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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심리철학

계산적 사회기능주의를 넘어서 - 김영정


계산적 사회기능주의를 넘어서

(Beyond Computational Socio-functionalism)

-퍼트남의 인공지능 비판을 중심으로-

김영정

Ⅰ. 여는 말

퍼트남은 Representation and Reality에서 “정신에 대한 계산적 견해(computational view)”로, 혹은 “기능주의”로 불리는 컴퓨터 유비가 결국 많은 인지과학자들과 더불어 철학자들이 대답하기를 원하는 질문 즉 “정신 상태의 본성은 무엇인가?”하는 질문에 대답하지 못한다는 것을 논변하고 있다. 다시 말해, 정신 상태란 컴퓨터의 알고리즘과 같은 어떤 것-즉, 마음이나 두뇌 속에 있는 과학적으로 단일하게 기술 가능한 원초적 존재자-일 수 없다는 것을 논변하고 있다. 이와 같은 퍼트남의 논지는 그가 부정하는 입장들을 살펴보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퍼트남이 부정하고자 하는 입장들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1) 정신 현상-지향성, 의미, 지시, 진리 등등-은 물리적/계산적 속성이나 관계로 환원되지 않는다.⇒환원주의 비판;

(2) 정신 현상은 원초적 현상이 아니다. 즉, 어떤 특정한 정신 현상의 모든 경우들이 공통적으로 갖는 과학적으로 기술 가능한 속성-배후에 실재하는 궁극적 본성-은 없다.⇒본질주의 비판;

(3) 정신 현상은 (정신 현상의 한 전형적 예인 진리가 제거될 수 없는 한) 신화적인 것으로 제거될 수 없다.⇒제거주의 비판.

퍼트남은 환원주의, 본질주의, 제거주의 이 세 입장이 모두 비판의 대상이라는 것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우리가 지향성을 물리적(혹은 아마도 계산적)인 용어들로 환원될 수 있는 현상으로 보는 철학적 그림도 또 지향성을 하나의 신화로 보는 그림도 또 더구나 지향성을 단일한 “환원불가능한 현상”으로 보는 그림마저도 부정하는 입장에 서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30쪽)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위와 같은 세 입장의 비판이 기능주의의 비판과 어떤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는지를 이해하는 것이다. 사실상, 기능주의란 환원주의의 한 형태(기능적 환원주의)이므로, 기능주의의 논박은 환원주의의 논박만으로도 충분하며, 그 이상의 비판(본질주의나 제거주의 비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정신 상태가 계산적 상태로 환원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곧바로 정신 상태가 컴퓨터 알고리즘과 같은 어떤 것일 수 없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퍼트남은 환원주의 비판을 본질주의 비판의 토대 위에서 수행하고 있어, 그의 환원주의 논박은 본질주의 논박에 의존적이다. 구체적으로 말해, 컴퓨터의 알고리즘과 같은 것은 과학적으로 단일하게 (혹은, 동치적으로) 기술 가능한 속성을 지닌 존재자이므로, 정신 현상이 과학적으로 단일하게 기술 가능한 원초적 현상이 아니라는 본질주의 비판은 바로 정신 현상이 컴퓨터의 알고리즘과 같은 것으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기능적 환원주의 비판에로 연결된다. 따라서 본질주의 비판은 퍼트남의 기능주의 비판에서 결코 생략될 수 없는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퍼트남의 구절을 인용하여 보자:

필자는 어떤 특정한 지향적 현상의 모든 경우들이 공통적으로 갖는 과학적으로 기술 가능한 속성이 없음을 보일 것이다. 이 입론으로써, 필자는 “지시” 일반 혹은 “의미” 일반 혹은 “지향성” 일반의 모든 경우들이 소유하는 어떤 과학적으로 기술 가능한 “본성”이 있다는 것을 부인하려 하며; 또한 필자는 예를 들어 “이웃에 많은 고양이들이 있다고 생각함”과 같은 어떤 한 유형의 특정한 지향적 현상의 모든 경우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어떤 과학적으로 기술가능한 속성이 있다는 것을 부인하려 한다.(28쪽)

실제로 퍼트남은 기능주의 비판을 이 본질주의 비판으로 마무리 지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퍼트남이 제거주의 비판을 덧붙인 이유는 만일 그가 주장하려는 것이 환원주의와 본질주의 비판뿐이라면, 그의 입장은 제거주의의 입장과 본질적으로 구별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제거주의 비판은 이 글의 논지와 직접 관련되는 부분이 아니므로 이 글에서는 다루지 않겠다.

퍼트남은 본질주의를 비판하는 논거로서 비트겐슈타인의 가족 유사성 개념을 중요하게 사용하고 있다.

[지향성과의] 보다 나은 비교는 비트겐슈타인에 의해 제시된 바 있는 용어 “게임”과의 비교이다. 일상언어의 수준에서조차도 모든 게임들이 “공통적인 어떤 것” 즉 게임임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이상하다. 왜냐하면 어떤 게임들은 승패가 개입되어 있고 다른 것들은 그렇지 않다; 어떤 게임들은 경기자들의 즐거움을 위해 행해지고, 다른 것들은 그렇지 않다; 어떤 게임들은 하나보다 많은 경기자들을 가지나, 다른 것들은 그렇지 않다; 등등. 같은 방식으로, 어떤 사람이 어떤 것을 “지시했다”고 우리가 말하곤 하는 모든 경우들을 (혹은 어떤 사람이 하나의 특정한 사물을 “지시했다”고 우리가 말하곤 하는 모든 경우에서조차도 이 경우들을) 자세히 검토할 때, 우리는 단어와 지시된 사물 간에 단일한 어떠한 관계도 발견하지 않는다.(28-29쪽)

실제로 가족 유사성 개념은 퍼트남의 기능주의 비판에 있어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비트겐슈타인의 가족 유사성 논변은 그의 책에서 “믿음의 차이 삭감 논변”(혹은 넓게는 “총체론 논변”)이란 이름 하에 보다 일반화된 형태로 등장한다.

고양이 한 마리가 매트 위에 있다고 믿고 있을 때 사람들이 처해 있을 수 있는 여러 다른 물리적 상태들이 물리적/화학적 용어들로 명시될 수 있는 “공통적인” 어떤 무엇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 바로 기능주의의 통찰이었다. 이러한 통찰과 꼭 마찬가지로 여기에서의 우리의 논의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고양이 한 마리가 매트 위에 있다고 믿고 있을 때, 사람들이 처해 있을 수 있는 여러 다른 계산적 상태들이 계산적 용어들로 명시될 수 있는 “공통적인” 어떤 무엇을 가질 필요가 없다.(154-155쪽)

기능주의자들이 물리주의자들에게 가한 비판의 핵심은 복수 실현 가능성(multiple realizability)이었다. 이제 퍼트남이 기능주의자들에게 가하고 있는 비판의 핵심도 역시 복수 실현 가능성과 같은 어떤 것-즉, 가족유사성-이라는 것이 위의 인용문의 핵심이다. 물론 복수 실현 가능성 개념은 가족 유사성 개념과 같은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복수 실현 가능성 개념은 동일한 이 여러 형태로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나, 가족 유사성 개념은 우리가 동일하게 부르는 이 실제로는 동일한 것이 아니라 단지 가족 유사성만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해, 기능적으로 동일한 것이 물리/화학적으로 다양하게 복수적으로 실현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직 본질주의적 입장을 버린 것이 아니나, 가족 유사성(즉, 기능적으로 동일한 것으로 간주된 것이 실제로는 가족 유사성밖에 없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은 본질주의적 입장을 비판하고 나선 것이다. 그러나 물리주의가 논박되는 이유가 과학적으로 기술 가능한 공통된 물리적 속성이 없다는 것이듯이, 기능주의가 논박되는 이유도 과학적으로 기술 가능한 공통된 기능적 속성이 없다는 점에서 이 둘은 유사성을 갖는다.

퍼트남의 비판이 단순히 비트겐슈타인의 가족 유사성 개념을 다시 도입하여 모든 유형의 기능주의 일반을 일거에 공격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의 논변은 위에서 언급된 단순한 형태의 가족 유사성 개념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는 여러 유형의 기능주의를 나누어 공격하고 있으며, 그의 비판 논변도 여러가지가 존재한다. 퍼트남은 그의 책에서 크게 네 종류의 논변들을 기능주의 비판을 위해 도입하고 있으며, 또 이 논변들을 이용하여 공략하고 있는 기능주의도 크게 네 유형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러나 종국에 가서 우리는 퍼트남의 다음 구절이 지니는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비록 필자가 제시할 논변에는 많은 부분들이 있지만, 그 논변은 단일한 논변으로 발전되고 있다.”(19쪽)

우선 네 종류의 논변들이란, 첫째, 믿음의 차이 삭감 논변과 총체론 논변 (이 두 논변을 합해, 간단히 총체론 논변); 둘째, 언어적 노동의 분업 논변과 환경의 기여 논변 (이 두 논변을 합해, 외부적 논변); 셋째, 엄밀하게 개진되고 있는 괴델적 논변; 넷째, 행동주의 논변과 무제한적 현실화 논변(이 두 논변을 합해, 간단히 현실화 논변)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 책에서 공략하고 있는 기능주의의 네 유형이란, 첫째, 생득 가설을 받아들이고 있는 MIT 정신주의; 둘째, 생득 가설을 전제하지 않는 정신주의적 기능주의; 셋째, 계산적 사회기능주의; 넷째, 루이스류의 상식적 기능주의가 그것이다. 이 네 유형 중 첫 세 유형은 모두 계산적 기능주의이고 네번째 유형만 계산적 기능주의가 아니다. 이 계산적/비계산적 기능주의의 구분은 기능주의적 입론을 어떤 방식으로 기술하느냐에 따라, 즉 기능주의적 입론을 계산적 형식주의에 의존하여 진술하느냐 아니냐의 여부에 따라 나누어진다. 전자는 계산적 형식주의를 활용하여 기능주의적 입론을 진술하는 반면, 후자는 민간심리학이나 어떤 다른 심리학적 이론을 활용하여 기능주의적 입론을 진술한다. 그리고 계산적 기능주의의 세 유형 중 첫 두 유형은 정신주의적 기능주의로, 생득 가설을 받아들이느냐의 여부에 따라 둘로 갈라지고 나머지 한 유형(계산적 사회기능주의)은 비정신주의적 (외부적) 기능주의이다.

이제, 이 글에서는 루이스류의 상식적 기능주의를 제외한 나머지 세 유형의 계산적 기능주의에 대한 퍼트남의 비판 논변들을 다음과 같은 순서로 살펴볼 것이다: 첫째 논변인 총체론 논변과 첫째 유형의 기능주의인 MIT 정신주의를 먼저 다루고; 그 다음, 둘째 논변인 외부적 논변과 둘째 유형의 기능주의인 비생득적인 정신주의적 기능주의를 다루고; 이어서, 셋째 논변인 괴델적 논변과 셋째 유형의 기능주의인 계산적 사회기능주의를 차례로 고려한 후, 끝으로 이 세 논변이 어떻게 상호 연결되어 단일한 논변으로 발전되고 있는지를 살펴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