 반론으로 제기할 수 있는 답변을 통하여 과학도로서의 젊은이가 지녀야 할 태도 또는 자세와 관련된 문제점을 보다 부각시켜 논지를 전개할까 한다.

먼저 과학에 대한 비판들과 이에 대한 과학자의 반론을 하나씩 열거하고, 다음에 이들이 시사하는 바를 종합하기로 한다. 이어서 학문한다는 것의 본질과 심미적 쾌(快)의 추구의 본질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끝으로 노벨 의학생리학상을 수상한 훌륭한 과학자의 한 사람이었던 [이반 파블로프]가 러시아의 젊은 과학도에게 준 격려와 부탁의 말을 덧붙임으로써 이 글을 맺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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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과학의 비(非) 생동성에 대한 비판과 이에 대한 반론

[비판 1]: 과학은 나의 삶에 도움을 못 준다

인문학 및 예술과 과학이 갈등을 일으키기 때문에 과학을 따를 수 없다. 과학은 인간경험의 가장 중요한 측면을 건드리지도 다루지도 못하고 넘어간다. 생생한 삶의 고동, 깊은 체험을 가져다주지 못하며 그것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게 해주지 못한다. 시, 음악, 미술, 영적 경험, 사랑과 연민,- 이러한 인문학과 예술의 내용을 과학은 다루지 못하고 지나간다. 과학은 인간 삶의 본질적인 것을 다루지 못하며, 한 존재가 생동적으로 보여주는 현실적 삶과는 관련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과학자가 되고 싶지 않다.

[반론 1]

이러한 주장은 두 가지 측면에서 반박할 수 있다.

첫째로 과학이 시, 음악, 미술, 영적 경험, 사랑의 문제 등을 전혀 다루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문학, 음악, 미술 등의 문제들이 심리학과 다른 과학들에 의해 과학적으로 접근되고 다루어지고 있다. 문제는 단지 그 접근이 이제 시작되고, 초보적이며 부분적일 뿐이라는 점이다.

둘째로 이러한 비판이 맞는다고 인정한다고 하자. 그렇다면 유사한 반론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인문학과 예술들의 어느 하나가 인간활동의 전부를 포괄해서 설명을 하고 도움을 주는가? 문학이? 그림이? 음악이? 종교가? 이들 중의 어느 것이 컴퓨터를 만들었으며 전화를 만들었고 병의 원인을 밝혔고 약을 만들었고 치료했는가?

과학은 인문학과 예술과는 다른 종류의 것이다. 한 송이의 꽃과 한잔의 차가 서로 다르듯이 다른 것이다. 꽃이 한잔의 차보다도 언제나 낫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그들은 본질적 질이 다른 것이다. 그들은 서로 다른 목표, 다른 기능을 지니고 있으며 각자의 역할이 다른 것이다. 역할이 본질적으로 다른 것에 대해 어느 하나가 왜 다른 역할까지도 못하느냐고 묻는 것은 잘못이다.

우리가 음악이나 시를 보고 왜 사회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하느냐, 왜 정신병을 설명하거나 치료해 주지 못하느냐, 왜 신소재를 만들지 못하느냐고 채근하여 물을 수는 없는 것이다.

과학이란 본질적으로 자연의 이해에 도달하기 위한 것이다. 과학은 물질적, 심리적 자연 현상들을 이해하는 데에 그 본질적 목표가 있는 것이지, 추상적이고 정서적인 삶의 질을 고양시켜주는 데에 그 목표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목표를 과학에서 찾는 것은 과학의 본질을 오해한 것이다.

그리고 과학과 예술 또는 인문적 경험 사이의 갈등이란 과학이나 예술 또는 인문적 경험 그 자체 내에 있는 상반되는 특질이 아니라 바로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인간 내부의 마음속에 있는 갈등이다. 둘 사이에 갈등이 있다는 것은 둘 사이에 무엇인가는 비슷한 점이 있다는 것이며 그것은 곧 둘 다 인간의 지적 능력의 결과이며, 인간의 마음을 사용한 인간활동이라는 점이다. 그 이외에는 아무런 같은 점도 없다. 그런데도 과학과 예술의 둘을 상반되고 갈등되는 것으로 본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그들은 각각의 본질과 기능과 목적이 서로 다르다. 본래적으로 서로 다른 것을, 서로 갈등되고 상반된 것이라고 간주하며 하나에게 왜 다른 것과 같지 못하냐고 힐난하는 것은 잘못된 태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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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 2]: 과학의 영향은 나쁜 것이다

과학의 영향은 나쁜 것인데 왜 내가 과학을 추구할 필요가 있는가? 원자탄의 폐해와 각종 과학기술로 인한 환경 오염을 보라. 과학의 영향이 과연 좋다고 할 수 있는가?

[반론 2]

이러한 주장은 현실을 잘못 알고 있음을 반영한다. 과학의 영향이란 단연코 좋은 것이다. 단, 그것은 세상의 삶을 윤택하게 해준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인간의 무지를 감소시켜 준다는 의미에서 좋은 것이다. 과학이 부정적인 영향을 세상에 끼쳤다면 그 영향은 실상은 과학의 영향이 아니다. 과학적 발견을 사용한 사람들이나 정책 등의 잘못이지 과학 자체의 부정적 영향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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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 3]: 숫자, 통계, formalism의 비판.

숫자, 통계, 형식체계 등을 사용하여 과학이 무엇을 알아낼 수 있다는데 대해 믿지 못하겠다. 동의하지 못하겠다. 자연의 현상의 상당한 부분은, 특히 인간적 현상은 그러한 수리적 조작이 가능한지 않은 현상이다. 수리적 공식, 통계에만 의존하는 그러한 과학은 별로 의미가 재미가 없다.

[반론 3]

과학이란 인간적 노력이요, 시도다. 하나의 시발점인 idea에서부터 최종적 일반화된 이론 확인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단계의 중요한 지적 절차를 거친다. 이 과정에서 일부의 작은 부분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 숫자, 통계이다.

지금까지 이 부분들이 너무 강조되어왔기 때문에 이들을 마치 나무로 보고 숲을 못 보는 위험이 초래되었다. 그러나 숫자, 통계가 과학의 전부는 아니다. 과학의 전부라고 생각하게 됨직한 것도 있을 수는 있는 일이나, 그것은 보는 사람의 잘못일 수 있다. 지엽적인 세부내용들을 전체로 일반화하여 과도하게 확대 해석하는 잘못이다. 수리화나 통계적 처리가 중요하지만, 그 이전에 더 중요한 것은 현상에 대한 창의적인 개념화이다. 어떤 새로운 개념틀로 생각하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뒤에서 언급하겠지만 과학의 본질은 이론을 형성하고, 자료를 통해 이론의 타당성을 확인하고, 그를 통하여 하나의 이론 또는 가설이 더 가능성 있도록(more probable) 하는 데에 있을 뿐이다. 숫자, 통계, 또는 형식적 체계(formalism)는 이러한 더 나은 이론으로의 추구라는 본질에 이르기 위하여 사용되는 하나의 부분적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본질이 아니라 수단인 수리와 통계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신비한 자연현상을 과학적으로 파헤쳐 가는 그 지적 추구의 높은 이상과, 깨달음의 지적 쾌(快)를 버리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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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 4]: 구체적이고 살아있는 사람과 더불어 살고 싶다.

인위적 실험실내의 실험실에 묻혀 살기보다는 자연적 인간, 실제로 사회현실에서 살아있는 실제의 인간과 더불어 살면서 살아있는 인간들의 생생한 문제들을 다루고 싶다. 살아있는 생동적 인간 개개인들과 감정적 유대를 가지며 그들의 생생한 문제들을 돕고 함께 살고 싶다.

[반론 4]

좋다. 그것은 개인적 선호와 개인적 가치의 문제이다. 존재론적으로 보아, 살아있는 한 사람을 이해하고 도울 수 있다면 그것은 소중한 일이다. 많은 젊은이들이 그러한 길로 나가야 한다. 그런데 다른 한 측면을 생각해 보자. 나 자신에게는 어떤 가까운 몇몇 사람을 직접 도와주는 것이 더 중요할까, 아니면 수많은 사람들, 즉 인류에게 보편적으로 도움이 되고 적용될 수 있는 발명이나, 이론 및 법칙의 발견의 길을 가는 것이 더 중요할까? 이는 소승불교 대 대승불교의 문제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과학을 하고자 하는 한 학도의 도덕적(넓은 의미의) 결정의 문제이다. 어느 길을 가건 자기 자신의 삶의 의미를 찾아 자아를 실현할 수 있는 길이다. 선택을 해야 한다.

여기에서 한 쪽의 편을 들어 과학적 연구의 길을 가는 것을 옹호해 보기로 한다. 수많은 의학적, 물리학적, 생물학적, 공학적 발견과 발명의 역사들을 살펴보자. 그러한 발견과 발명을 한 사람들이, 예를 들어 파스퇴르나 아인슈타인이 그러한 발견이나 발명보다는 자신의 주위에 있는 몇몇 사람을 직접적으로 돕는 것에 모든 정열을 집중했거나, 그들과 좋은 감정적 유대를 지닌 생동적인 삶의 추구만을 계속했다면 물리학이나 화학이나 생물학의 원리들, 의약품, 병의 치료법, 문명의 이기 등등이 발견되거나 발명될 수 있었을까?

특정 개인에 대한 도움과 인류 전체에 대한 보편적 도움이란 서로 다른 성질의 인간활동이다. 어느 쪽을 따를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자신의 능력이 어디에 있는가, 자신의 기질적 성향이 어떤 것인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가를 명백히 알아서 결정해야 한다. 일단 결정한 후는 그 영역 내부가 지니는 제한된 특성을 인정하고 거기에 자신을 투입, 몰입(commit)해서 봉사, 봉헌해야 한다.

그런데 혹시, 당신은 보다 더 많은 것을 발견할 수 있는 자기 자신의 능력에 대해 과소평가하고 있지는 않는가? 보다 광범위한 영향을 끼칠만한 중요한 발견이나 발명 또는 이론 정립을 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그만한 능력이 있음을 생각해보려 하지도 않고 구체적인 현실의 몇몇 인간을 도우려하는 것은 아닌가? 아니면 과학도의 길을 가는 것이 너무 어렵다고 쉽게 속단하여 쉬운 길을 찾으려 하는 것은 아닐까?

누군가는 현실적으로 구체적으로 주변의 사람들을 도와주고 그들의 살아 움직이는 친구와 조언자로서의 역할을 해야 한다. 그것은 인본적으로, 실존적으로 아주 중요하고 가치있는 일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또 다른 한편에서는 누군가가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것을 발굴해내기 위한 수고를, 작업을 또한 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전자와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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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 5]: 상식적 수준의 설명으로의 도피

세상을 살아가며 이해하는 데에 굳이 과학을 할 필요가 없다. 어려운 과학적 설명보다도 상식적 수준의 설명이 더 좋다.

[반론 5]

그저 평범한 시민이라면 그런 식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식의 생각은 잘못된 편견과 무지(ignorance)를 세상에 계속 잔존시키게 된다. 상식적인 생각이나 이해가 참과는 틀린 경우가 많음을 과학적 연구들은 보여주고 있다. 상식적 이해와 설명은 오판과 오해를 가져오는 경우가 많다. 상식은 현상에 대해 체계적인 설명을 주지도 못하며, 동일한 현상을 상반되게 설명하는 갈등적 입장, 이론에 대해 어느 것이 옳은지 해결을 주지도 못하며, 그 견해(실상은 하나의 믿음이지만)가 어느 정도나 타당한지도 알려주지 못한다. 상식적 언어에서는 흔히 비결정적이며 모호하고 명료성이 결여된 그러한 용어들, 즉 반증이 될 수 없는 용어들을 사용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상식적 설명이란 객관성과 보편성이 결여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의 인지적 능력의 한계 때문에 우리는 상식적 설명을 타당한 설명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잘못을 흔히 범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알면서도 오판과 잘못된 해석이 개입되는 상식적 설명에 만족할 것인가? 검증되지 않은 상식적 설명을 따른다는 것은 지식의 축적을 이루지 못하며, 인류의 무지를 줄이지도 못하며, 과학을 하며 미지의 세계를 밝혀 가는 지적 쾌를 가져다주지도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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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 6]: 과학의 진리 도달 가능성에 대한 회의

과학은 참, 궁극적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 과학이 과연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가? 물리학을 보라. 아직도 물리현상에 대한 종국적 진리에 도달하지 못하고 계속 새로운 이론들이 대두되어 이전의 이론들이 무너지고 있지 않는가? 과학이 진리에 과연 도달할 수 있을가에 대해 나는 본질적으로 회의한다. 따라서 나는 과학자, 과학기술 학도가 되고싶지 않다.

[반론 6]

과학이 절대적 진리를 가져다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과학이 단숨에 완벽한 지식, 완벽한 진리를 가져다 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은 과학을 잘 모르는 초보자나 학문에 몸을 담지 않는 일반인들이기 쉽다. 과학철학적 입장을 빌어서 엄밀히 말하자면, 완벽한 과학적 진리란 획득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시간이 지나고 학문이 성숙하고 계속해서 연구하고 일한다면 언젠가는 자연 현상들에 대한 완전한 이해와 지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천진한, 그러나 불행하게도 엉뚱하게 형성된 오도되고 그릇된 믿음이다. 과학에서는 절대적 참인 지식은 결코 확립되거나 획득될 수 없다. 진리에 보다 더 가까운 지식, 그러나 항상 부분적인 지식, 부분적 이해에만 그친다. 진리에 보다 더 접근한 앎을 낳는 것이지 진리 그 자체를, 더구나 단숨에, 얻는 것이 아니다.

'진리의 획득'이라는 완성, 달성의 목표를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 참에 더 가까이 가려하는 과정으로서의 인간의 노력이 과학인 것이다. 과학적 진리란 우리가 추구하면 도달할 수 있는 가시적 목표도, 또 가고 또 가도 도달할 수 없는 지평선도 아니다. 과학적 진리란 과학자가 자기가 관심을 갖고 있는 영역에서 자신의 지식에 어떤 간격(틈새; gaps)이 있음을 인식하고 이를 참지 못하여, 그러한 자신의, 그리고 인류의 무지를 조금이나마 줄여보자고 계속 물음을 던지고 관찰하며 탐색하고 새로운 물음들을 이론적으로 형성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구성해나가고 또 딛고 가는 대지와 같은 것이다.

진리란 현재의 오늘에 있어서 어떻게 생각되어지느냐가 중요하다. 과학이란 영구불변의 절대적 완전한 해답을 추구하는 체계가 아니라 무지를 감소시켜주는 체계적 과정의 총체인 것이다. 과학이란 무지를 감소시켜 가는 강력한 도구이다. 완전무지에서 부분적 무지로, 부분적 무지에서 보다 적은 무지로 점진적으로 옮겨가게 하는 숭고한 작업이 과학적 작업이다.

따라서 과학적 지식이 불완전하다고 해서 과학을 기피하는 것은 과학의 본질을 오해하고 있음에서 비롯된 잘못된 관점이다.

우리는 과학에 신뢰를 가져야 한다. 과학의 좋음에 대하여 믿음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과학이 절대적 진리, 지식에 도달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과학의 본질을 이해하여야 한다. 비록 자연현상에 대한 절대적 영구불변의 참인 완벽한 지식을 얻는다든지 이해한다는 것은 우리가 도달할 수 없는 저 너머의 것일 수는 있지만, 적절한 과학적 방법론을 사용하고 적절한 조건들이 충족된다면 자연현상의 대부분에 대해, 비록 제한적이긴 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의 이해를, 상당히 근사한 이해를 획득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과학은, 그 핵심이 본질적으로 인간들의 지식의 무지를 감소해 나아가는 작업일 뿐이다.

당신과 같은 비판을 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사실상 아무 일도 안하고 있는 사람들일 수 있다. 자신의 개인적 욕구중심으로 제자리에 맴돌고 있는 것은 아닌가? 어떤 한 가지 물음에 대하여 자신을 전적으로 던져 넣어서, 몰입하여 파고들지 않으면서 감히 그런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도대체 최근에 어떤 기본적인 문제에 대하여 당신의 온 시간과 노력을 던져 자아를 잊고 몰입하여 앎을 넓히려고 얼마나 노력했는가? 그러하지 않고 비판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사람들은 어떠한 상황을 판단하는데 있어서 한 측면만 보고 그 특성을 과다하게 일반화하는 경향이 있다. 현재의 과학이 만족스러울 만큼 아무 것도 밝혀주지 못한다는 것은 하나의 편견이다. 일부 측면만을 강조하여 보고 그것을 일반화하여 과대 해석한 것이다. 실제로 과학의 연구 결과들은 당신이 몰라서, 아니면 의도적으로 무시해서 그렇지, 아주 작은 물질의 특성에서부터 복잡한 인간의 뇌의 작용과 심리현상까지 많은 것을 설명하여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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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 7]: 자신의 능력에 대한 회의

과학이 좋다는 것을 인정한다고 하자. 그렇긴 하지만 나 자신은 아무리 노력해도 무엇을 이루어 성취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니, 나 자신은 도저히 학문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반론 7]

그것은 어린아이와 같은 겁먹음, 수줍음이다. 이것은 문을 밀어 보지도 않은 채 문을 두드려 보지도 않은 채, '문이 안 열린다', '문을 열 힘이 없다'고 돌아서려는 그러한 사람의 태도이다.

자연은, 신은, 그리고 운명은 자기 자신을 온몸 전체로 던져 뛰어드는 사람을 무시 못한다. 기회는 자신의 한계에 대해 선입견 없이 과감하게 도전하는 사람에게 찾아온다는 현인들의 말을 기억하지 못하는가?

이따금 당신은 과연 당신 자신이 모든 인간에게 광범위하게 적용될 수 있는 법칙과 이론을 발견해 낼 수 있을까? 무언가 조금이라도 학문적으로 공헌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을까? 그러한 능력이 당신에게 있을까 하고 의문을 던지겠지만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왜냐하면 첫째로 학문은, 그리고 과학은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과학이란, 학문이란 다른 사람과 더불어 하는 것이다. 다른 연구자들과 함께 종사하며 몰두하는 일이다. 당신 스스로 무언가의 결정적인 발견, 발명을 하고 이론을 정립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들의 그 순수한 노력, 연구에의 디딤돌을 만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것이다. 또 어떤 분야의 연구를 이해하고 그 내용과 중요성을 그저 부각시키거나 이를 후대에게 가르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의가 있는 것이다.

둘째로 자신에 대해 그러한 학문적, 지적 능력이 없을 것이라고 의심하는 것은 가장 바람직하지 못한 행동이며 죄악이다. 영국의 유명한 경험론적 철학자 Bacon이 말했듯이 죄악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능력으로 가능한 범위 내에 있는 일이나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그러한 자기 능력과 실현의 가능성을 부정하고 포기하는 것이다.

뛰어난 과학자란 노력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지 선천적 知적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특히 학문적 업적이란 기발한 기지보다는 불굴의 끊임없는 노력에 의해 가능한 것이다. 창의적인 사람들에 대한 최근 심리학적 연구에 의하면,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는 것은, 어떤 아이디어를 현실화, 구현하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을 경주하는 성향보다 중요하지 않다는 결과가 제시되고 있다.

또한 많은 과학자들의 자서전적 이야기를 들어보면 대부분의 과학자들, 유명한 과학자들도, 자신의 능력에 대하여 끊임없는 회의를 한 것이 사실임이 드러난다. 아마도 자신의 능력에 대해 회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면, 몇 백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천재들이나 아니면 과대망상증적 정신병자나 백치들일 뿐일 것이다. 삶을 성실하게 살아가는 인간은 항상 자신의 능력에 대한 회의를 하게 마련이다. 당신만의 고민이요 문제가 아니다. 과거의 수많은 양심적 과학자들도 당신과 똑같은 회의를 해왔다. 중요한 것은 회의하면서도 성실히, 자신의 능력이 모자란다고 생각하니까 더욱 더, 그리고 과학하는 것이 좋으니까, 자신의 온 힘을 다하여, 열심히 노력하는 그러한 진지한, 성실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과학은, 학문은, 성취의 문제가 아니다. 과정의 문제다. 역사가 있은 이래 지금까지 그리고 또 한없는 저 미래의 어느 날까지도 인간의 무지를 조금씩 줄여 가는 저 수 많은 사람들, 작은 깨달음에, 작은 발견, 발명에 만족하는 저 수많은 묵묵히 일하여온 이름없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지적 연결고리의 대열에 함께 참여하여 후대에의 지적 연결고리의 이음이 되어주는 것이다. 설사 당신이 아무런 과학적 업적을 못 이룬다 한들 그것이 왜 문제가 되는가. 저 기나긴 지적 고리의 대열에 잠시나마 하나가 된다는 것, 그 고리의 대열 곁에 함께 머물며 자기 생각의 호수 속에 표류하며 이미 흘러간 수많은 사람들이 이루어놓은 생각, 개념, 이론, 주장들을 활용하며 그 속에서 그들 선대의 연구자들과 하나가 되며, 또 뒤이어 올 사람들과 하나되어 이 거대한 앎의 역사적 흐름의, 바다의 한 부분이 될 수 있다는 기쁨, 그 기쁨처럼 순수하고 지극한 것이 무엇인가? 당신이 무엇을 이룰 수 있을까에 대한 어린아이 같은 겁먹음과 의심은 던져두고, 이 넓고 끝없는 인류의 지적활동의 연결된 역사적 고리의 흐름에 잠시 몸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목표 달성이 아니라 하나의 과정으로서 그 안에서의 실존으로서 만족해야 한다. 이득과 손실, 성취, 업적 그리고 실패 여부에 괘념하지 말고 몸을 던져 문을 두드려야 한다. 시도해 보아야 한다.

자신에 대한 회의와 학문의 어려움 속에서도 과학자들이 기본적으로 지녀야 할 태도를, 작가 Irving Stone은 그의 소설 '마음의 정열(Passions of the mind)'에서 젊은 Freud가 정신분석학자가 되기 이전에 신경생리학도로서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말속에서 짤막하게 잘 표현해 주고 있다. 이 표현을 우리가 상당히 확대하고, 각색하고 부연하여 다음과 같이 달리 표현해 볼 수 있다.

"나는 내가 뉴턴이나 다윈이나 파스퇴르 같은 위대한 사람이 될지 아닐지는 잘 모른다. 아니 그런 위대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의 바람과 소망은 오히려 보다 자그마한 것이다. 모든 위대한 발견이나 이론이 세상에 그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무명의 연구자들이 벽돌을 하나 하나 얹어 놓듯 아주 자그마한 발견을 했고 작은 보탬을 했음으로써 가능하였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익명의 상태에서, 협소한 집안 귀퉁이에서, 허름한 창고에서, 초보적 연구실에서 빈약한 연구기구를 가지고 수 없는 시간들과 나날들을 자신의 아이디어와 씨름하다가 사라져간 저 수많은 무명의 연구자들! 그들의 작은 연구들, 그러한 자그마한 연구결과들의 보탬이 조각조각 이어지고 모이여 쌓여지지 안았더라면, 저 위대한 발명가나 이론가도 그의 업적을 이룰 수 없었다. 나는 이러한 자그마한 보탬으로서, 조각조각의 지식을, 벽돌을 쌓아 올려 가는 저들 수많은 알려지지 않은 연구자들의 한 사람으로서 그저 단 하나의 벽돌이라도 얹어 놓을 수 있기 위하여 나의 인생을 온통 바치고 싶을 뿐이다.

역사적으로 과학을 비롯한 인류 문화는 저 수 많은 사람들의 지적 작은 연결 고리들이 고리고리 이어져 내려왔기에 가능했다. 그 작은 고리 하나 하나가 없었더라면 오늘날의 우리의 이러한 발전된 문화도 학문도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 세대와 그 다음 세대, 그리고 그 뒤의 세대를 잇는 저 기나긴 지적 연결고리, 참 멋진 것이다. 우리의 마음을 깊이 울려주는 그러한 인류의 숭고한 지적 연결고리이다. 바로 이러한 지적 연결고리의 대열에 나도 참여하고 싶다. 이 인류의 숭고한 역사적, 지적 대열에 참여하여, 인류문화의, 그리고 지적 역사의 띠와 띠, 고리와 고리를 이어주는 무명의 작은 한 고리로서 한 띠로서 그리고 벽돌 하나로서 나의 일생을 바치고 싶다. 그러한 작은 연결 고리로서, 작은 하나의 벽돌로서 일생을 바칠 수 있는 데에 대해 감사한 마음으로 만족하며 제단 앞의 승려나 사제와 같은 경건함과 봉헌의 마음으로 열심히 살고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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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과학을 추구하는 과학도의 긍정적 자세: 종합

여러분이 역사적으로 끊임없이 이어져 나아가는 과학이라는 인류문화의 중요한 작업에, 자신이 함께 참여하여, 그 숭고한 지적 고리와 고리의 연결의 한 고리로, 한 매듭으로, 한 벽돌로 자신이 몰입하며 값있게 사는 것을 자신의 일생의 지향할 바라 생각하고 과학의 길에 동참하겠다면, 그러한 과학도로서의 당신이 지녀야 할 자세를 한번 줄여서 정리하여 보자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1) 과학이란 자신이 혼자 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함께 이루어 내는 것임을 인정하고,

(2) 과학의 길이 긴 여정의 작업임과, 눈에 드러나는 결과나 보상을 과학 자체가 즉각적으로 가져오지 않음을 인정하고,

(3) 과학적 작업이란 본질적으로 끊임없는 탐구의 과정(process)임을 인정해야 하며,

(4) 그리고 겸손해야한다 - 자신의 지적능력과, 성과와, 이론과, 자료와, 자신의 역할에 대하여.

그러하기 위해서는;

(1) 과학에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 - 무지를 줄여주고 자연세계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는 것에 대해, 그리고, 자신이 이루지는 못할지 모르나, '나'를 근거로 '나'라는 연결고리에 의해, '나'라는 벽돌을 딛고 다른 사람들이 이룰 수 있다는 것에 대해 믿음 을 가져야 한다.

(2) 장기적 만족(long-term gratification)을 추구해야 한다. - 즉각적 만족, 보상을 얻으려고 할 것이 아니라 더 위 수준의 긴 안목의 만족과 보상을 바라야 한다. 즉 한술에 배를 불리려 하지 않아야 한다. 순수한 지적 탐구의 쾌를 최상의 목표로 삼아야 한다.

(3) 남이 발견해놓은 것(지식)을 활용하는 소비자(User)가 아니라, 지식의 발명자, 창조자, 탐험자로서의(Explorer, Inventor, Doer)의 삶을 살아야 한다.

(4) 무엇보다도 자신의 생각의 흐름 속에서 '무엇일까?' '왜 그럴까?' '이렇게 하면 어떻게 될까?' 하는 물음을 늘 던지며 생각 속에 빠져 들어가며 새로운 아이디어를 생성해내고, 그런 과정에서 다른 과학자들의 사상과 아이디어와 고민과 만나는 그러한 지적 기쁨의 정적(頂點) 경험(peak experiences)을 추구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5) 어떠한 제2, 제3의 목적이 있어서 보다는 그저 자연을 알기 위하여, 그 자연에 대한 이해 를 위해 한 발이라도 더 가까이 가기 위하여, 또 우리 인간이, 아니 내가, 이해해주기를 기다리는 자연현상이 있으니까, 연구한다는 자세를 지녀야 한다.

그러나 유의해야 할 점이 있다. 승려가, 사제가 겸손과 경건과 끊임없는 노력과 수도를 하듯이, 과학자가 자연에 대하여 그 신비를 드러내고 그 신비에 대한 작은 깨달음을 맛 보기 위하여서는 사제가 신에 대해 지니는 그러한 겸손과 경건과 끊임없는 노력과 수도를 필요로 한다. 사제는 신의 진실이 거기에 있다면, 그리고 일단 그 진실의 빛을 본 이후에 는 자신의 사사로운 욕심과 편하여지고 싶은 마음의 유혹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을 닦아 수도를 한다. 마찬가지로 과학자도 과학의 사제로서 과학의 길에 들어서면 편하게 지내고 싶은 안일에의 유혹을 이겨내야 한다. 또한 논리적이고 머릿칼을 헤아리는 분석적인 태도 만 지녀서는 자연의 참 모습을 보기 어렵다. 자연은 항상 분석과 종합, 통합의 사이클을 거치는 자에게만 그 자신을 부분적으로 드러내어 준다. 단순히 논리적 분석의 면에만 치 우쳐서 숲을 못보고 나무만 보는 수준에 그치지 않기 위해서는 종합, 통합하는 힘을 길러 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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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학문: 순수한 심미적 快의 추구 노력 (The Pure Aesthetic Pleasure Seeking Endeavors)

과학을 한다는 것, 학문을 한다는 것도 인간 삶의 한 형태이다. 그래서 인간 삶의 형태 중의 하나로서 과학과, 학문을 한다는 것을 과학적 엄밀한 언어라는 울타리를 넘어서 상식적 수준에서, 인문학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즉, 과학한다는 것 그 자체의 의미를, 의의를, 경험과학이 아닌 수준에서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과학한다는 것, 학문한다는 것에 더 깊은 의의를 부여하기 위하여 실증주의적 과학자라는 제약을 벗어나서, 상식적 용어를 사용하여 '학문한다는 것'을 서술해 보기로 하자.

여러분들이 이미 다 생각해 보았던 것이겠지만 과학한다는 것, 학문한다는 것은 지적, 심미적 快(aesthetic pleasure)의 추구와 열정적 추구 노력(passionate endeavours)이라고 할 수 있다. 과학한다는 사람들 내부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이 심미적 쾌의 추구, 열정적으로 덩어리져 있음, 새로운 하나의 지식의 실마리는 잡고 있으나 아직 알려지지 않은 커다란 지식 덩어리에, 온갖 다양한 모습을 보여줄 그 지식덩어리에, 그 미지의 것에 대해, 마치 어린아이들처럼 매료되어 신기해하고 호기심을 갖고, 조금이라도 더 알게되는 것에 흥분하고, 새로운 앎이 낳는 더 큰 무지의 도전에 솔깃이 빠져 들어가서 그 미지의 신비를 하나, 둘 껍질을 벗겨 가는, 또 그로 인해 자신의 지식구조가 다시 짜여지고 풍부해져 가는, 마치 시냇가에 징검다리를 놓아 가는 천진한 아이들처럼 흥분하며 즐기며 빠져들어가는 이들. 그들의 순진무구한, 순수한 지적 쾌를 추구하는 순수한 쾌락주의(pure hedomism)! 이미 알려졌던 것, 자기가 알고 있는 것, 그리고 자연과 우리의 생각하는 힘이 드러내 보여준 작은 새로운 지식, 이 모두들을 연결시키서 그것을 종합(orchestrate)하여 하나의 조화되고 신선한 지적 구조의 미를 창조해 나아가려는 심미적 미에의 갈구! 이러한 것이 있어서, 이러한 사람들에 의해 지금까지의 여러 학문이, 과학이 발전해왔고, 발전해가고 있는 것 같다. 과학하는 사람들의, 즉 나이든 어린이들의 순수한 심미적 쾌의 추구에 의해 우리 인간의 문화가 이렇게 발전해 올 수 있었던 것 같다.

"Pure hedonism of seeking intellectual aesthetic pleasure!" 근사한 것이다. 이것은 이를 추구하는 사람들 내부에 커다란 강력한 힘으로 둘레둘레 엉기어 있다가 강력히 풀어져 나오는 것 같다. 그것이 신체적 힘으로도 폭발될 수도 있겠다. 소크라테스처럼. 이러한 순수한 지적 미의 추구는 단순히 빛 바래고 정제된(distilled) 사고나 눈앞의 현실적 이득 추구의 생각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보다 근본적인 것에 대한 어떠한 열정적 갈구, 노력에서 나오는 것 같다. 단순히 사변적 추론에 의해서 무엇을 알고 싶다, 하고 싶다라고 결정이 되는 것이 아니라 각 개인 삶 전체, 감정과 지적 실존의 모든 것이 뭉뚱그려져 나오는 것 같다. 답습된 삶, 남들에 의해 이미 주어진 나의 앎, 생각(idea)덩이 속에서 -즉, 부모가, 다른 학생이, 주변 일반 사람들이 선호하는 세속적인 잘 나가는 직업을 선택하고 거기에서 안주하여 그냥 저냥 일생을 산다는 생각 속에서 - 그냥 살아가려 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자기 내부에서 계속 꿈틀거리는 그런 갈구를 느끼며, 자기 나름대로 충실한 삶을 사는 것, 지적 쾌, 창조와 새로운 것을 형성해 나아가는 것에서, 무지를 깨어가는 것에서, 어떤 격렬한 순수한 지적 쾌감의 승화를 추구하는 것 같다. 아니 본래적으로 격렬한 것이 아니라 열정을 어떤 미로 표현하는 과정적 의미에서 격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과학도들인 우리 자신 속에 서리어 있는 격렬한 잠재력, 또는 갈구는 사실은 순수한 심미적 쾌를 추구하려는, 그리고 실현하려는 순수하고 순진한 목마름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열정, 정열이 없이 공부한다, 학문한다는 것은 힘든 것 같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의 부족함, 미지의 가능한 것과의 간격(틈새)이 있음, 이미 알고 있는 바에서 막연하게 희미하게 알고 기대하는 어떤 새로운 앎, 이미 알고 있는 바가 시사하는 어떤 것, 또는 알고있는 바의 불충분에서 오는 심리적 불안, 갈등! 그러한 것들을 심미적으로 참아내지 못하고 이를 채우고 찾아내고 충족시키고 새로운 미로 만들어 내려는 지적인 쾌 추구에의 갈구, 노력! 이런 것 없이 과학, 학문한다는 것은 사이비인 것 같고 상상할 수 없는 것 같다. 이러한 심미적 인지적 쾌 추구의 갈구는 개인의 정서적 양식과 삶의 전체에서 온다고 볼 수 있겠다. 이러한 갈구는 단순히 차가운 논리적 사고의 전개, 반복만으로는 불가능한 것 같다. 과학철학의 논의에서도 보면, 과학이라는 노력을 구성하고 움직여 나아가고 있는 것은 차가운 논리적 추론이 주축인 것 같지는 않다. 열정이 없는 이성만으로는 과학문화를 형성하고 인식적, 지적 일을 계속하지 못했을 것이다. 지적, 심미적 쾌를 추구하는 정열적인 마음을 가진 사람만이 과학을 제대로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한 정열이 없는 차가운 논리적 두뇌의 활용 및 과시는 표면적 삶을 유지하는 사이비 과학자에게나 가능할 것 같다.

타산적으로 계산함 없이 자기 자신의 이득 손실을 가늠함이 없이, 지적 심미적 쾌를 추구하는 데서 오는 어떤 부수적인 보상이나 강화의 양을 고려함이 없이 자신을 온 전체로 그대로 던져 넣는 열정적인 사람만이 진정코 열정적인 과학의 길을 갈 수 있고, 지치지 않으며, 항상 신선함을 지니며, 새로운 지식, 새로운 미를 나누어주며, 다른 그러한 지적인 심미적 쾌의 추구에서 오는 상승적인 경험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맛보게 할 수 있으며, 앎의 길에서, 감정적, 정서적 길에서 주위사람들에게 심후한 영향을 주며, 계속 새로운 앎을 스스로 더욱 추구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순수한 열정, 순수한 심미적 쾌의 추구가, 또는 그러한 엉클어진 갈구가 지금의 일부 약은 학생들에게는, 부와 편리를 추가하며 세속적 잘나가는 직업을 추구하는 젊은이들에게는 없는 것 같다.

그러면 이러한 열정적 갈구를 내가, 우리가 가지고 있는가? 아니면 또 얼마나 그것이 순수한가? 또 이러한 순수한 열정을 일으키고 유지시키는 조건은 무엇일가? 과학을 하는 우리는 나 자신이나 다른 사람이나 이러한 열정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자신에게 그러한 순수한 열정이 있음을 주장해야 한다. 믿어야 한다. 그것 없이는 모든 것이 맥없이 허물어지고 의미가 없어질 것 같다. 우리들은 그러한 열정을 지니고, 작은 하나의 벽돌을 쌓는 것에 감사히 만족해하는 그러한 겸손한 자세로, 그러나 쉽게 굴하지 않는 그리고도 성실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그러한 학도가 되어야 할 것이다. 과학이라는 저 거대하고 끝없는 인류문화 역사의 지적 연결고리의 한 부분이 되기 위해 순수한 열정으로 하루 하루를 성실히 살아야 하겠다. 인간과 과학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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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Last Will and Testament

- Ivan Petrovich Pavlov -

What would I wish for the youth of my fatherland who devote themselves to science?

First of all -- Consistency. I can never speak without emotion of this most important condition for fruitful, scientific work. Consistency, consistency, and still more consistency. From the very beginning of your work train yourselves to be strictly systematic in amassing knowledge. Learn the ABC's of science before attempting to ascend its heights. Never reach for the next step without having master the preceding one.

Never attempt to cover up the gaps in your knowledge by even the most daring conjectures and hypotheses. No matter how the coloring of this bubbles may please your eyes, it will inevitably burst leaving you with nothing but confusion.

Train yourselves to discretion and patience. Learn to do the manual labour in science. Study, compare, and accumulate facts. No matter how perfect a bird's wing, it could never raise the bird aloft if it were not supported by air. Facts are the air of the scientist. Without them your "theories" are useless efforts.

Yet, while studying, experimenting, observing, try not to stop only at the surface of facts. Do not become an archivist of facts. Try to penetrate the mystery of their origin. Seek persistently the laws governing them.

Second, modesty. Never think that you already know everything. No matter in what high esteem you are held always have the courage to say to your self: "I am ignorant." Don't allow yourself to be overcome by pride. On account of pride you will be stubborn where it is necessary to be conciliatory; you will reject useful advice and friendly assistance; you will lose your sense of objectivity.

In the group which I am called upon to direct, atmosphere is everything. We are all harnessed to one common cause and everyone furthers it to the best of his strength and ability. Frequently we can not distinguish what is mine and what is thine, but through this our common cause only gains.

Third, passion. Remember science requires your whole life. Even if you had two lives to give it would still not be enough. Science demands of man effort and supreme passion. Be passionate in your work and in your quests.

Our fatherland open broad vistas to scientists, and we must truthfully say science is being generously introduced into the life of our country. Extremely generously.

What is there to say about the position of a young scientist in our country? It is perfectly clear. To him is given much, but of him much is demanded. And it is a matter of honour for the youth, as well as for all of us, to justify those great hopes which our fatherland places in sci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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