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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심리철학

심신 문제 - 지금 우리는 어디에 와 있는가?

심신 문제 - 지금 우리는 어디에 와 있는가?

 

물리계 안에서의 마음 : 김재권, 철학과현실사, 1999 (원서 : Mind in a Physical World: An Essay on the Mind-Body Problem and Mental Causation (Cambridge: MIT Press/Bradford Books, 1998)), Page 13~62

1. 수반ㆍ실현ㆍ창발

2. 수반은 심신 이론이 아니다.

3. 다층적 모델과 부분-전체 수반

4. 물리적 실현주의

5. 물리적 실현주의가 심신 수반을 설명한다

지금 우리는 어디에 와 있는가?

심신 문제에 대한 현행의 논의는 1950 년대 후반과 1960 년대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좀더 엄밀히 말하자면,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심신 문제는 1 년을 사이에 두고 발표된 두 편의 고전적인 논문에 연원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파이글이 1958 년에 발표한 "'심적인' 것과 '물리적인' 것" 과 스마트가 그 다음해에 발표한 "감각과 두뇌 과정들" 이라는 논문이 바로 그것이다 (주석 : Herbert Feigl, "The 'Mental' and the 'Physical'", Minnesota Studies in the Philosophy of Science, vol. 2, ed. Herbert Feigl, Grover Maxwell, and Michael Scriven (Minneapolis :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58). J. J. C. Smart, "Senstions and Brain Processes," Philosophical Review 68 (1959) : 141-156.). 이 두 논문에서 스마트와 파이글은 각각 마음의 본성에 대한 접근법을 독자적으로 제시했는데, 이 접근법을 일컬어서 심신동일론이라든가 중추신경 상태 유물론, 두뇌 상태 이론 혹은 유형 물리주의라고 한다. 1956 년에 플레이스가 발표한 "의식은 두뇌 과정인가?" 라는 논문이 스마트와 파이글의 논문보다 앞서 있지만 (주석 : U. T. Place, "Is Consciousness a Brain Process?" Part I, British Journal of Psychology 47 (1956) : 44-50.), 심신 문제를 분석철학계에서 핵심적인 형이상학적 문제로 재도입하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지속되어온 논쟁의 진원지가 된 것은 역시 스마트와 파이글의 논문들이다. 물론 라일의 『마음의 개념』이 1948 년에 나왔고, 비트겐슈타인도 심성 (mentality) 과 심적 언어에 대해서 꽤 논란거리가 되는 언급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보다 훨씬 전에 브로드가 『마음, 그리고 자연 안에서의 그것의 위치』(1925) 라는 저서를 출간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주석 : Gilbert Ryle, The Concept of Mind (London : Hutchinson, 1949). Ludwig Wittgenstein, Philosophical Investigations, trans. G. E. M. Anscombe (Oxford : Blackwell, 1953). C. D. Broad, The Mind and Its Place in Nature (London : Routledge and Kegan Paul, 1925).). 하지만 라일과 비트겐슈타인의 주된 관심은 심적 담화의 "논리" 에 있었지, 우리의 심성이 어떻게 우리의 물리적 특질과 관련을 맺고 있는지를 설명하는 형이상학적인 문제에 관심을 두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더욱이 라일과 비트겐슈타인은 서로 다른 이유에서 이기는 하지만 형이상학적인 심신 문제를 일종의 철학적인 헛소리라고 비난하였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브로드의 저서는 확고하게 형이상학적이지만, 안타깝게도 20 세기 후반, 특히 그 후반부에서도 중요한 초기에 있었던 심신 문제의 논쟁과 접점을 찾지 못하고 말았다.

나처럼 1950 년대말과 1960 년대초에 대학원에 진학했던 사람들은 스마트와 파이글의 유물론을 통해서 처음으로 심신 문제를 체계적인 철학 문제로서 마주 대하게 되었다. 그들의 접근법은 참신할 정도로 담차고 강한 인상을 주었으며, 과학에 대해서 낙관했던 그 시대의 경향에 잘 부합하는 듯이 보였다. 빛은 전자기 방사이고 유전자는 DNA 분자들이라는 사실을 과학이 우리에게 보여준 것과 똑같이 과학 연구를 통해서 심적 사건들이 곧 두뇌 과정들이라는 것을 입증할 수 있다는 생각은 흥미롭고도 흥분시키는 발상이었다. 그러나 심신동일론은 의외로 단명했다. 처음 소개된 지불과 몇 년 지나지 않아서 급전직하로 쇠락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하지만 돌이켜보건대 심신동일론은 단명에도 불구하고 마음에 관한 이론으로서의 지배력을 능가하는 한 가지 중요한 공헌을 하였다. 그것은 심신동일론 이후에 전개될 논쟁들을 제한하고 규제할 요소들을 설정하는데 도움을 주었다는 점이다. 그 요소란 바로 오늘날 우리의 사유를 여전히 이끌고 지배하는 물리주의적인 전제와 열망이다. 심신동일론이 1960 년대말과 1970 년대초에 소멸하기 시작하였을 때 데카르트의 심신이원론이나 다른 형태의 이원론으로 퇴보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 증거다. 심신 문제에 관한 논쟁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물리주의를 견지해왔고, 스마트와 파이글식의 유물론을 붕괴시키는 데 한 몫을 했던 사람들조차도 물리주의적 세계관을 고수하였다. 1970 년대와 1980 년대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심신 문제 - 우리의 심신 문제 - 는 근본적으로 물리계 안에서 마음의 위치를 찾는 문제였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심신 문제와 씨름해왔던 대다수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가졌던 과제는, 심적인 것을 원칙적으로 물리주의적인 틀 안에 수용하는 동시에 그것의 독특한 면을 보존하는 - 즉, 마음을 지닌 생물체로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특징을 상실하지 않는 - 길을 찾는 것이었다.

철학자들 사이에서 별로 아쉬움이나 재고를 불러일으키지 않고서 심신동일론이 그토록 빠르고 손쉽게 붕괴된 것은, 그것을 전복시킨 결정적인 두 개의 반론들 - 퍼트남의 다수 실현 (multiple realization) 논변 (주석 : 이 논변이 처음으로 제시된 논문은 1968 년에 발표된 "심리적 술어들" (Psychological Predicates) 이었는데 나중에는 "심적 상태의 본성 (The Nature of Mental States)" 이라는 제목을 달고서 Hilary Putnam, Collected Papers II (Cambridge :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75) 에 재수록되었다. 이 논변을 간단히 말하자면, 심적 상태들은 상이한 종과 구조들 안에서 매우 다양하게 물리적으로나 생물학적으로 실현될 수 있거나 실현되며 (예컨대, 인간에게서 고통을 실현시키는 신경 상태는 연체 동물에게서 고통을 실현시키는 상태와 매우 다르다), 그 결과 어떠한 심적 상태도 (단일한) 물리적 (생물학적) 상태와 동일시될 수 없다는 것이다. 좀더 상세한 논의를 위해서는, Jaegwon Kim, Supervenience and Mind (Cambridge :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3) 에 수록된 "Multiple Realization and the Metaphysics of Reduction" 을 참조하라.) 과 데이빗슨의 무법칙 논변 (주석 : 이 논변은 1970 년에 처음 발표되었고 Donald Davidson, Essays on Actions and Events (Oxford : Oxford University Press, 1980) 에 재수록된 "Mental Events" 라는 논문에서 제시되었다.) - 안에 이미 심성에 관한 호소력 있는 대안적인 관점들, 즉 기능주의와 무법칙적 일원론의 씨앗이 담겨 있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기능주의의 핵심적인 생각은, 심적 종류와 속성이 물리화학적이거나 생물학적인 종류보다 더 높은 추상 단계에서의 기능적 종류라는 것인데, 이것은 기능주의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발흥하기 시작했던 인지 과학에 대한 이해를 도와주는 놀랍고도 암시적인 발상이었다. 심성에 대한 기능주의적 접근은 심성과 인지에 대한 새로운 과학을 요청하는 듯이 여겨졌다. 그 이유는 기능주의의 핵심적인 교리대로 하자면, 심적 (인지적) 속성들의 영역을 따로 상정해서 그 속성들의 물리적 (생물학적) 실현자들과는 별도로 그것들을 과학적으로 탐구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심리학에 대해서 과학으로서의 정당성과 자율성을 보장해주는 발상이다. 기능주의는 새로운 인지 과학에게 형이상학과 방법론을 제공해준 것이다.

데이빗슨의 무법칙적 일원론도 우리에게 또 다른 매력적인 선물 꾸러미를 안겨주었다. 하지만 그 이론의 특별한 매력은 기능주의의 매력과는 다른 것이었다. 무법칙적 일원론에 따르면, 심적 영역은 본질적으로 무법칙성과 규범성을 가지기 때문에 과학적인 탐구의 대상이 될 수 없으며 (주석 : 무법칙적 일원론에 관한 데이빗슨의 초기 논문들 중 하나는 "철학으로서의 심리학" (그의 저서 Essays on Actions and Events 에 재수록) 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이 제목은 아마도 "과학으로서의 심리학" 과 대비시키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 같다.),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서 심적인 것들은 물리적인 것들과는 전적으로 다른 영역에 있다고 한다. 특히 물리적인 것에 대한 정신적인 것의 무법칙성 - 즉, 심적 종류들과 물리적 종류들을 연결짓는 법칙들의 불가능성 - 은 심적 종류를 물리적 종류로 환원할 수 없다는 점을 필연적으로 함축한다고 여겨졌다. 이것은 곧 심적 종류들이 물리적이거나 생물학적인 종류들과 구별된다는 것을 의미하며, 스마트-파이글류의 심신동일론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이런 식으로 해서 데이빗슨의 무법칙적 일원론은 기능주의와는 다른 이유에서이기는 하지만 심적인 것의 자율성을 확보해준다. 다른 한편으로 무법칙적 일원론의 일원론적 요소는 모든 개별 사건들로 하여금 물리 법칙의 지배를 받는 물리적 사건이 되게 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물리적인 것이 우리의 존재론 안에서 우위를 차지하게 해주었다. 그리고 이로 인해서 우리의 물리주의적인 열망은 누그러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무법칙적 일원론과 기능주의는 각기 독특한 방식으로 우리가 물리주의의 노선을 견지하면서도 획일적인 환원주의의 억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해주었다고 하겠다.

1. 수반ㆍ실현ㆍ창발

무법칙적 일원론과 기능주의가 심신 문제, 즉 심적인 것과 물리적인 것이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는냐는 문제에 관해서 말해주는 바는 무엇일까? 무법칙적 일원론은 모든 개별적인 심적 사건이 곧 물리적 사건이라고 주장하는 물리주의적 일원론이지만, 심적인 것이 무법칙적이라고, 즉 법칙들 (데이빗슨이 가끔 쓴 표현대로 하자면, "엄밀 법칙들") 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특히 심적 종류나 속성들과 물리적인 것들을 연결시키는 법칙이란 있을 수 없다는 주장은 잘 알려져 있다. 그 이론의 이러한 요소, 즉 심적인 것과 물리적인 것간의 무법칙성은 부정적인 논제라고 할 수 있다. 왜냐 하면 무법칙적 일원론은 심적인 것이 어떻게 물리적인 것과 관계를 맺지 않고 있는지를 말해줄 뿐 심적인 것과 물리적인 것이 어떻게 관계를 맺고 있는지에 관해서 말해주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법칙적 일원론이 심적인 것과 물리적인 것간의 관계에 관해서 뭔가 긍정적인 이야기를 해줄 수 있다면 그 이론의 첫번째 요소 - 모든 심적 사건은 물리적 사건이라는 주장 - 가 그러한 역할을 해낼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면 데이빗슨의 물리주의적 일원론이 심신 관계에 관해서 말해주는 바가 정확하게 무엇인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우리의 기대에 훨씬 못 미친다는 것이다. 모든 심적 사건들은 곧 물리적 사건들이라는 주장의 내용이 데이빗슨에게 의미하는 바는 기껏해야 다음과 같다. "심적 표현을 사용해서 서술될 수 있는 모든 사건은 물리적인 표현을 사용해서 서술될 수 있다." 또는 요즈음 쓰는 말로 표현하자면, "심적인 속성을 가지는 (또는 심적 종류에 속하는) 모든 사건은 또한 물리적인 속성을 갖는다 (물리적인 종류에 속한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데이빗슨의 이론 체계 안에서 한 사건이 물리적인 것이냐 아니면 심적인 것이냐가, 그것이 물리적인 언어로 서술될 수 있느냐 아니면 심적 언어로 서술될 수 있느냐, 도는 그것이 물리적인 종류에 속해 있느냐 아니면 심적인 종류에 속해 있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데이빗슨의 일원론은 다음과 같은 명제로 압축될 수 있다. "심적 속성 (서술구) 만을 가지는 사건은 있을 수 없지만, 물리적 속성 (서술구) 만을 가지는 사건은 있을 수 있고, 아마 있을 것이다." 이것은 심적인 종류와 물리적인 종류들간의 유형 (type) 대 유형의 연결을 요구하지 않으며, 데이빗슨의 심적 무법칙주의는 특히 심적인 유형과 물리적 유형간의 법칙적인 (또는 그보다 더 강한) 연결을 금한다. 하지만 심적인 것과 물리적인 것간의 유형 대 유형, 속성 대 속성의 연결을 금지하는 이론은 우리의 심적인 본질과 물리적인 본질 사이에 어떠한 연관성도 없다고 말하는 이론에 지나지 않게 된다. 이것은 곧 무법칙적 일원론의 일원론은 무법칙적 일원론의 무법칙주의에 못지 않은 부정적인 논제임을 의미한다.

무법칙적 일원론이 심신 관계에 관해서 별로 말해주는 바가 없다는 점은 유비를 통해서 볼 수 있다. 색깔이 있는 대상은 모두 형태를 띠고 있다 - 이것을 데이빗슨의 일원론식으로 표현하자면, 색깔을 지닌 모든 대상은 형태를 지닌 대상과 동일하다 - 라는 진술을 생각해보자. 이 진술은 옳지만, 분명히 색깔과 형태 사이의 관계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실제로 우리는 그것들 사이에 흥미를 끌 만한 연관성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심신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심적 속성을 가진 모든 사건은 물리적 속성을 가진 사건과 같다라는 진술은 심적인 것과 물리적인 것 사이에 유형 대 유형의 연관성이 있는지 없는지에 관해서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에 관해서 말하지 않으려는 것이 데이빗슨의 의도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색깔을 가진 모든 대상들이 형태를 가진다는 주장이 색깔과 형태의 관계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데이빗슨의 무법칙적 일원론은 심적인 것과 물리적인 것간의 관계에 관해서 말해주는 바가 없다는 것이다. 무법칙적 일원론이 말하는 대로하자면, 우리 주위의 사물들의 색깔과 모양들간의 체계적인 관계가 없는 것처럼 심적 속성과 물리적 속성간의 체계적인 관계는 있을 필요가 없다. 이 점은 데이빗슨의 물리적 일원론과 유사한 소위 개별자 물리주의 (token physicalism) 에 속하는 어떠한 이론에도 다 해당된다 (주석 : 개별자 물리주의로 분류되는 것들 중에는 데이빗슨의 일원론과 다른 것도 있다. 그들의 개별자 물리주의는 심적 속성 사례와 물리적 속성 사례를 동일시한다. 여기서 속성 F 의 "사례" 는 F 의 '추상적 개별자' (또는 속성 예화 이론대로 하자면 한 사건의 F - 예화) 와 같은 것으로서 F 를 가지거나 예화하는 사건이나 대상과는 다른 것이다. 오히려 이러한 형태의 속성 물리주의는 내가 Supervenience and Mind, pp. 364ff 에서 "다수 유형 물리주의 (multiple-type physicalism)" 라고 부른 것과 비슷하다. [역주] 위에서 언급된 '추상적 개별자' 는 영어의 'trope' 를 의역한 것인데 이 개념에 대해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트로프 개념은 20 세기초 윌리암스 (D. C. Williams) 와 스타우트 (Gilbert Stout) 의 저서에서 처음 나타났고, 캠벨 (Keith Campbell 이나 베이컨 (John Bacon), 시몬스 (Peter Simons) 와 같은 호주의 형이상학자들에 의해서 최근에 다시 등장하였다. 트로프 이론에 따르면, 이 종이의 흼, 이 사과의 붉음 등이 트로프 또는 속성 사례라고 한다. 이 종이의 흼은 이 눈덩이의 흼과 질적으로 같은 흼이지만 서로 구별되는 것이다. 이 종이의 흼은 개별자이자 추상적이다. 반면에 흼 자체는 보편자다. 그것은 이 종이에도 있고 이 눈덩이에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종이의 흼은 개별적인 존재자이고 이 눈덩이의 흼 (이 흼은 종이의 흼과는 다른 독립적인 존재자다) 과 동일하지 않다. 또한 이 종이의 흼은 종이가 있는 곳에 있으므로 공간상의 위치를 가지지만, 보편자는 공간상의 위치를 점하지 못한다. 그래서 트로프는 '추상적 개별자 (abstract particular)' 라고도 불린다 (흼을 비롯한 다른 속성들은 '추상적 보편자' 들이 될 것이다). 단, 트로프는 구체적 개체 (concrete entity) 로 생각되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심신 이론들이 뭔가 더 많은 것을 말해주기를 내심 바란다. 즉 심적 속성과 물리적 속성이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에 관한 긍정적인 이야기를 해주고, 그 속성들이 왜 그렇게 관련을 맺고 있는지를 설명해주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런데 무법칙적 일원론으로부터는 그러한 이야기를 들을 수 없다.

이로 인해서 데이빗슨은 그의 논문 "심적 사건들" 에서 심신 수반을 도입하게 되었을 것이다. 데이빗슨은 심적인 것과 물리적인 것을 연결시키는 법칙들의 성립할 수 없다는 논변을 발전시킨 후에 즉석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였다.

내가 서술한 입장이 심물 법칙을 부정하더라도, 심적 속성들이 어떤 의미에서 물리적 속성들에 의존하거나 수반한다는 입장과 일치한다. 그러한 수반은 물리적인 면에서 모두 같은 두 사건들이 심적인 면에서 다를 수는 없다는 것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또는 한 대상이 물리적인 면에서 바꿔지지 않고서는 심적인 면에서 바꿔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주석 : Essays on Actions and Events, p. 214.).

영국의 창발론자들이 20 세기초에 "수반" 이라는 표현을 심신 문제와 관련해서 처음으로 사용하였고 윤리학 이론에서도 가끔 오르내리는 개념이었지만, 위의 인용문은 심신 문제에 대한 현대의 논의에서 수반 개념이 도입되는 것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여하튼 데이빗슨식의 심신 수반은 금방 인기를 얻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심적인 것과 물리적인 것이 서로 어떻게 관련을 맺고 있는지를 설명하거나, 적어도 설명할 가망이 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된다. 특히 수반은 심적 및 물리적 속성들과 종류들 (또는 데이빗슨의 표현대로 하자면, "특성" 이나 "측면" 들) 에 관계된 것이지 심적 및 물리적 개별자들이나 데이빗슨의 무 구조화된 개별자로서의 사건에 관계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주목하라. 그러므로 무법칙적 일원론의 두 가지 중심 논제들과는 달리 마침내 수반 논제가 심적 속성과 물리적 속성간의 관계에 관해서 뭔가 긍정적인 언급을 해주게 된다.

더욱이 수반 논제는 물리주의적으로 매력을 지니는데, 그것은 비록 물리적인 것에 대한 심적인 것의 비대칭적인 의존을 드러내놓고 말하지는 않더라도 분명히 함축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심신 의존 관계는 심적인 것을 물리적인 것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관점과 일치한다고 여겨졌다. (실제로 데이빗슨과 다른 철학자들은 이 점을 명시적으로 천명하였다.) 수반 개념에 대해서 데이빗슨은 거의 지나가는 생각처럼 무심코 넘기고서 그것을 옹호하기는커녕 설명하거나 다듬는 일도 하지 않았는데, 이 수반 개념으로 인해서 무법칙적 일원론의 핵심적인 내용이 빛을 잃게 되고, 물리주의의 프로그램을 위한 새로운 초점과 방향이 설정되었다. 심신 수반이 데이빗슨의 무법칙적 일원론의 필수 요소라고 생각되어야 하는지는 여기서 우리의 관심거리가 아니다 (주석 : 실제로 심적인 것의 무법칙주의가 심신 수반과 일치하느냐는 물음이 제기된다. 수반 토대에 대한 수반자의 의존을 지지할 수 있는 어떠한 수반 관계도 일종의 "강한 수반" (이하 참조) 이어야 하는데, 물리적인 것에 대한 심적인 것의 강한 수반은 두 영역간의 법칙적 연관성을 부정하는 입장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주장할 수 있다. 이와 관련된 상세한 논의를 위해서는 필자의 Supervenience and Mind (Cambridge :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3) 에 수록된 졸고, "Concepts of Supervenience" 를 참조하라. 데이빗슨 자신은 최근에 "약한 수반" 을 선택하였다. (이를 위해서는 그의 논문, "Thinking Causes," in Mental Causation, ed. John Heil and Alfred Mele, Oxford : Clarendon, 1993, p. 4n.4 를 참조하라.) 이러한 선택은 그의 수반 논제와 무법칙주의가 일치하게 해주지만, 심적인 것과 물리적인 것간의 의존성에 대한 그의 주장을 미심쩍게 만들어버렸다.). 이 문제에 관해서 우리가 무엇을 말하고 싶어하든지간에, 철학자들이 유망한 물리주의적 형이상학을 심신 수반에서 찾지, 무법칙적 일원론의 두 논제, 즉 물리주의적인 사건 일원론과 심적인 것의 무법칙성에서 찾지 않는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수반 개념이 1970 년대 후반에 심신 문제에 관한 논쟁에서 활발하게 논의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기능주의자들은 대체로 형이상학자들은 아니었고, 그들의 입장이 심신 문제에 관해서 필연적으로 함축하는 바에 관해서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았다 (주석 : 심신 문제에 관한 기능주의의 애매한 입장에 관해서는 블록 (Ned Block) 의 글, "Introduction : What Is Funtionalism?" in Readings in Philosophy of Psychology, vol. 1, ed. Ned Block (Cambridge : Harvard University Press, 1980) 을 참조하라. 암스트롱 (David Armstrong) 이나 루이스 (David Lewis) 와 같은 기능주의자들은 자신이 유형 물리주의를 옹호했다고 자처한 반면에, 퍼트남 (Hilary Putnam) 이나 포더 (Jerry Fodor) 와 같은 다른 기능주의들은 자신이 그 이론을 반박했다고 자처한 점은 흥미롭다.). 기능주의의 주류 세력이 심적 속성과 물리적 속성의 관계를 서술할 때 사용했던 용어는 "실현" (영어 표현으로는 주로 "realization" 이 사용되었고, 가끔 "implementation" 이나 "execution" 등이 사용되었다) 이었다. 심적 속성이 물리적 속성과 동일하지 않고 물리적 속성으로 환원되지도 않지만 그것에 의해서 "실현된다" 고 보았다. 그런데 "실현" 이라는 말은 주로 컴퓨터와의 유비 (특히 추상적이고 수학적 특성을 지닌 전산 체계가 구체적인 물리적 및 전자 장치에 의해서 실현된다는 생각) 에 의거해서 도입되었고 (주석 : 내가 알기로는 이 말이 철학적으로 처음 사용된 것은 퍼트남의 논문, "Minds and Machines", in Dimensions of Mind, ed. Sydney Hook (New York : New York University Press, 1960) 에서 였다.), 곧바로 유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기능주의자들 중에서 이 실현 관계가 어떠한지 - 특히 이 관계가 심신 문제에 대한 전통적인 선택들에 관해서 함축하는 바 - 에 관해서 설명하려고 명시적으로 시도한 사람은, 특히 초기에는 거의 없었다.

나는 수반 개념이 일부 기능주의자들에 의해서 그리고 다수 실현 논변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에 의해서 받아들여졌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수반 개념을 받아들인 것은 이 형이상학적인 공백을 그것이 메워줄 가망이 있다고 본 데에 부분적으로 기인한다. 심적 속성이 물리적 속성에 수반한다는 논제는 기능주의의 형이상학적인 요구 사항에 아주 잘 들어 맞는 것처럼 보였다. 즉 물리계와 물리 법칙의 우위성을 분명하게 밝히고, 대부분의 기능주의자들이 물리주의에 개입하는 것을 정당화하되, 물리적인 환원주의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그 작업을 하게 되어 심적인 것의 자율성을 지킬 수 있는 길을 확보하게 해준다고 본 것이다. 더욱이 수반 논제는 수반 속성들에 대한 다수의 수반 기초들을 용인함으로써 심적 속성들의 다수 실현 가능성을 수용할 수 있는 완벽한 틀을 제공해주었다.

이것이 바로 기능주의의 관점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포함해서 많은 철학자들이 환원주의가 배제된 물리주의에 대한 만족스러운 형이상학적인 진술을 심신 수반에서 발견하게된 이유라고 여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점으로 인해서 블록이 "반환원주의적 합의 (주석 : Ned Block, "Anti-Reductionism Slaps Back", Philosophical Perspectives 11 (1997) : 107-132.)" 라고 부른 것이 1970 년대 중ㆍ후반에 생겨난 후 계속해서 확고한 발판을 구축하게 되었다. 지금은 "비환원적 물리주의" (또는 "비환원적 유물론") 라는 표준적인 이름이 붙은 이 입장은, 심신 문제뿐만 아니라 좀더 일반적으로는 모든 분야에서 상위 속성과 하위 속성간의 관계에 대한 가장 영향력 있는 형이상학적인 입장이 되어 왔으며 아직도 그러한 위상을 유지하고 있다. 그리하여 이 접근법을 통해서 특수 과학들이 어떻게 기초 물리학과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일반적이고 철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부수적인 소득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즉 특수 과학 영역에 있는 속성들 - 특수 과학들 안에서 법칙화되고 설명되는 속성들 - 은 기초 물리적 속성들에 수반하지만 그것들로 환원되지는 않으며, 이런 의미에서 특수 과학들은 기초 물리학으로부터 독립성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이다. 당신이 기초 물리학의 작업과는 독립해서 당신의 과학적인 작업을 수행할 수 있고 독자적인 용어로 당신의 분야에서 법칙과 설명들을 정식화할 수 있되 물리학의 법칙과 설명에는 부합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 아마도 위안을 받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기초 물리학밖에 있는 과학자들이 일반적으로 적당히 처리하는 문제이기는 하지만, 그것에 대한 철학적인 근거를 확보한다는 것은 흐뭇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여하튼 반 환원주의적 합의를 구축함으로써 얻어진 직접적인 결과 중 하나는 창발론 (emergentism) 의 복귀였다. 1920 년대와 1930 년대의 고전적인 창발론의 화려한 이론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그 이론의 특징적인 어휘와 슬로건이 재등장한 것이다. 실증주의와 "통일 과학" 의 전성기에 창발론은 엔텔레키 (entelechy) 와 생의 약동 (élan vital) 개념을 구사한 신활력설 (neo-vitalism) 처럼 아주 볼썽 사나울 뿐만 아니라 불명료하고 일관성 없는 사이비 과학 이론으로 격하되곤 했었다. 그러나 환원주의적 물리주의의 붕괴와 더불어 창발론이 재기하려는 강한 조짐이 나타났었다 (주석 : 나는 고전적 창발론이 비환원적 물리주의를 처음으로 천명한 이론으로 간주될 수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졸고, "The Nonreductivist's Troubles with Mental Causation", in Supervenience and Mind (Cambridge :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3).). 이제 우리는 전문적인 철학 문헌뿐만 아니라 (주석 : 예를 들어, John R. Searle, The Rediscovery of the Mind (Cambridge : MIT Press, 1992) 를 보라. 창발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보여주는 또 다른 증거로 창발에 대한 최근의 논문집, Emergence or Reduction? ed. Ansgar Beckermann, Hans Flohr, and Jaegwon Kim (Berlin : De Gruyter, 1992) 을 들 수 있다.) 심리학이나 인지 과학, 시스템 이론 등에서도 (주석 : 한 예로, Francisco Varela, Evan Thompson, and Eleanor Rosch, The Embodied Mind (Cambridge : MIT Press, 1993) 를 들 수 있다. 특히 "창발의 여러 종류들" 이라는 제목이 붙은 IV 부를 보라. 내가 이 글을 쓸 무렵 다양한 분야의 과학자들이 쓴 창발에 대한 논문들을 엮은 두 권의 논문집에 대해서 알게 되었는데, 이 논문집들은 유럽 (프랑스와 덴마크) 에서 출판될 예정이었다. 1997 년도 오벌린 (Oberlin) 철학 콜로키움의 주제가 "창발과 환원주의"였다.) "창발" 이니 "창발적 속성", "창발적 현상" 등과 같은 표현들이 고전적인 창발론자들에 의해서 의도된 의미로 점차 노골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요컨대 환원적인 심신동일론의 붕괴 이래 심신 문제에 대한 논의에서 세 가지 생각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첫째는 심적인 것은 물리적인 것에 "수반한다" 는 생각이고, 둘째는 심적인 것이 물리적인 것에 의해서 "실현된다" 는 생각이며, 셋째는 심적인 것이 물리적인 것으로부터 "창발한다" 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생각들을 면밀히 검토하는 것이 이 책의 주된 목적 중 하나다. 먼저 이번 장에서 나는 수반과 실현에 대해서 초점을 맞추겠다. 논의가 진행됨에 따라 창발에 관해서도 언급을 할 텐데, 특히 제 4 장에서 환원과 환원주의에 대하여 고찰할 때 언급하게 될 것이다 (주석 : 창발에 대한 좀더 충분한 논의는 졸고, "Making Sense of Emergence", forthcoming in Philosophical Studies 에서 제시되었다.).

2. 수반은 심신 이론이 아니다.

수반부터 시작해보자. 일반적으로 수반은 속성들의 두 집합 (수반 속성 집합과 수반 기초 속성 집합) 간의 관계로 간주된다. 지금까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수반 관계에는 여러 종류가 있을 수 있는데, 우리의 목적을 위해서 여기서는 "강한 수반" 이라는 것에 초점을 맞추겠다. 다음과 같은 심신 수반논제를 생각해보자.

임의의 심적 속성 M 에 대해서 어떤 대상이 M 을 t 시점에서 가진다면 그 대상이 t 시점에서 가지는 물리적 기초 속성 P 가 필연적으로 있고, 임의의 시점에서 P 를 가지는 대상은 필연적으로 그 시점에서 M 을 가진다는 점에서 심적 속성은 물리적 속성에 수반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고통을 경험한다면, 그 사람은 다음과 같은 물리적 속성 (아마도 복잡한 신경 속성) 을 가지게 된다 : 이 물리적 속성을 가지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언제든지 고통을 틀림없이 경험한다. 즉, 모든 심적 속성은 그것의 예화 (instantiation)(주석 : [역주] '예화' 란 대상이나 개체가 속성을 가지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눈덩이는 '흰색임' 이라는 속성을 예화한다고 말할 수 있다.) 를 보장해주는 물리적 기초를 가진다. 더욱이 그러한 물리적 기초없이는 심적 속성은 예화될 수 없다. 속성의 구성에 관한 어떤 전제들 하에서는, 위의 수반 논제 (이것을 "양상 연산자" 정식이라고 부른다) 는 또 다른 익숙한 형태의 수반 논제 (이것은 "가능 세계" 또는 "식별 불가능성" 정의라고 일컬어진다) 와 바꿔 쓸 수 있다.

(동일하거나 상이한 가능 세계들에서) 임의의 두 대상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물리적 속성들이 식별 불가능하면 반드시 심적인 면에서도 식별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심적 속성은 물리적 속성에 수반한다.

또는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 : 두 대상이 엄밀하게 물리적인 복제물이라면 반드시 그것들은 심적인 복제물이기도 하다. 즉 물리적 복제물은 간단히 말해서 (심적이든 무엇이든지간에) 복제물들인 것이다. 어떤 이들은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한다. "물리적으로 차이가 없으면 심적으로도 차이가 없다. (주석 : David Lewis, "New Work for a Theory of Universals", Australasion Journal of Philosophy 61 (1983) : 343-377.)" 우리는 심신 수반에 관한 이 두 정의들이 같은 것이라고 보고서 (주석 : 혹시 양자가 같다고 보는 것이 내키지 않는다면, 하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다른 하나도 받아들일 것이라고 말해도 될 것 같다. 이 문제에 관해서 좀더 상세히 고찰하기 위해서는 졸고, "'Strong' and 'Global' Supervenience Revisited," reprinted in Supervenience and Mind 와 Brian McLaughlin, "Varieties of Supervenience," in Supervenience : New Essays, ed. E. Savellos and Umit D. Yalcin (Cambridge :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5) 를 참조하라. 맥로플린의 논문은 수반개념들에 대한 포괄적이고 유용한 개관과 분석을 담고 있는 것으로서 수반에 관한 필수 불가결한 안내자 구실을 한다.) 문맥에 따라 맞바꿔 쓸 것이다.

심신 수반 하에서는 심적 속성 M 에 대한 물리적 기초 속성 P 는 필연적으로 M 의 발생을 보장한다. 즉, 어떤 것이 P 를 예화하면 필연적으로 그것은 M 을 예화하는 것이다. 여기에 나오는 필연성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는 심신 관계에 대한 우리의 관점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 즉, 어떤 이는 형이상학적인 필연성이나 심지어 논리적인 (개념적인) 필연성을 선호하는 반면에 다른 이는 법칙적 필연성으로 만족할 것이다. (수반의 필연성은 심적 속성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예를 들어, 지향적 속성들은 논리적 (개념적) 필연성에 의해서, 현상적 속성들은 법칙적 필연성에 의해서 수반 관계를 가질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동일한 심적 속성이 다수의 물리적 기초를 가질 수 있다. 즉, 한 사람에게서 예화된 고통이 어떤 신경적 속성에 근거한 반면에 고통의 다른 사례 (예컨대 파충류의 고통) 는 다른 물리적 속성에 근거할 수 있는 것이다.

데이빗슨에게서 본 바와 같이, 흔히 수반을 의존이나 결정의 개념과 연결시킨다. 즉 심적인 것이 물리적인 것에 수반한다면, 한 대상의 심적 성질이 물리적 성질에 의해서 전적으로 고정된다는 의미에서 심적인 것은 물리적인 것에 의존하거나 물리적인 것은 심적인 것을 결정한다고 할 수 있다. 때로는 이것을 "세계" 개념에 의거해서 표현하기도 한다. 한 세계의 결정된다거나 물리적으로 식별 불가능한 세계들은 심리적으로도 식별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의존관계나 결정 관계는 반 대칭적 (asymmetric) 이다. 즉 x 가 없거나 x 에 의해서 결정될 수 없다. 결정하는 것은 결정되는 것에 비해서 존재론적으로 앞서거나 더 기초적인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된 심신 수반은 반대칭적이지 않다. 일반적으로 A 가 B 에 수반한다고 해서 B 가 A 에 수반할 가능성을 배제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도입한 수반 개념은 단지 속성들의 두 집합간에 성립하는 공변 (covariance) 관계의 한 패턴을 나타낼 뿐이고, 그러한 공변 관계는 형이상학적인 의존이나 결정 관계가 없더라도 발생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속성들의 두 집합은 각각 제 3 자에 의존함으로써 공변 관계를 맺을 수 있는데, 이것은 하나의 원인에 의해서 병발한 두 결과들이 법칙적 상관 관계의 패턴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의존이나 결정 관계를 확보하기 위해서 속성 공변에 무엇이 더 보태져야 하는지, 또는 의존이나 결정 관계가 독립된 기초적인 관계인지의 여부는 명확한 답변을 찾기 어려운 문제들이다. 우리는 통상적인 용법을 따르면서 수반 관계가 의존이나 결정 관계를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실제로 "수반 기초" 나 "기초 속성" 과 같은 일반적인 표현들은 거의 명시적으로 반대칭적 의존을 함축한다.

그러면 심적인 것이 물리적인 것에 수반한다고 하자. 이것이 우리의 심성과 우리의 물리적 성질이 어떻게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설명해주는가? 즉, 마음과 몸이 관계를 맺는 방식에 관한 철학적인 이론을 서술하기 위해서 우리가 수반을 사용할 수 있을까? 한때는 나를 포함해서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고서 수반 물리주의야 말로 심신 문제에 대한 가능한 답변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수반 속성이 수반 기초 속성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입장과 강한 수반이 진정으로 일치할 수 있느냐는 문제에 관해서 논쟁이 벌어져 왔다. 이 문제에 대한 토론은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는데 내가 보기에는 이 논쟁이 잘못된 환원 개념에 의해서 이루어져 온 것 같다 (제 4 장 참조). 여기서 우리는 심신 수반 자체가 심신 관계에 대한 설명으로 여겨질 수 있느냐는 물음에 초점을 맞추겠다.

심사숙고하지 않더라도 이 물음에 대한 답변이 부정적이라는 점은 쉽게 알 수 있다. 즉 심신 수반 자체는 심신 관계에 대한 이론을 제공해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이유로는 적어도 다음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로, 심신 수반은 심신 문제에 대한 여러 가지의 고전적인 입장들과 일치한다. 실제로 상호 배타적인 심신 이론들 중 상당수가 심신 수반을 받아들이고 있다. 앞으로 보겠지만, 심적인 것은 물리적으로 실현되어야만 한다 - 즉, 심적 속성들이 비 물리적으로는 실현될 수 없다 (이러한 입장을 물리적 실현주의라고 부를 수 있다) - 는 입장과 창발론은 모두 심신 수반을 함축한다. 그러나 창발론은 심적 속성들을 비물리적인 내재적 인과력을 가진 것으로 보는 일종의 이원론인 반면에, 앞으로 내가 존중하겠지만 물리적 실현주의는 일원론적인 물리주의다. 한층 더 분명한 것은, 심적 속성과 물리적 속성을 환원적으로 동일시하는 유형 물리주의 (type physicalism) 가 심신 수반을 함축한다는 점이다. 더욱이 스마트 (J. J. C. Smart) 와 같은 물리주의자들에 의해서 심신동일론의 이원론적인 주요 적수로서 간주되어온 부수현상론 (epiphenomenalism) 도 명백하게 심신 수반에 관여되어 있다. 두 생물체들이 심적인 면에서 차이가 난다면, 그것은 양자가 물리적인 면에서 차이가 나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달리 말해서, 관련된 심적 측면의 물리적 원인이 한 생물체에서는 나타나지만 다른 생물체에서는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된다고 할 수 있다. 즉, 부수현상론자는 물리적으로 식별 불가능한 두 생물체들은 동일한 심적 특성들을 발현해야 한다는 데에 틀림없이 동의할 것이다. 심신 문제에 대한 이처럼 다양하고 상충되는 접근법들이 모두 심신 수반을 인정한다면, 심신수반론은 이러한 고전적인 이론들과 대등한 자리에 놓일 수 있는 심신 이론이 되기 어렵다 (주석 : 심신 수반은 심지어 실체이원론에 의해서도 배제되지 않는다.).

이상의 논의에 비추어 볼 때, 심신 수반에 대한 단순한 주장만으로는 그것의 근거가 무엇인지, 또는 그것을 설명해주는 것이 무엇인지 - 즉, 왜 수반 관계가 심적인 것과 물리적인 것에 대해서 성립하는지 - 에 대해서 말해주는 바가 없다 (주석 : 수반 관계에 대한 설명의 필요성에 관해서는 Terence Horgan, "Supervenience and Cosmic Hermeneutics." Southern Journal of Philosophy 22, suppl. (1984) : 19-38 와 Terence Horgan and Mark Timmons, "Troubles on Moral Twin Earth : Moral Queerness Revisited", Synthese 92 (1992) : 221-260 ; Horgan, "From Supervenience to Superdupervenience", Mind 102 (1993) : 555-586 를 보라. 내가 아는 한, 물리주의자가 심신 수반에 대해서 물리주의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왜 중요한지를 처음으로 강조한 사람이 호간이었다. 그리고 심적 속성들의 수반에 대한 한 가지 가능한 설명으로서 심적 속성의 기능화 가능성 (functionalizability) 을 처음으로 제시한 사람도 호간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위에서 언급한 호간과 티몬스의 논문을 참조하라.). 여기에 관련된 일반적인 문제를 살펴보기 위해서 규범적 또는 평가적 속성들이 비규범적이거나 비평가적인 속성들에 수반한다는 규범수반론을 생각해 보자. 다양한 메타 윤리 이론들이 규범적 수반을 받아들이지만 그것의 기원에 관해서는 서로 다르게 설명한다. 자연주의적 윤리론자들의 경우에는 규범적 속성들이 비규범적인, 즉 자연적 속성들에 의해서 정의될 수 있기 때문에 수반이 성립한다고 본다. 무어 (G. E. Moore) 와 같은 직관주의적 윤리론자는 규범적 수반을 더 이상 설명될 수 없는 근본적이고도 선험적ㆍ종합적인 사실로서 우리의 도덕감을 통해서 직접 파악되는 것으로 볼 것이다. 비인지주의자인 헤어 (R. M. Hare) 는 규범 언어에 대한 어떤 규정들과 규범적 수반을 연결시키려고 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여전히 규범적 수반의 근거를 규범적 평가 개념에 둘 수도 있다. 즉, 궁극적으로 규범적 판단과 평가는 그 자체로 비규범적이고 비평가적인 이유나 근거를 기초해야만 하고, 규범적 속성들은 비규범적인 적용 기준들을 가져야만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심신 문제의 경우에도 경합하는 심신 이론들이 심신 수반에 대해서 경쟁적인 설명을 제시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환원적 유형 물리주의가 제시한 설명은 규범적 수반에 대한 자연주의적 설명과 흡사하다. 즉, 심성이 물리적으로 환원될 수 있기 때문에 심신 수반이 성립한다고 보는 것이다. 유형 물리주의에 따르면, 심적 속성과 물리적 속성은 동일하다고 하는데 이것은 윤리적 자연주의가 윤리적 속성을 자연적 속성과 동일하게 보는 것과 똑같다. 창발론은 윤리적 직관주의처럼 심신 수반이 어떠한 식으로도 설명될 수 없는 것으로 간주한다. 창발론의 선두 주자인 알렉산더 (Samuel Alexander) 가 주장한 바와 같이 심신 수반은 "자연적인 경건심" 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맹목적 사실이라는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부수현상론은 수반을 설명하기 위해서 인과 관계 ("동일한 원인, 동일한 결과" 의 원리) 를 끌어들이는 반면에, 물리적 실현주의에 따르면, 우리가 앞으로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지만, 심적 속성들이 하위의 (1차적) 물리적 속성에 의해서 정의되는 상위의 (2차적) 기능적 속성이라는 사실로부터 직접 귀결되는 결과가 바로 심신 수반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심신수반론 자체는 설명력이 있는 이론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것은 단지 심적인 것과 물리적인 것 사이에서 성립하는 속성들간의 공변 패턴을 서술하고 양자간의 의존 관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말해줄 뿐이다. 그러나 수반은 심적인 것이 물리적인 것에 수반하는 이유를 설명해줄 수 있는 의존 관계의 성격에 관해서는 묵묵부답이다. 문제의 핵심을 달리 표현하자면 다음과 같다. 수반은 의존 관계의 한 유형이 아니다. 즉 수반은 인과적 의존, 환원적 의존, 부분-전체적 의존, 정의 가능성이나 필함 (entailment) 에 근거한 의존 등에 필적할 수 있는 관계가 못 된다는 것이다. 오히려 이 의존 관계들 중 어떠한 것도 수반에 필요한 속성들의 공변을 낳을 수 있고 그럼으로써 수반 관계로서의 자격을 인정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수반은 형이상학적으로 "강한" 관계가 아니라 속성 공변의 패턴들에 관한 "현상적인" 관계에 지나지 않는다. 이 패턴들은 아마도 좀더 강한 의존 관계들을 표현할 것이다. 이상의 관찰이 맞다면, 심신 수반은 심신 문제를 서술할 분 그것에 대한 해결책은 될 수 없다고 봐야 한다. 이것은 곧 수반이 비환원적 물리주의의 형이상학적인 근거를 제공해주지 못하므로 비환원적 물리주의는 그 근거를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심신 수반을 받아들이는 심신 관계에 대한 어떠한 설명도 심신 수반의 근거를 설정해주고 설명해줄 수 있는 심신간의 의존 관계를 자세히 명시하여야만 한다.

그런데 이상의 고찰로 인하여 심리철학에서 수반 개념이 가지는 유용성이 폄하될 필요는 없다. 수반 자체가 심신 관계에 대해서 설명해줄 수 있다는 희망이 꺾이는 것은 확실하지만, 긍정적인 면도 있다. 즉, 기본적으로 물리주의 노선에 서 있는 심성에 관한 모든 이론들이 심신 수반을 공통적으로 받아들인다는 점을 우리의 논의가 보여준 것이다. 왜냐 하면 심성이 기본적으로 물리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과, 심성이 발현되는 대상이나 사건들의 물리적 성질에 근거해 있지 않은 채 멋대로 떠도는 심성이란 없다는 생각을 심신 수반이 반영해주기 때문이다. 이것은 환원주의적 유형 물리주의라는 극에서부터 이원론적 창발론이라는 극에 이르기까지 심신 문제에 관한 다양한 입장들이 공유하는 생각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심신 수반은 물리계에 의해서 제한을 받지 않고서 멋대로 떠도는 정신계를 허용하는 데카르트적 이원론과 같은 극단적인 형태의 이원론과는 양립할 수 없다 (주석 : 속성 공변으로서의 수반과는 일치하지만 반대칭적인 의존을 포함하는 완숙한 형태의 수반과는 일치하지 않는 형태의 이원론이 있는데, 스피노자의 양면 이론 (double-aspect theory) 과 라이프니츠의 예정조화설이 그 예다. 창발론이 심신 수반을 용인하는 듯하지만 창발론의 기본 신조 중 "하향적 인과 (downward causation)" 설이 수반 논제와 일치하는 지는 전혀 분명하지 않다. 졸고, "Downward Causation' in Emergentism and Nonreductive Physicalism", in Emergence or Reduction?, ed. A. Beckermann, H. Flohr, and J. Kim (Berlin : De Gruyter, 1992) 참조.). 그래서 심신 수반은 최소 물리주의를 정의하는 유용한 기준이 될 수 있다고 본다.

3. 다층적 모델과 부분-전체 수반

데카르트의 실체 이원론은 세계가 심적인 영역과 물리적인 영역이라는 두 개의 독립된 영역으로 이루어졌다고 보고서 각 영역은 독자적으로 특징적인 속성들 (심적인 영역은 의식, 물리적 영역은 공간적 연장성) 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그 두 영역들은 인과적으로 상호 작용하지만, 각 영역에 있는 "실체" 들은 서로 존재론적으로 독립되어 있으며, 한 영역이 전혀 존재하지 않더라도 다른 영역은 존재하는 것이 형이상학적으로 가능하다. 이러한 이분법적인 세계관을 대체한 것이 바로 다층적 모델인데 이것은 세계가 여러 개의 상이한 "층" 이나 "단계" 들로 나누어지고 계층적인 구조를 이룬다고 보는 관점이다. 제일 밑에 있는 층은 흔히 입자로 이루어지거나 물리학이 말하는 물체의 구성 요소들 중 가장 기초적인 단위로 이루어진다고 생각된다 (주석 : 물론 층화된 모형은 최하층을 상정할 필요는 없다. 층들이 무한히 내려간다고 생각해도 무방한 것이다.). 그 층계를 따라 올라가면, 원자, 분자, 세포, 조금 더 큰 생물체 등을 차례로 만나게 된다. 이러한 계층적 구조를 발생시키는 순서는 부분-전체 (mereological) 관계에 따른 것이다. 최하위 층을 빼고는, 상위에 속한 개체들은 하위에 속한 개체들로 남김 없이 분해된다. 그리고 최하위에 있는 개체들은 더 이상 물리적으로 의미 있는 부분들로 나누어지지 않는다.

다층적 모델에서는 각 층마다 그 층에서 처음으로 출현하거나 "창발하는" 속성이나 활동, 기능들 (우리는 이것들을 그층의 특징적 속성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 있다고 본다. 그래서 분자의 층이 가지는 특징적 속성들 중에서 전기 전도성, 가연성, 밀도, 점성 등이 있다. 물질 대사나 재생산과 같은 활동과 기능은 세포의 층에서 나타나거나 분자 층보다 조금 더 높은 생물체 단계에서 나타나는 특징적 속성이고, 의식을 비롯한 심적 속성들은 고등 생물의 층에서 나타나는 특징적 속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다층적 세계관은 20 세기의 대부분 기간 동안 형이상학과 과학철학의 다양한 쟁점들 - 예를 들어, 환원과 환원주의, 심신 문제, 창발, 특수 과학의 지위, 통합 과학의 가능성 등 - 에 대한 토론이 이루어질 때 지속적으로 펼쳐진 - 명시적으로 서술되지 않을 때는 암묵적으로 전제된 - 배경막이 되어주었다. 실제로 이러한 세계관은 우리가 여러 분야에서 문제와 해결 책을 모색하는 방식에 대해서 강하고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쳐왔다. 다층적 모델은 때때로 개체와 속성에 의해서 표현되기보다는 개념과 언어에 의해서 표현된다. 조직의 단계, 서술이나 언어의 단계, 분석의 단계, 설명의 단계들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도처에서 듣게 된다. 과학에 관한 철학적인 저술 뿐만 아니라 여러 분야의 과학적인 문헌들, 특히 심리학과 인지과학, 체계 이론, 컴퓨터 과학의 다양한 분야들에서 나오는 문헌들에 다층적 세계관이 깊이 스며들어 있다 (주석 : 시각에 대한 저서에 마 (David Marr) 가 분석의 세 단계 (계산 단계, 연산 단계, 수행 단계) 를 구분한 것은 유명하다. 그의 저서 Vision (New York : Freeman Press, 1982) 참조. 20 세기 초반에 최초로 창발론자들이 다층적 모형을 명시적으로 정식화했다고 여겨진다. C. Lloyd Morgan, Emergent Evolution (London : Williams and Norgate, 1923) 을 보라. 특히 다층적 모형을 명료하고 유용하게 서술한 예로는, Paul Oppenheim and Hilary Putnam, "Unity of Science as a Working Hypothesis," Minnesota Studies in the Philosophy of Science, vol. 2 (1958) 를 들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중요한 물음에 이르게 되었다. 임의의 층에 속한 특징적 속성들이 인접 층 - 특히 아래층 - 에 있는 속성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는가? 생물학적 ("활력적") 속성들이 어떻게 물리화학적인 속성들과 연결되는가? 의식과 지향성이 어떻게 생물학적 (물리적) 속성들과 관계를 맺는가? 사회 집단에 특징적인 현상들인 사회적 현상들이, 개별 구성원들과 관련된 현상들과 어떻게 관련을 맺는가? 당신도 인정하겠지만, 이 문제들은 과학철학, 형이상학, 심리철학의 중심 문제들을 이룬다. 이 물음들에 대해서 어떠한 답변을 하느냐에 따라 해당 문제들에 대한 철학적인 입장이 정해진다. 이러한 입장들 중 잘 알려진 것들로는 환원주의, 반 환원주의, 방법론적 개체주의, 창발론, 신 활력론 등이 있다. 우리는 인접해 있는 단계들에 모두 적용될 수 있는 단일한 답변을 시도할 수 있거나, 상이한 층에 관해서 상이한 입장을 취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최하층 외의) 모든 층에 있는 속성들은 분명하고 실질적인 의미에서 하층의 속성들로 환원되고 궁극적으로는 물리학의 기초 속성들로 환원된다고 주장할 수 있다. 또는 선별된 특정한 층들 (이를테면, 물리화학적 속성들에 대한 생물학적 속성들) 에 대해서만 환원주의의 입장을 취하고, 다른 층들에 있는 속성들 (예를 들어, 의식과 지향성) 에 관해서 반 환원주의적인 입장을 견지할 수도 있다. 그리고 어느 층의 특징적 속성들 전부에 관해서 단일하게 답변을 할 필요도 없다. 예를 들어, 심적 속성들 중 현상적 속성이나 감각질은 환원 불가능하지만 명제 태도를 포함한 지향적 속성들은 (인과적으로든 기능적으로든 아니면 생물학적으로든간에) 환원 가능하다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심적 수반 개념을 가진 다층적 모델을 살펴보자. 수반이 다층적 모델에 도입될 때는 하위 속성들에 대한 상위 속성들의 수반 관계를 다음과 같이 도식화할 수 있다.

L 층에 속한 임의의 x 와 y 에 대해서, x 와 y 가 L 보다 아래에 있는 모든 층에 속한 속성들과 관련하여 식별 불가능하다면 (또는 x 와 y 가 미시적으로 식별 불가능하다면), x 와 y 는 L 층에 있는 모든 속성들에 관해서 식별 불가능하다.

우리는 미시적 식별 불가능성 (microindiscernibility) 개념을 어떻게 설명할까? 다음과 같은 설명이 꽤 자연스럽고 직선적인 것 같다 (주석 : 매우 한정된 논의기는 하지만, 졸고 "Supervenience for Multiple Domains", reprinted in Supervenience and Mind 를 참조하라.).

L 층에 속한 x 와 y 가 미시적으로 식별 불가능하기 위한 필요 충분 조건은 다음과 같다 : x 가 하위에 속한 요소들로 분해된 각 경우 D 에 대해서, y 는 다음과 같은 의미에서 동형의 분해 사례 C 를 가진다 : 다음과 같은 D 로부터 C 에 이르는 일 대 일의 함수 I 가 있다 : L 보다 아래층에 있는 n-항의 속성이나 관계 P 에 대해서, P(dn) iff P(I(dn)) 이 성립한다. (여기서 dn 은 D 에 있는 원소들 중 n-열의 원소이고 I(dn) 은 I 아래에서 dn 의 상이다.) 그리고 y 로부터 x 의 역도 마찬가지로 성립한다 (주석 : [역주] 여기에 나오는 논리학의 용어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n-항 (n-adic) 은 '1 항 (monadic)', '2 항 (dyadic)' 등을 일반화한 용어다. 'n-열 (n-tuple)' 은 '순서 쌍 (ordered couple)', '순서 3 쌍 (ordered triple)' 등을 일반화한 용어로서 n 개의 대상들 (특히 수들) 의 순열 (ordered sequence) 을 말한다. 영역 D 에 관한 (2 항의) 관계를 R 이라고 할 때, R 의 상 (image) 은, R(x, y) 를 만족시키는 모든 대상들 y 의 집합이 된다. 예를 들어, R(x, y) 가 "x 는 y 의 아버지다" 를 나타낸다면, R 의 상은 아버지를 가진 모든 사람들의 집합이 된다. "I(dn) 은 I 아래에서의 dn 의 상이다" 는 다음과 같이 읽을 수 있다. "I(dn) 은 I 의 관계 (즉, D 로부터 C 에 이르는 일대 일 대응 관계) 를 가지면서 C 의 원소가 되는 대상들의 집합이다." 그리고 "P(dn) iff P(I(dn))" 이 말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P 가 대상들의 임의의 순열 dn 에 대해서 성립하기 위한 필요 충분 조건은, P 가 대상들의 순열 I(dn) - 즉, D 에 있는 순열에 대응하는 C 에 있는 순열 - 에 대해서 성립하는 것이다.").

수반 논제들이 다층적 모델에 적용되면 부분-전체적 수반론 - 전체의 속성들은 그 전체를 구성하는 요소들의 속성과 관계들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이론 - 이 된다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거시-미시적 수반에 대한 일반적인 주장은, 세계가 현재와 같은 상태인 것은 미시 세계가 바로 그렇기 때문이라는 데모크리토스식의 원자론이 된다 (주석 : 최하층이 있다고 전제한다면, 모든 사물은 최하층의 개체들로 분해되고 분해된 결과는 단일할 것이다. 그리고 x 와 y 가 최하층의 개체들로 분해되었을 때 x 와 y 가 분해된 상태에 대해서 미시적으로 식별 불가능하다면, x 와 y 가 미시적으로 식별 불가능한 것들이라는 점이 틀림없이 입증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심적 속성으로 돌아가자. 아마도 심적 속성들은 좀더 높은 층의 생물체들에게서 나타나는 특징적 속성들일 것이다. 그리고 다른 상위의 속성들처럼 심적 속성들은 그 생물체들을 구성하는 요소들의 성격을 규정짓는 하위의 속성들에, 앞에서 설명된 의미에서, 수반한다. 즉, M 을 대상 x 가 지니는 심적 속성이라고 한다면, x 와 미시적으로 식별 불가능한 y 는 그것이 무엇이든지간에 역시 M 을 가질 것이다. 그러므로 심적 속성은 미시적 속성에 수반하는 거시적 속성이다.

우리는 이 결과를 실제 상태보다 더 확대 해석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다층적 모델에 따르면, 심신 수반은 부분-전체적 수반의 한 사례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마치 하나의 진보인 것처럼 여기고서 거시 물리적 속성들이 미시 물리적 속성들에 의해서 결정되고 설명되는 것과 같은 식으로 심신 수반을 설명해도 되겠거니 하는 생각에 빠지기 쉽다. 그러나 수반이나 결정과, 설명은 별개의 것이다. 우리는 B 가 A 를 결정한다 (또는 A 가 B 에 수반한다) 는 것을 알면서도 왜 그렇게 되는지 - 왜 A 가 C 가 아닌  B 로부터 발생하는지, 왜 D 가 아닌 A 가 B 로부터 발생하는지 - 에 대해서는 모를 수 있다. 물리적인 것에 대한 심적인 것의 부분- 전체적 수반은 그 특정한 심신 수반 관계가 왜 성립하는지를 우리가 이해할 수 있도록 자동적으로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물리적이면서 부분-전체적인 통합체 P 에 심적 속성 M 이 수반한다면, M 이 적절한 의미에서 P 로 환원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이 여전히 남는다. 우리는 어떤 것이 M 을 갖게 되는 이유를 그것이 P 를 가진다는 것에 의해서 설명할 수 있을까? P-M 을 비롯하여 여타의 수반 관계들이 더 설명될 수 있는가 (그리고 여기서 "설명" 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아니면 맹목적이고 근본적인 것으로서 간주되어야 하는가? 이러한 물음들은 P 가 미시 물리적으로 성격이 규정된 속성이냐의 물음과는 관계가 없다.

이 물음들은 정당한 물음들이라고 생각된다. 다층적 모델은 우리가 심신 문제를 설정할 수 있는 유용한 존재론적인 틀을 우리에게 제공해준다. 이 모델의 좀더 넓은 맥락에 이 문제를 놓음으로써 우리는 그 문제에 대해서 일반적 원칙과 구조를 모두 제공한다. 그리고 이로 인하여 우리는 그 문제의 해결책에 대한 공정한 제한 범위를 설정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과 아울러 다른 영역에 있는 문제들과 심신 문제가 가지는 공통성뿐만 아니라 가능한 특이성도 평가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어려운 물음들은 여전히 손도 못 댄 채로 남는다. 이제 이 물음들에 대한 해결책으로서의 물리적 실현 개념을 고찰해보자.

4. 물리적 실현주의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물리적 실현주의 (physical realizationism) 란, 심적 속성들이 실현될 경우 물리적으로 실현되어야 한다 - 즉, 어떠한 심적 속성들도 비물리적으로 실현될 수 없다 - 는 주장을 의미한다 (주석 : 우리는 이 주장에 들어 있는 필연성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은 채 넘어갈 것이다. 어떠한 필연성 (법칙적, 형이상학적, 개념적 필연성 등) 을 선호하느냐에 따라 상이한 형태의 물리적 실현주의가 등장할 것이다. 이후의 논의는 대개 이 문제와는 무관하다.). 그러므로 물리적 실현주의는 심적 속성에 대한 기능주의적 개념과 물리주의를 결합한 것과 같고, "물리주의적 기능주의 (physicalist functionalism)" 라는 이름도 이 입장을 잘 나타내주는 이름이 될 것이다. 기능주의는 심적 속성과 종류를 기능적 속성으로 보는데, 이 기능적 속성은 감각 입력과 행동 출력 사이에서 수행하는 인과적 매개자로서의 역할에 의거해서 상술되는 속성들이다. 그리고 물리주의적 기능주의는 이러한 인과적 역할을 가지고 있거나 "실현하는" 것들은 바로 물리적 속성들뿐이라고 본다 (주석 : 표준적인 형태의 기능주의도 출력에 심적 상태를 포함시킬 것이다. 예를 들어, 고통의 경우에 심적으로 압박 받는 느낌이나 그것을 제거하려는 욕구와 같은 심적 상태들이 해당된다. 그러나 논의의 단순성을 위해서 우리는 이처럼 복잡한 것까지 고려하지는 않겠다.). 표준적인 예를 들어 말하자면, 한 생물체가 고통스런 상태에 있다는 것은, 세포 조직의 손상에 의해서 전형적으로 발생하는 내적 상태와 아울러 신음과 움츠림을 비롯한 여타의 특징적인 고통 행동을 전형적으로 발생시키는 내적 상태에 그 생물체가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고통 상태에 있다는 것은 2 차적 (second-order) 속성이라고 말해진다. 어떤 체계 X 가 이러한 속성을 가진다는 것은 곧 x 가 특정한 조건 D 를 만족시키는 1 차적 (first-order) 속성 P 를 가진다는 것과 같다. 방금 말한 경우에 D 는 P 가 고통의 전형적인 원인과 전형적인 결과들을 가진다고 명시한다.

2 차적 속성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좀더 일반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주석 : 심성에 대한 기능주의적 개념과 2 차적 속성의 일반적인 개념은 퍼트남이 처음으로 제시하였다. 후자에 대해서는 그의 논문, "On Properties", in Philosophical Papers, vol. 1 (Cambridge :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75) 를 보라. 기능주의의 대부인 퍼트남이 2 차적 속성 개념을 도입했지만 블록이 그 개념을 그의 논문, "Can the Mind Change the World?" in Meaning and Method, ed. George Boolos (Cambridge :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0) 에서 사용하기 시작하고 나서야 기능주의의 토론에서 등장하게 된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그러나 퍼트남은 그의 논문, "On Properties" 에서 실현 개념과 이차적 속성 개념을 명시적으로 관련시키지는 않았다.). B 를 속성들의 집합이라고 하자. 이것들은 1 차적 (또는 "기초") 속성들이 된다. 이때 1 차적이라고 함은 절대적인 의미가 아니다. 그것들은 다른 속성들의 집합에 대해서는 2 차적 속성들이 되기도 한다 (주석 : 물론 혹자는, 2 차적 속성들이 있다면 절대적인 의미에서 1 차적인 속성들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부여주는 일종의 정초론 (foundationalism) 적 논변을 개발할 수도 있다.). 심적 속성들이 2 차적 속성으로서 B 로부터 발생된다면, 우리는 당연히 B 가 (물리화학적, 생물학적, 및 행동적 속성들을 포함한 (주석 : 넓은 내용 (wide-content) 속성들이 2 차적인 기능적 속성들로 해석되어야 한다면, 관계적/역사적 속성들을 포함시켜야 할지가 문제될 수 있다. 또한 우리는 기초적 영역으로부터 비물리적인 속성들을 배제할 필요는 없다. 물리적 실현주의가 옳다면, 비물리적인 속성들은 심적 속성의 실현자들이 되지 않을 것이다.) 비심적인 속성들로 이루어진다고 봐야 한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정식이 성립된다.

F 가 기초 (또는 1 차적) 속성들의 집합 B 에 대한 2 차적 속성이 되기 위한 필요 충분 조건은, F 가 'D(P) 와 같은 속성 P 를 B 안에 가짐' (여기서 D 는 B 의 구성 요소들에 대한 조건을 나타낸다) 이라는 속성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2 차적 속성들은 기초 속성들에 대한 양화 - 현재의 경우에는 존재 양화 - 에 의해 일반화되었다는 점에서 2 차적이다. 우리는 조건 D 를 만족시키는 기초 속성들을 2 차 속성 F 의 실현자들이라고 부르겠다. 예를 들어, 기초 집합 B 가 색깔들을 포함한다면, 원색을 가짐이라는 속성은 2 차적 속성으로 간주될 수 있다. 즉 P = 적색, P = 청색, P = 녹색과 같은 속성 P 를 B 안에서 가짐이라는 속성이 되는 것이다 (주석 : 이렇게 말하는 대신에 원색을 가짐은 다음과 같이 정의될 수 있다. "원색을 가짐은, 다음과 같은 P 를 색깔의 집합 안에 가짐과 같다 : P 는 모든 색깔이 이 집합의 원소들을 첨가함으로써 생길 수 있는 그러한 색깔들의 최소 집합의 원소다." 이러한 식으로 정의된 2 차적 속성은 본문에서 정의된 속성과 동일한 실현자들을 가진다. 그렇다면 그 두 속성들이 동일하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향후 전개될 논의를 통해서 이 물음에 대한 결론이 나올 것이다.). 그래서 적색임, 청색임, 녹색임은 원색을 가짐의 세 실현자 (realizer) 들이 된다. B 가 광물들의 집합이라면 (주석 : 좀더 엄밀히 말하자면, 모든 광물 종 M 에 대해서 P 는 광물 M 임이라는 속성인 그러한 모든 P 라고 해야 할 것이다. 장황함을 피하기 위해서 우리는 좀더 간단한 용어를 사용할 것이다.) '옥임' 은 '연녹색이거나 흰색이고 보석용 원석으로 사용되거나 조각하기에 적합한 광물임' 이라는 2 차적 속성으로 여겨질 수 있다. 이 2 차적 속성은 경옥과 연옥이라는 두 개의 잘 알려진 실현자들을 갖는다.

조건 D 를 구성하기 위한 용어들에 관해서 잠시 말할 필요가 있다. 현재의 목적을 위해서 우리는 통상적인 논리적 표현들과 적절한 서술적 명사 (term) 들 (예를 들어, B 의 원소들을 지칭하는 명사들) 에 덧붙여서 (속성들, 또는 엄밀히 말해서 속성 사례들에 대해서 성립하는) 인과적 및 법칙적 (nomological) 관계가 활용 가능하다고 전제하겠다. 이제 B 에 대한 기능적 속성들이란 B 에 대한 2 차적 속성들이고 이것에 대한 조건 D 는 인과적 (법칙적) 관계를 포함한다고 설명할 수 있다. 즉, 기능적 속성들은 1 차적 속성들간의 인과적 (법칙적) 관계들에 의해서 정의된 2 차적 속성들인 것이다. 기능적 속성의 한 예로 최면성 (dormitivity) 을 들 수 있다 (주석 : 이 예는 Block, ":Can the Mind Change the World?" 에서 것이다.). 어떤 물체가 사람들로 하여금 잠을 자게 하는 화학적 속성을 가질 때만 최면성이라는 속성을 가질 수 있다. 밸리엄 (Valium) 과 세코날 (Seconal) 은 모두 최면성을 가지지만 각기 다른 1 차적 (화학적) 실현자들 - 즉, 다이아제팜 (diazepam) 과 세코바비탈 (secobabital) - 에 의해서 그 속성을 지닌다. 또는 수중 용해성을 생각해보자. 어떤 물체가 이 속성을 가지기 위해서는 그 물체가 물에 잠겼을 때 용해되게 하는 어떤 속성 P 를 가져야 한다. 이러한 기능적 속성 개념은 기능주의자들의 문헌에 나오는 표준적인 용법과도 잘 들어맞는다. 기능주의적 개념에 따르면, 심적 속성들은 인과적 역할에 의해서, 즉 (생물학적 및 행동적 속성들을 포함한) 1 차적인 물리적 속성들에 대해서 성립하는 인과 관계들에 의해서 규정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심적 속성은 그것을 가진 개인들의 외재적 (extrinsic) 또는 관계적 속성이 된다. 심적 상태에 있다는 것은, 어떠 어떠한 것을 그것의 전형적인 원인으로 가지고 어떠 어떠한 것을 그것의 전형적인 결과로 가지는 상태에 있다는 것과 같다. 임의의 속성이 특정한 역할을 가지느냐의 여부 - 즉, 그것이 기능적 속성의 실현자인가의 여부 - 는 본질적으로 그것이 다른 속성들과 맺는 인과적 및 법칙적 관계들에 의존하지, 그것의 내재적 (intrinsic) 성질에 의존하지는 않는다. 물론 내재적 성질들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다른 속성들과 인과적으로 연결되는 능력을 그 성질들이 가지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내재적 성질들이란, 그 성질의 담지자들이 임의의 기능적 속성을 예화하느냐의 여부를 결정짓는 것을 도와주는, 그 담지자들의 (현행의 법칙들과 관련된) 인과적 잠재력을 나타낸다고 생각할 수 있다. 반면에 인과적 및 법칙적 관계들의 네트워크는 기능적 속성들로 이루어진다 (여기서 우리는 속성에 관한 다음과 같은 여러 복잡한 문제들을 피해야만 한다. 속성들의 경우 "내재적" 과 "외재적" 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내재적' 과 '외재적' 의 구분은 절대적인가 상대적인가? 하나의 기능적 속성을 실현하는 실현자들 자체가 (다른 영역에 관해서) 2차적일 수 있는가? 등등. 물론 우리의 목적에 필요한 개념들을 사용할 수 있기 전에 이 문제들을 모두 해결할 필요가 없기를 바랄 뿐이다.).

심적 속성이 기능적 속성이라면, 심적 속성은 그것의 실현자들이 가지는 구성상의 (또는 구조적인) 세부 사항과 정의 면에서나 성격 면에서 연결되어 있지 않다. 임의의 속성이 임의의 기능적인 속성을 실현하는지의 여부는 우연적이고 경험적인 문제다. 다른 속성들과 올바른 인과적이거나 법칙적 관계를 맺고 있는 어떠한 기초 속성들도 그 임의의 속성의 실현자들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올바른 입력 자료에 의해서 활성화되고, 활성화되고나면 올바른 반응을 유발시키는 어떠한 메커니즘도 심리적인 능력이나 기능의 실현자가 될 수 있다. 심적 속성을 비롯한 여타의 개별 과학의 속성들이 상이한 종과 구조들에서 극도로 다양한 실현자들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심리철학과 과학철학에서 오랫동안 인정받아온 평범한 주장이다. 이러한 관찰에 근거해서 심리학과 인지 과학의 성격에 관한 특정한 관점이 제시되었는데 그 관점에 따르면, 심적 속성들의 형식적이고 추상적인 성격 - 이 성격은 심적 속성들의 다수 실현 가능성으로 인한 결과로 여겨진다 - 으로 인해서 인지 과학 - 다양한 생물 종과 무생물의 인지 체계를 망라하고 그것들을 물리적으로 실현하는 개체들과는 독립적으로 인지 속성들 자체를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작업 - 이 가능하다고 한다. 실제로 어떤 사람들은 심리학을 비물리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해왔다. 우리처럼 단백질 성분에 기초한 생물체든지, 전기 기계 장치로 된 로봇이든지, 탄소 성분이 없으면서 지능을 가진 외계인이든지, 물질 성분은 전혀 없는 데카르트식의 영혼이든지, 천사든지, 아니면 전지한 존재 자체든지 간에, 인지 능력을 가진 존재라면 어느 것에든지 성립할 수 있는 우연적이고 경험적인 인지 법칙이나 심리 법칙이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한 번 해봄직한 생각이다. (이것은 확실히 "합리적 심리학" 을 너무 확대한 셈이기는 하다.) 우리가 물리적 실현주의에 대한 유물론적인 제한을 도입할 때조차도, 인지 능력을 갖추고 있으면서 법칙적으로 가능한 모든 물리 체계들에 대해서 적용될 수 있는 인지 및 심리학의 보편 법칙을 생각하면 우리의 마음은 설렌다 (주석 : 졸고, "Multiple Realization and the Metaphysics of Reduction", reprinted in Supervenience and Mind 를 보라.).

임의의 물리적 속성 P 가 심적 속성 M 의 실현자인지의 여부는 P 가 들어 있는 체계의 성질에 달려 있다 (주석 : 슈메이커가 말한 의미의 "완전한 실현자들" 을 우리가 염두에 두고 있지 않는 한에서 그렇다. Sydney Shoemaker, "Some Varieties of Functionalism", reprinted in Identity, Cause, and Mind (Cambridge : Cabridge University Press, 1984) 에서 구분한 "핵심적 실현 (core realization)" 과 "전체적 실현 (total realization)" 을 참조하라. 또한 Ronald Endicott, "Constructival Plasticity", Philosophical Studies 74 (1994) : 51-75 를 보라. 여기서의 논의는 입력과 출력에 대한 명세가 모든 체계에 대해서 일정할 것을 전제하는데, 이것은 매우 이상화된 (실제로 명백히 거짓인) 전제다. 순전히 물리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고통 입력이나 고통 출력으로 간주되는 것은 상이한 종들 (이를테면, 인간과 문어) 에 대해서 매우 다를 뿐만 아니라 인간들 사이에서조차도 현격히 차이가 난다.). 그 이유는 심리학에서 전체 체계의 입력-출력 행동이 관심거리이고 P 가 수행하는 인과적 역할이 그 체계 전체의 성질 ("인과적 배선 계통") 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생체 조직이 손상되면 임의의 생물체 안에서 통각 뉴런이 흥분되는지의 여부는 분명히 그 생물체의 신경 조직에 의존한다. 그리고 신경 섬유가 흥분되면 도망가는 행동이 유발되는지의 여부도 그 생물체의 신경 체계와 운동 체계들에 의존할 것이다. 그래서 동일한 속성 P 가 상이한 체계 안에 들어 있을 때는 M 을 실현시키지 않을 수 있다. 이와는 반대로 다음과 같은 의미에서 P 를 기능적으로 대체할 수 있다. 한 생물체에서 P 를 예화하기 위한 정상적인 메커니즘이 어떤 이유로 기능 장애를 일으킨다면, 적합한 인과적 능력을 갖춘 다른 메커니즘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서 그 생물체에 대한 M 의 유사실현자를 공급할 수 있다.

M 의 실현자로서의 P 의 지위는 다른 차원에서도 달라질 수 있다. M 의 실현자로서의 P 의 신용도는 P 가 다른 속성들과 맺는 인과적이거나 법칙적인 관계에 의존하기 때문에 자연 법칙이 변하면 P 의 인과적 잠재력도 바꿔지고 M 의 실현자로서의 P 의 지위도 영향을 받게 될 것이다. P 는 이 세계뿐만 아니라 이와 법칙적으로 유사한 다른 세계에서도 M 을 실현 시킬 수 있다. 그러나 M 의 기초 영역 수준에서 우리 세계와는 다른 법칙들이 성립하고, 따라서 다른 인과적 구조들이 발생하는 세계에서는, P 는 M 의 고유한 기능적 명세를 충족시키지 못할 수 있다. 그러한 세계에서 M 은 이 세계에 있는 그것의 실현자들과는 전적으로 다른 실현자들을 가지게 되거나 아예 실현자를 가지지 못할 수도 있다 (주석 : 이 논의는 속성들의 개별화가 그 속성들이 등장하는 법칙과는 별도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전제한다. 이 전제에 대해서 논란이 벌어질 만하기는 하지만 이와 관련된 문제들을 제대로 논의하다보면 매우 복잡해지므로 여기서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다.).

실현 관계가 이러한 식으로 바꿔질 수 있더라도 이것의 항상성을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일단 그 체계의 물리적 구성과 지배적인 자연 법칙들이 고정되기만 하면, 그것은 P 가 M 을 그 체계 안에서 실현시키느냐의 여부를 결정짓는다. 즉, P 가 체계 s 안에서 M 을 실현시킨다면, s 의 법칙과 동일한 법칙의 지배를 받고 (법칙적 속성에 관해서) s 와는 구별되지 않는 모든 체계 안에서 P 는 M 을 실현시킬 것이다. 우리 모두가 수긍하는 바와 같이, 한 체계의 미시 구조가 그 체계의 인과적 및 법칙적 속성들을 결정한다면, 그 체계와 유사한 미시 구조를 가진 체계들에 대해서 그 실현 관계는, 법칙들이 항상성을 유지하는 한, 변하지 않는다는 결론이 나온다.

5. 물리적 실현주의가 심신 수반을 설명한다

유사한 미시 구조를 공유하는 체계들의 집합 S 를 생각해보자. 이 집합은 생물학적인 동종들로 이루어질 것이다. P 가 M 을 S 라는 종류의 체계들 안에서 실현시킨다고 하자. 실현에 대한 정의로부터 P 는 M 에 충분하다 (즉, S 체계가 t 시점에서 P 를 예화하면 그것은 t 시점에서 M 을 예화한다) 는 결론이 나온다. 실제로 실현 관계에 대해서 방금 언급된 법칙적 항상성이 전제된다면, P 는 M 에 대해서 법칙적으로 충분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래서 <P1, …, Pn> 이 <M1, …, Mn> 의 실현 - 각 Pi 가 Mi 의 실현자라는 의미에서의 실현 - 이라면, M 들은 P 들에 수반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므로 물리적 실현주의는 수반 논제를 필연적으로 함축한다. 실현 관계가 지배 법칙에 상대적이라는 것이 전제되면, 필함되는 수반 논제는 법칙적 필연성의 힘만을 갖지, 완전한 형이상학적인 필연성이나 논리적 (개념적) 필연성의 힘은 갖지 않는다. 그래서 상이한 법칙들의 지배를 받는 세계들에서 물리적으로 식별 불가능한 체계들은 동일한 심리학을 예화할 수 없다.

이것은 물리적 실현주의가 우리에게 수반 논제에 대해서 설명해주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즉 심적인 것이 물리적인 것에 수반하는 이유는 심적인 속성들이 물리적 실현자들을 가진 (그리고 비물리적인 실현자들은 가지고 있지 않는) 2 차적인 기능적 속성들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심적-물리적 상관 관계에 대한 설명도 할 수 있게 된다. P 가 s 라는 체계에서 실현될 때마다 심적 속성 M 이 예화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에 대한 답은, 정의상 'M 을 가짐' 은 '인과적 명세 D 를 지닌 속성을 가짐' 과 같고, s 와 같은 체계들에서는 P 가 명제 D 를 만족시키는 속성 (또는 여러 속성들 중 하나) 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s 와 같은 체계들에 대해서, 'M 을 가짐' 은 'P 를 가짐' 에 있게 된다. 어떤 체계들이 P 를 예화할 때 심적 속성 M 이 마술처럼 창발하거나 수반 (사전적 의미에서의 "수반")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체계들에 대해서 M 을 갖는다는 것은 단지 P 를 갖는다는 것과 같다. 우리에게 익숙하다 못해 진부한 환원적인 용어를 사용해서 말하자면, 이 체계들의 경우 M 을 갖는다는 것은 P 를 가지는 것 "이하도 이상도 아니다" 라고 할 수 있다. 이 모든 설명들이 법칙적 설명들이라는 점을 주목하라. 즉, 그것들은 일단의 법칙들이 우리 세계에서 우세하다는 사실에 의존한다. 왜냐 하면 어떠한 물리적 속성들이 임의의 심적 속성의 실현자들이 되는지를 이 법칙들이 궁극적으로 결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형이상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심적 속성들이 "물리적 상관자들" 이나 "신경 기질들" 을 가진다거나 "물리적인 수반 기초들" 을 가진다는 생각 이상의 것이다. "실현" 과는 달리, 이 후자의 생각들은 임의의 심적 속성이 특정한 물리적 속성으로부터 나오거나 그것과 상관 관계를 가지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으며, "적합한 체계에 대해서 M 을 가짐은 P 를 가짐에 있거나 그것과 같다" 와 같은 환원주의적인 발언을 보장해주지 않는다.

내 생각에 이러한 고찰들은 과학에서의 환원 패러다임과 잘 일치하는 환원 개념을 시사하는 것 같다. 한 속성이나 현상을 환원시키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그것이 다른 속성이나 현상과 맺는 인과적 (법칙적) 관계에 의해서 기능적으로 그것을 해석하거나 재해석한다. 예를 들어, 온도를 환원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그것을 내재적 속성으로 생각하기를 멈추고 다음과 같이 인과적 (법칙적) 관계에 의거해서 관계적으로 성격이 규정된 외재적 속성으로 해석한다. "온도란 어떤 대상이 다른 대상과 접촉할 때 증가하는 정도로서, 높을 때는 근처에 있는 왁스 덩어리를 녹이고, 사람들에게서는 따뜻하거나 차가운 느낌을 일으키고, 극도로 낮을 때는 쇠가 부서지게 되고 극도로 높을 때는 쇠가 녹는다." 또 다른 예로, 유전자는 부모로부터 자손에게로 물려질 수 있는 특성이 전이될 때 인과적으로 관련 있는, 생물체 안에 있는, 메커니즘이다라고 설명하는 경우를 들 수 있다. 또 투명하다는 것은 빛으로 하여금 방해를 받지 않고 통과하게 하는 종류의 분자 구조를 갖는 것이라고 설명하는 것도 한 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인과적 (법칙적) 명세를 만족시키고 그렇게 함으로써 특정한 인과적 역할을 수행하는 속성이나 메커니즘을 미시적 수준에서 흔히 발견한다. 이러한 경우에 다수 실현과 법칙적 상대성도 역시 얻게 된다. 온도는 기체에서 다르고, 고체나 플라스마, 진공에서 다르다. DNA 분자는 유전자의 실현자이지만, 우리와는 다른 기초 법칙이 지배하는 세게에서는 다른 종류의 분자들이 유전자의 인과적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그러므로 환원은 이중으로 상대적이다. 상이한 구조를 가진 체계들에서는 환원된 속성을 실현시키는 기저 메커니즘들이 다를 수 있다. 그리고 기초적인 자연 법칙들이 항상적일 때만 - 즉, 법으로 가능한 세계에 대해서만 (준거 세계에 상대적으로) - 환원은 타당성을 유지한다 (주석 : 그러므로 이것은 그러한 환원적 동일성이 형이상학적으로 필연적이라는 발언 - 이 발언은 크립키와 연결되어 있다 - 과 상반된다. Saul Kripke, Naming and Necessity (Cambridge : Harvard University Press, 1980) 를 보라. 그 차이는 내가 "온도" 등을 (크립키의 의미에서) 비고정 지시어로 해석하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비롯된다. 이 명사들은 법칙적으로 가능한 세계들에서만 지칭적으로 안정되어 있다. 우리는 그것들을 "준고정적 (semi-rigid)" 또는 "법칙적으로 고정적" 이라고 부를 수 있다.).

지금까지 서술된 내용은 환원, 특히 심신 환원의 가능성에 대한 논의를 지배해온 이론 환원의 표준 모델과 중요한 점에서 다르다. 이것은 네이글의 이론 상호간 환원 모델인데 이 모델의 주된 초점은 법칙의 도출에 있다 (주석 : Emest Nagel, The Structure of Science (New York : Harcourt, Brace & World, 1961), ch. 11 참조.). 네이글에 따르면, 환원은 기본적으로 증명 과정으로서, 두 이론들의 술어들을 연결시키는 "교량 법칙들" 과 함께 기초 이론의 법칙으로부터 표적 이론 (target theory) 의 법칙을 논리적 및 수학적으로 도출해내는 데에 있다. 일반적으로 이론들을 상호 연결시키는 교량 법칙들은 쌍조건문의 형식을 취하고 있으면서, 환원되는 이론의 영역에 있는 각 속성에 대해서 환원 기초 이론에 있는 법칙적으로 동연적인 (coextensive) 속성을 제공한다 (주석 : [역주] '동연성' 은 '같은 외연을 가짐' 이라는 성질을 말한다. F 를 술어 (또는 속성) 라고 할 때 F 의 '동연' 은 F 와 외연이 같은 다른 술어 (또는 속성) G 가 된다. 또는 "F 의 필요 충분 조건은 G 다 (F iff G)" 가 하나의 법칙이라면, G 는 F 의 법칙적 동연 (nomological coextension) 이라고 불리고 그 역도 마찬가지다.). 심신 환원을 네이글의 환원 모델에 따라 할 경우, 각 심적 속성이 법칙적으로 동연적인 물리적 속성을 모든 종과 구조 유형을 망라해서 제공받아야만 한다. 이로 인해서 심신 환원주의 - 실제로 모든 환원주의들 - 는 손쉬운 표적이 된다. 모든 사람들이 아는 바와 같이, 가장 영향력 있는 반환원주의 논변 - 여전히 강한 세력을 가지고 있는 반환원주의의 인기 있는 주장이 출발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 했었던 논변 - 은, 심적 속성들의 다수 실현 가능성으로 인하여 심적 속성들이 물리계에서 같은 외연들을 가지지 못하고, 따라서 네이글식의 환원에 필요한 심신 교량 법칙들이 성립할 수 없다는 주장에 근거해 있다. 그래서 이 논변은 모든 특수 과학들에 관해서 일반적인 반환원주의의 입장을 옹호하는 데에 일반화되었다 (주석 : J. A. Fodor. "Special Sciences, or the Disunity of Science as a Working Hypothesis", Synthese 28 (1974) : 97-115 참조.). 30 여 년 동안 환원주의에 대한 싸움은 적합한 교량 법칙들이 관련 영역에서 이용 가능하냐는 물음에 집중되어 왔다.

그런데 이것은 환원의 문제에 대한 싸움터로 적합하지 않다. 사실상 네이글의 환원 모델은 이론 상호간의 맥락에 적용되는 헴펠식의 법칙 연역적 과학 설명 모델과 다를 바 없다는 점이 제대로 인식되지 못해 왔다. 헴펠식의 설명이, 설명되어야 할 현상을 서술하는 진술을 해당 초기 조건들을 서술하는 보조 전제들과 함께 법칙들로부터 도출하는 데에 있는 것과 똑같이, 네이글식의 환원은 보조 전제로서의 교량 법칙들과 함께 기초 이론으로부터 표적 이론을 도출함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법칙 연역적 설명 모델이 30 여 년 동안 별로 신봉자들을 확보하지 못한 반면에 네이글식의 추론적 환원 모델이 여전히 환원과 환원주의의 논의에서 지배적인 표준으로 행세를 하고 있다는 것은 의외의 일이다 (주석 : 특히 과학철학의 전문적인 논의 영역 밖에서 그러하다.). 보편적인 쌍조건문 형식의 교량 법칙들에 근거한 네이글식의 획일적인 환원은 (그러한 것이 있다면) 과학에서 - 특히 미시 환원의 경우에 - 매우 드물다고 생각한다 (주석 : 과학에서 "환원" 이라고 불리는 절차들이 있기는 한데, 이것은 단순히 또는 주로 도출 (derivation) 에서 이루어지는 것 같다. 케플러의 행성 운동 법칙을 뉴턴 역학과 중력 법칙으로 "환원" 한다든지, 일정한 매개 변수들이 일정한 극한값을 가진다거나 그 값에 접근한다고 간주함으로써 뉴턴 물리학을 상대론적 물리학으로 "환원" 하는 것이 그 예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들 중 사소하지 않은 의미에서 네이글식의 교량 법칙들을 포함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점에 주목하라.). 그리고 앞에서 필자가 제안한 종류의 모델은 (주석 : [역주] 이는 물리적 실현주의 모델을 말한다.) 좀더 현실적인 뿐만 아니라, 이후의 논의에서 확인되겠지만, 형이상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도 더욱 적합하다. 이 점이 옳다면, 한 속성의 환원 가능성은 그것의 교량 법칙이 있느냐의 여부에 달린 것이 아니라, 그것의 기능화 가능성 (functionalizability), 즉 기초 영역에 있는 속성들에 대한 2 차적인 기능적 속성으로서 그 속성이 해석될 수 있느냐의 여부에 결정적으로 달려 있다. 교량 법칙들은 환원을 위한 필요 조건도 아니요 충분 조건도 아니다.

우리는 뒤에 가서 (제 4 장) 심신 환원과 환원주의와 함께 이와 관련된 문제들을 논의하겠다. 이 장에서는 심신 문제, 특히 심적 인과성과 심신 환원의 문제를 구성하는 주요 문제들에 대해서 좀더 상세한 논의를 하기 위한 사전 준비를 시도했다. 이 과정에서 다음 몇 가지 사항들이 분명해졌다. (1) 우리가 심신 관계를 이해하려면, 심적 속성들이 어떻게 물리적 속성들과 연결되어 있는지를 긍정적으로 설명해줄 수 있어야 한다. (2) 데이빗슨의 무법칙적 일원론은 이것을 못해주며, 이와 유사한 형태의 "개별자 물리주의" 이론은 어느 것도 마찬가지다. (3) 심신수반론은 그러한 설명을 제공해주지 못한다. 왜냐 하면 수반 자체가 설명을 요하기 때문이다. (4) 물리적 실현주의는 그것이 궁극적으로 옳든지 그르든지간에 그러한 설명을 기약해준다 (적어도 그것은 올바른 형식과 내용을 갖추고 있다). 특히 물리적 실현주의는 심신 수반을 설명해줄 수 있고, 심신 환원주의의 문제가 좀더 효과적으로 논의될 수 있는 더욱 현실성 있는 환원 모델을 시사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