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세상이야기/세계&역사

[펌]박영효 (朴泳孝, 1861∼1939 ) -윤해동(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 서울대 강사·한국사)

박영효 (朴泳孝, 1861∼1939 )

                          친일 거두가 된 개화파 영수

1910년 후작.
1911년 조선귀족회 회장.
1921년 조선인산업대회 회장
1939년 중추원 부의장

'개화파'의 영수에서 '친일'의 거두로 일제의 조선병합은 조선역사상 신시대를 획한 것……역대총독의 노력과 관민의 노력으로써 정치, 경제, 산업, 교통 등 제시설이 착착 발전해 왔으며, 이렇듯 놀라운 치적을 보게 됨은 실로 격세의 감이 있다……양 민족이 더욱 상호 이해의 정도를 깊이 하여……조선문화가 향상되고 민족의 진로가 중달(重達)케 됨을 바란다. (병합) 이래 더욱더 신정(新政)의 신장(伸張)에 힘을 다하고 산업의 개발, 문화의 발전에 노력하여 대정(大正) 10년 중추원의 고문이 되어 문정(文政)에 공헌한 바는 심대한 바가 있다. 두 문장 중 위의 것은 일제 말기 박영효의 일제통치에 대한 소감이며, 아래 것은 일인들의 박영효에 대한 감사의 말이다. 일제 말기 박영효의 실존에 대한 적나라한 묘사라고 할 수 있겠다. 1935년 10월 이른바 일제의 시정 25주년을 맞이하여 박영효는 일제로부터 '시정25주년기념표창'으로 은배(銀杯) 1조를 하사받고 최대의 공로자로 '칭송'되고 있다. 이에 대한 박영효의 답례 또한 그에 걸맞는 '무게'를 갖추고 있다. 조선조 후기 개화운동 또는 부르조아 개혁운동의 정점으로서의 갑신정변 그리고 김옥균과 아울러 갑신정변의 가장 출중한 지도자로서의 박영효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는 독자들이라면 일제 말기 박영효의 모습을 이렇게 그리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엄연한 사실이며 따라서 여기에 근대사 최대의 비애가 깃들어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한 출중한 개화파의 말년이 이렇게 변하게 된 데는 어떠한 이유가 있었던 것인가. 단지 개인의 '나약함'에 그 이유를 돌려야 할 것인가. 아니면 우리 근대 민족운동의 큰 맥을 형성하고 있던 개화운동은 애초에 그런 변화의 씨앗을 가지고 출발했던 것이고, 박영효의 친일 또한 어느 정도는 예정된 궤적이었던가. 이제 그 비극의 궤적을 따라가 보자.

갑신정변이 품은 사상성--'친일'이라는 비극의 배태
박영효는 1861년(철종 12년) 수원에서 진사 박원양(朴元陽)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반남으로 그의 집안은 조선 후기 노론 척족세도의 중요한 한 축을 형성하고 있었다. 게다가 1872년 4월 12세 때에 철종의 부마(附馬)가 되었으니 그의 지위는 노론 세도가 속에서도 가히 노른자위라 할 만했다. 그의 부인이 된 영혜옹주와는 3개월 만에 사별하였으나 금릉위(錦陵尉) 정일품 상보국숭록대부(上輔國崇祿大夫)가 되었다. 그는 1870년대 중반, 형 영교(泳敎)를 따라 재동 박규수(朴珪壽)의 사랑방에 드나들면서 비로소 개화사상을 익히기 시작하였다. 이 때 역관 오경석, 의관 유대치, 승려 이동인 등의 중인 출신 초기 개화 사상가들과도 교유를 시작하였다. 그들은 북학파 박지원의 저술을 통해 실학의 경세사상을 학습하는 한편, 오경석이 북경에서 가져온 {해국도지}, {영환지략} 등 청나라의 서적을 돌려보면서 실학사상과 개화사상의 접목을 시도하였다. 그 결과로 김옥균·서광범·홍영식 등과 함께 1879년경에 개화당을 조직할 수 있었다. 그러나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개화파 내부에는 이견이 노출되기 시작하였다. 이는 김윤식을 중심으로 한 개화파의 일부가 당시 영선사로 청국에 파견되어 있다가 임오군란의 진압을 위하여 청군을 대동하고 입국한 것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러한 개화파의 행동은 민씨척족과도 이해가 연결되어 있었던 것으로 이는 김옥균, 박영효를 중심으로 일군의 개화파들에게는 친청사대의 반개화(反開化)의 모습으로 비쳐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온건개화파와 급진개화파의 분화의 시초라 할 것이다. 그런데, 김윤식, 어윤중을 중심으로 한 온건개화파는 청국의 양무파(洋務派)를 모범으로 하는 친청의 경향으로, 김옥균, 박영효를 중심으로 한 급진개화파는 일본의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모범으로 한 친일의 경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임오군란이 진압되고 '제물포조약'이 체결되자, 박영효는 조약 이행을 위한 특명전권대신겸 수신사로 발탁되었다. 부사 김만식, 종사관 서광범 등 수행원 14명을 대동하고, 일본시찰을 떠나는 민영익, 김옥균 등과도 동행하였다. 이로 볼 때 이 때의 김옥균, 박영효의 일본행은 그들의 의도적인 행동이었음이 여실히 드러난다. 그의 형식적인 임무는 임오군란 때에 일본이 입은 피해에 대하여 일본측에 사과하고 제물포조약의 비준교환을 무난히 수행하며 손해배상금 5십만 원 지불방법을 완화하는 것 등을 교섭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실질적인 목표가 다른 데 있었음은 물론이다. 그것은 일본의 개화상을 시찰하고, 일본으로부터 신문물과 신제도를 도입하며, 차관을 교섭하고, 유학생을 일본에 파견하는 일이었다. 박영효 일행은 약 1개월 가량 머무는 동안 일본 조야의 유력한 인사는 물론 영국·미국·독일 등 구미의 외교사절과도 접촉하여 세계 대세와 국제관계에 대한 지식을 넓히는 한편, 병사·재무·흥산 등 일본의 개화상을 폭넓게 시찰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일본에 가서 본 것은 말로만 듣던 메이지 유신의 성과 즉 '서구화'였는데, 막상 서구화된 상태를 접하자 그들은 근대 일본의 모습에 압도되고 말았다. 그리고 이 때부터 그들은 후쿠자와(福澤諭吉)의 탈아론(脫亞論)의 포로가 되어가고 있었다. 여기에 개화사상의 비극이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그 해 11월에 박영효는 혼자 귀국하였으나 그가 없는 동안 정부는 친청사대의 민씨일족이 장악하게 되었고, 박영효는 12월에 대신직에서 제외되어 한성판윤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그는 한성판윤으로 있으면서 일본에서 후쿠자와와 약속하였던 신문발간을 돕기 위해 기술자들이 1883년 1월에 도착하자, 박문국을 창설하여 신문창간 준비에 착수하였으며, 도로의 확장과 정비, 색깔 있는 옷의 장려 등 눈에 띄는 몇 가지 개혁을 시도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개혁활동은 민씨척족의 시기와 의심을 사게 되어 한성부의신설 사무는 정지되고, 같은 해 3월에 광주유수 겸 수어사로 좌천되었다. 이에 그는 다시 수어영에 연병대를 신설하고 일본식 훈련을 시작하였으나, 그해 12월 수구파의 모략으로 유수직마저 사임할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이 급진개화파는 정권에서도 소외되었고 자신들이 양성한 군대마저 민씨정권에게 넘겨줄 수밖에 없었다. 이에 더하여 급진개화파는 국가재정난의 타개방식을 둘러싸고도 민씨정권과 결정적으로 대립하게 되었다. 급진개화파는 당오전 등의 악화주조를 반대하고, 울릉도와 제주도의 어채권을 담보로 일본으로부더 차관을 들여올 것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차관도입의 시도조차 일본에게 거절당하게 되자, 급진개화파는 세력이 급속히 약해져 가게 되었던 것이다. 이 같은 처지에서 박영효 등의 급진개화파는 정변을 통하여 정권을 장악한 뒤 근대화를 추진하기로 하고 정한론(征韓論)의 분위기가 팽배한 일본을 이용하여 민씨정권과 청군을 타도할 방침을 세웠다. 때마침 일본도 1882년 이래의 청에 대한 열세를 만회하고 조선에 대한 지배를 확보할 계획 아래 다케조에(竹添進一郞) 일본공사를 통하여 지원을 약속하였다. 또한 조선에 주둔한 청군은 베트남을 둘러싼 청불전쟁의 여파로 일부 철수한 상태에 있었다. 1884년 12월 4일 박영효 등은 우정국 낙성식에서 개화파 군사력과 일본군을 동원하여 민씨정권을 제거하고 개혁을 단행하였다. 정변 후 박영효는 새내각의 전후영사 겸 우포장이라는 직책을 맡았다. 그러나 갑신정변이 일본군의 무기력과 배신행위 그리고 민씨정권이 끌어들인 청군에 의해 3일천하로 끝나자 박영효는 다케조에 공사를 따라 일본으로 망명하기에 이르렀다.

두 차례의 망명----친일의 길로갑신정변에 실패한 급진개화파 인사들이 일본에 망명하자 일본정부는 이들에 대해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이제 그들의 효용가치가 예전만 같지 못한 것은 엄연한 사실이었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박영효는 1885년 그의 동지 서광범, 서재필과 더불어 미국으로 가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것도 뜻과 같지 않아 바로 일본으로 돌아와 1894년까지 약 10년 동안 일본에서 망명생활을 한다. 이것이 그의 1차망명이다. 망명생활 중 일본 이름을 야마자키(山崎永春)라고 불렀으며, 1888년에 미국선교학원인 메이지 학원의 영어과를 졸업하고 요코하마 미국교회에 있으면서 동서양의 서적들을 두루 읽었다. 1888년 2월에는 국정전반에 걸쳐 고종 앞으로 보내는 1만 3000여자나 되는 장문의 개혁상소, 이른바 '조선국 내정개혁에 관한 건백서'를 준비하여 봉건적인 신분제도의 철폐, 근대적인 법치국가의 확립에 의한 조선의 자주독립과 부국강병을 주장하였다. '건백서'에 나타난 그의 개혁사상은 전통적 왕조체제의 틀을 유지하면서 부국강병을 달성하려 했다는 특징이 있다. 그리고 이 때 그의 사상은 본격적으로 후쿠자와의 영향 속에 들어가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후쿠자와 등 비사쓰마·조슈계(非살摩 長州系) 인사들의 도움으로 1893년 말 도쿄에 교포학생들을 위한 친린의숙(親隣義塾)을 개설·운영했다. 동시에 그는 조선청년애국단이라는 초보적인 정치단체를 만들 계획도 갖고 있었다. 1894년 5월 박영효는 본국에서 보낸 자객 이일직(李逸稙), 권동수(權東壽), 권재수(權在壽) 등의 습격을 받았으나 무사히 넘어갔다. 김옥균이 그러했던 것처럼 박영효 역시 견디기 어려운 낙백의 시절인 이 즈음의 일본에서의 생활을 권토중래의 그날을 기다리며 보냈다. 그러나 김옥균이 상하이(上海)에서 홍종우에게 암살된 반면에 그는 암살의 위기를 넘길 수 있었던 것이다. 이후 그는 일본·미국 등지의 개혁파 망명정객 중 자타가 공인하는 수령으로 떠올랐다. 1894년 7월 23일 일제의 경복궁 침입 이후, 일본 정부가 조선의 새정권내에 친일파 관료들을 심어 놓을 목적으로 그의 귀국을 서둘러 결정하자 이규완, 유혁로 등 5명의 측근과 2명의 일본인 경찰의 호위를 받아 8월 23일 서울에 도착했다. 9월 중순 일본이 청국과의 평양전투에서 승리하자 조선 정계에는 일본이 조선의 미래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할 아시아의 새로운 강자로 될 것이라는 인식이 확산됐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박영효를 중심으로 조선에 강력한 친일내각을 구성하려는 복안을 가지고 있던 이노우에 공사의 추천으로, 그는 그 해 12월 제2차 김홍집 내각의 내무대신에 임명되었다. 이를 김홍집과 박영효의 연립내각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후 왕실과 일본공사 양쪽의 신임을 얻은 박영효는 농민군과 그 관련세력을 진압하는데 앞장섬과 동시에 일본지향형의 개혁을 추진하였다. 이 시기에 박영효는 인사를 전단(專단)하였고 '개혁'을 주도하였다. 갑신정변을 주도하던 박영효가 느끼던 갑오기의 개혁은 어떤 성질의 것이었을까. 둘 다 뒤에는 일본이 있었다는 점에서는 공통성이 있었다. 그러나 1895년 삼국간섭으로 일본세력이 퇴조하자 불안을 느끼게 된 그는 이노우에의 권고를 무시하고 김홍집을 내각에서 퇴진시킨 뒤, 자기는 총리대신 서리가 되고 측근 이주회를 군부대신 서리에 앉혀 독자적으로 제2차 갑오개혁을 추진하였다. 실권을 장악한 뒤 그는 군부 및 경찰조직 그리고 지방행정조직의 개혁을 추진했는데 이 때 개혁의 배후에는 물론 일본 정계의 실력자로 조선에 파견되어 갑오개혁을 조종하던 이노우에가 있었다. 그러나 곧 왕실로부터 배척당하고 1895년 7월 을미사변에 연루되자 일본공사관의 협조를 얻어 신응희, 이규완, 우범선 등 일행 20여 명과 함께 일본으로 2차 망명의 길을 떠났다. 한편, 1898년 12월 16일 중추원회의에서 박영효를 다시 정부요직에 등용하자는 건의가 나왔다. 이런 움직임에 대해 반대파는 '박영효 대통령설을' 유포시켜 그의 정계복귀를 위해 노력하던 독립협회마저 해산시켰다. 1900년 7월에 고베에서 이승린, 이조현, 김창한 등을 불러 모으고 망명중인 동지를 규합하여 정부를 전복하고 의화군 강을 국왕으로 추대하기 위한 쿠데타를 계획하였다. 그리하여 이에 필요한 자금조달을 한규설과 윤석준에게 부탁할 목적으로 극비리에 그해 11월에 이승린과 이조현을 조선에 파견하였지만 발각되어 그의 정계복귀 공작은 수포로 돌아가고 궐석재판에서 교수형이 선고되었다. 이 실의의 시간에 그는 북해도를 돌아다니며 시름을 달래고 끝없이 재기를 노리고 있었다. 그는 1907년 6월 초에야 비공식으로 귀국하여 부산에 머무르고 있다가, 6월 7일 서울로 올라가 궁내부고문 가토오와 접촉하고, 6월 13일에 고종의 특사조칙을 받을 수 있었다. 서울에 있는 각 단체의 성대한 환영을 받았고, 박영효 귀국환영회까지 개최되었으며, 고종은 거처를 하사하기까지 하였다. 7월에 궁내부대신으로 임명되었고, 헤이그밀사 사건 후에 벌어진 통감 이토와 이완용 내각의 고종 양위압력을 무마시키려다 실패하였다. 이는 이완용과의 갈등에 말미암는 것이었다고 한다. 순종 즉위 후 군부내의 반양위파와 함께 고종의 양위에 찬성한 정부대신들을 암살하려 했다는 보안법 위반의 죄목으로 제주도에 유배되었다. 1년 간의 유배 후 상경이 금지되어 마산에 머물러 있다가 한일합병을 맞았다. 1910년 일제로부터 합병에 따른 논공행상으로 후작의 작위와 매국공채 28만 원을 받았다. 이는 당시의 수작자 중에서도 아주 '품계'가 높은 것이었고 상금도 많은 것이었다. 일제로서는 개화파의 영수로서 박영효가 가지는 상징성이 조선의 통치에 있어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니는 것이었다. 이로 보더라도 1907년의 유배가 단지 친일의 변형된 모습일 뿐이었다는 사실은 여실히 드러난다. 갑신정변으로 잘못 끼운 단추는 끝내 일본에 합병된 조국의 후작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 '개화'된 조국에서의 박영효의 모습은 어디로 가고 이제 친일의 거두로 남았단 말인가.

민족개량주의의 중개역으로
박영효는 1911년 조선귀족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매국공채의 상금이 많았던 탓인지 상당한 자산을 보유하고 있었다. 1911년의 한 조사에 의하면 50만 원 이상의 자산가 32명 가운데 포함될 정도였고, 권업주식회사와 조선물산무역주식회사의 발기와 운영에도 참가하고 있었다. 그의 1910년대의 모습은 이와 같이 아직은 친일의 전면에 드러난 것은 아니었고 매판자본의 모습만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나 3.1운동을 전후하여 본격적인 친일의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그는 1920년을 전후하여 민족주의자의 타협화 촉진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되는 것이다. 이 시기 그의 친일활동은 다소 은폐된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나 이는 총독부의 의도에 따른 것으로 , 재등실과의 면회 회수가 급격히 증가하고 있는 것에서도 그 면모를 잘 알 수 있다. 이 시기 그는 1919년에 설립된 조선경제회의 회장과 역시 1919년에 설립된 친일단체 유민회의 회장으로 있다가, 1921년에는 조선인산업대회의 회장으로 그리고 1922년에는 조선민우회의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유민회를 제외하면 조선경제회나 조선인산업대회 그리고 민우회 등은 아직 민족주의적인 모습을 여실히 지니고 있던 조선인 부르조아지들을 회유하기 위해 일제가 사주하고 있던 단체들로서, 3·1 운동 직후 조선 민족운동의 회유에 적극적으로 이용된 단체들이다. 이로 본다면 1920년대 초반까지 박영효는 조선민족운동계로부터 타기의 대상으로 올라 있지는 않았던 것으로 일제는 파악하였던 것이고, 이에 따라 일제에 의해 적극적으로 이용되었던 것을 알 수가 있다. 조선인산업대회나 민우회가 민족운동의 분화에 주요한 분기점을 형성시켰고, 그것은 1923년 이후 '자치운동'이라는 민족운동의 변형된 모습이 나타나는 배경을 이루게 된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이런 여러 단체 활동과 더불어 이 시기 그의 경제활동 역시 주목의 대상이 되기에 족하다. 그는 1918년 일제의 국책 금융기관으로 발족되는 조선식산은행의 이사로 참여하여 그 직위를 계속 유지하면서 호남 김씨가의 주도로 1919년에 창립되는 경성방직과 1920년에 창립되는 동아일보의 사장에 취임하여 활동한다. 이는 경제적인 측면에서의 조선인자본의 회유책으로 아주 적절한 것이었다. 박영효의 이러한 경제적인 지위는 1920년대 후반 이후 경성방직이 식산은행의 거대한 대부를 바탕으로 전시경제에 참여하고, 그를 바탕으로 '식은왕국'이라는 거대한 금융독점자본의 한 영역을 차지할 수 있게 한 바탕이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박영효가 20년대 초반에 하고 있던 단체활동과 경제활동은 민족운동의 회유에 있어 양날의 칼을 이루고 있었다. 한편, 1921년 11월 조선총독부 고위관료, 재류일본인 부호를 중심으로 하여 일부 조선인 대지주, 예속자본가가 함께 친목과 내선융합을 내건 친일사교단체 조선구락부에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또한 동광회조선총지부의 설립 당시 회장으로 내정되기도 했는데, 이 단체는 1922년 3월 일본 우익 정치단체인 흑룡회계의 인사들이 도쿄에 조직한 정치단체로서 서울에 조선총지부를 둔 대륙낭인이 주도한 친일단체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노골적인 친일단체에는 아직 그가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있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1924년 이후 민족주의운동이 타협파와 비타협파로 명백하게 분화되면서 위와 같은 민족운동의 회유책이 그 효력을 상실한 후, 그는 이제 노골적으로 친일행위를 자행한다. 이미 그는 1921년 조선총독부 중추원의 고문으로 임명되어 있었다. 1926년에는 이완용의 뒤를 이어 중추원의 부의장이 되어 1939년 죽을 때까지 그 직위를 유지한다. 이 밖에 그의 친일 행위는 손 꼽을 수 없을 만큼 많이 있다. 그것을 간단히 보면 다음과 같다. 1922년 조선미술전람회 심사위원으로 임명되어 몇 차례 중임, 역시 1922년 조선사편찬위원회 고문, 1925년 조선사편수회 고문, 1924년 '훈1등 서보장(瑞寶章)' 서훈, 1926년 '이왕장의위원장', 1927년 계통농회로 성립된 조선농회의 부회장, 1934년 회장, 1928년 조선귀족세습재산심의회 위원, 조선귀족에 관한 심사위원, 왕공족심의회 심의원, 금융제도 조사위원, 대례기념장 서훈, 1930년 조선임산공업주식회사 대표, 조선간이생명보험주식회사 자문위원, 1936년 애국금차회 발기인, 1938년 임시교육심의위원 등. 그는 1939년 9월 죽을 때 중추원 부의장으로 년 3,500원의 봉급을 받고 있었으며, 사망하고 나자 정2위 훈1등으로 '추서'되었다. 이렇게 본다면 그가 시작하였던 개화운동과 일제시기에 그가 중개하여 본격화되는 '실력양성운동' 또는 자치운동과의 간격은 얼마나 되는 것일까.
                                                           ■ 윤해동(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 서울대 강사·한국사)

■ 참고문헌
조선총독부, {조선공로자명단}, 1935.
황현, {매천야록}.
[朝鮮人産業大會 創立經過], {동아일보}, 1921. 8. 1.
市川正明 編, [宋鎭禹警察審問調書], {三一獨立運動} 3, 原書房, 19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