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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심리철학

< 스트로슨의 심리철학 : 양면이론 >

< 스트로슨의 심리철학 : 양면이론 >  

김 영 건

1.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세계관을 거부하면서 물질과 마음의 이원론을 확보한 데카르트의 심리철학을 보았고, 데카르트의 심리철학이 지니고 있는 신화와 그 신화에 대한 거부작용을 크게 인식론적 측면과 존재론적 측면에서 고찰하였다. 데카르트의 심리철학이 범주오류라는 논리적 오류에 근거해 있다는 라일의 비판이나 데카르트적 이원론은 필연적으로 의미론적 유아론의 문제와 타인의 마음의 존재문제를 야기시킨다는 비트겐슈타인의 공박은 넓은 의미에서 인식론적인 논변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심적 현상에서 나타나는 인식론적 독특성에서 심적 실체가 도출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심적 현상도 물리적 현상과 동일하다는 동일론의 주장은 존재론적 논변이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인식론적 논변을 기초로 한 데카르트 이원론에 대한 공박은 논리적 행동주의(logical behaviorism)라는 철학적 입장으로 정리될 수 있으며, 존재론적 논변을 기초로 하여 전개된 데카르트 이원론에 대한 공박은 과학적 실재론의 세계관을 인정하는 환원적 유물론(reductive materialism)이라고 할 수 있다.

2. 그 자체 내재적인 철학적 난제를 산출하고 있는 이원론을 용인할 수 없다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입장은 논리적 행동주의와 환원적 유물론의 동일론이다. 과연 우리는 어느 입장을 선택할 수 있는가? 심리적인 것을 의미론적으로 또 인식론적으로 행동으로 환원시키려는 논리적 행동주의는 물리적 대상을 감각자료로 환원시키려는 현상주의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을 고스란히 안고 있으며, 더 나아가 우리가 구체적으로 느끼는 현상질(qualia)의 존재를 해명하지 못한다. 반면에 동일론도 김재권의 논문이 훌륭하게 보여 주었듯이, 심적인 것과 물적인 것의 동일성을 효과적으로 증명하지 못하고 더 나아가 속성이원론으로 떨어질 운명에 처하였다. 바로 이런 문맥에서 우리는 어떤 심리이론을 주장할 수 있는가?

3. 우리는 이런 문맥 속에서 스트로슨의 양면이론, 또는 인간(person) 개체이론이 지니고 있는 철학적 의의를 발견할 수 있다. 스트로슨의 양면이론은 이원론처럼 심적 현상과 물적 현상을 모두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심적 현상을 경험하고 그것을 통일시키는 주체가 이원론이 주장하듯이 심적 실체가 아니다. 그렇다고 아마 동일론이나 논리적 행동주의가 인정할지도 모를 무주체(no owner) 이론을 주장하지도 않는다. 우리의 육체가 심적 주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여기에 존재하는 개별자로서 인간이 그 주체이다. 언어를 사용하면서 개념적 능력을 갖는 이 인간 개별자가 존재론적 기초이며, 이 인간이 언어를 적절하게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배움에 있어서 그 선제적 필요조건으로서 타인의 마음을 이해한다. 즉 내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인식론적 조건이 바로 타인의 마음의 존재성이다. 우리가 언어를 사용하는 경험의 주체라면, 우리 인간은 단지 물질적인 것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이러한 스트로슨의 양면적 인간개체 이론이 어떻게 도출되고, 그 문제점이 무엇인지 윌리암스(B.Williams)의 비판을 통해 고찰해 보자. 스트로슨의 시도는 다른 심리이론을 비판하는 부정적 논변과 자신의 이론을 해명하고 옹호하는 긍정적 논변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A : 스트로슨의 혁명적 심리이론 비판

4.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에 나타나는 세계의 한계로서 형이상학적 자아관을 비판하면서 스트로슨은 자신이 해명하려고 하는 문제가 세계 안에 존재하면서도 경험의 주체가 되는 어떤 무엇이라고 명백하게 밝히고 있다.(127) 바로 이런 의미에서 우리 인간은 구체적인 시간과 공간의 세계 안에 존재하면서도 경험과 사유의 주체이다. 우리 인간이 구체적인 시간과 공간 안에서 존재하는 한, 마치 그러한 시간과 공간 안에 존재하고 있는 다른 개별적인 사물들에게 그러하듯이 물리적인 규준들로 규정지을 수도 있다. 그러나 개별적인 물질적 사물들과 다르게 인간에게는 또한 의식상태나 사유, 감각 등의 심적인 것들이 귀속되고 규정된다. 이렇게 분명하게 주어진 문제사실과 관련해서 우리가 해명해야 할 문제는 (1) 물리적 규준들이 적용되는 어떤 동일한 것에 의식의 상태와 같은 심적인 것이 규정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2) 의식상태가 어떤 무엇에 귀속되거나 속해야 만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다.(128)

5. 이 두 문제에 대한 제안적 답변으로 지각적 경험과 관련해서 특별한 역할을 담당하는 우리 자신의 육체를 들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답변은 비록 다른 사람의 육체와 나의 육체를 구분지워 준다고 할지라도, 한 인간으로서 나 자신의 개념이나 경험과 사유의 주체라는 개념을 해명해 주지 못한다. 왜냐하면 지각적 경험과 관련해서 독특한 역할을 하는 육체는 그 자체 경험적 지각의 대상이 될 수 있고, 다양한 지각적 경험과 관련해서 육체의 독특성은 흄이 보여주었듯이 우연적 문제에 불과할 수 있기 때문에 경험과 사유의 주체개념을, 즉 (2)의 문제를 해명해 주지 못한다. 더 나아가 육체적이고 물리적인 특성들이 경험과 사유주체에도 귀속될 수 있는 한, (1)의 문제는 여전히 설명되지 않은 채 남아있기 때문이다.

6. 우리 인간은 경험과 사유의 주체이면서 동시에 세계 안에 한 부분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인간에 대한 이러한 이해를 가능하게 만드는 우리의 개념체계가, 일상언어적 개념체계가 혼동되거나 사물의 진정한 본성을 보여주지 못하는 것일 수 있다. 스트로슨이 혁명적 형이상학(revolutionary metaphysics)라고 부른 시도들은 이 점에서 우리 일상언어적 개념체계에 대안적인 개념체계를 제시하고 있다. 스트로슨은 이 혁명적 형이상학의 시도로서 심리철학의 문제와 관련해서 데카르트의 이원론과 비트겐슈타인과 쉴릭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무주체 이론을 들고 있다. 이들 모두에게서는 우리가 해명해야 할 문제사실 (1)이 문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단지 언어적 환상에서 야기된 잘못된 질문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무주체 이론에서는 문제 (2)가 문제로서 성립되지 않는다.

7. 혁명적 형이상학의 주장과 함께 무주체 이론은 우리 경험과 사유주체는 지각적 경험 안에서 인과적 지위를 가지고 있는 육체라고 5에서 처럼 주장한다. 그러나 과연 이러한 주장이 경험과 사유의 진정한 주체로서 가령 자아(ego) 같은 것을 상정하는 이론들이 지적하는 문제점을 극복할 수 있는가? 스트로슨의 답변은 부정적이다.

무주체 이론은 다음과 같은 논변을 통해 자신의 주장을 전개하고 있다.

(가) 육체가 나의 모든 경험을 갖는다는 것은 우연적인 것이다.

(나) 자아가 나의 모든 경험을 갖는다는 것은 필연적이다.

(다) 논리적으로 소유의 양도가능성이 있는 경우에만 소유될 수 있다.

(라) 경험의 주체로서 자아가 소유하는 경험은 논리적으로 양도불가능하

다.

(마) 따라서 자아는 모든 나의 경험을 소유할 수 없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나)는 언어적 혼동에 기인한 언어적 환상이다. 그러나 스트로슨은 무주체 이론의 논변에 대하여 비정합적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무주체 이론은 (가)를 주장하지만, 그러나 육체가 모든 나의 경험을 갖는다는 것은 우연적인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나의 모든 경험이 아니라, 단지 모든 경험이 육체에 인과적으로 의존한다는 것은 거짓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이런 의미에서 육체에 우연적으로 의존하는 모든 경험이 <나의 경험>이기 위해서는, <특정한 육체에 인과적으로 의존하는 모든 경험>이 <한 인간의 모든 경험>과 동일한 것을 의미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내 육체가 나의 모든 경험을 갖는다는 명제가 분석적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만약 무주체 이론이 경험의 주체로서 나의 육체를 주장하는 것이라면, 그 이론은 자신들이 부정하려고 하는 (라)의 소유성의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무주체 이론은 논리적으로 양도불가능한 소유개념을 부정하고 있지만, 그러나 내 육체가 경험을 갖고 있다는 명제가 의미를 지니기 위해서는, 즉 특정한 육체와 우연적 관계에 놓이는 경험이 나의 경험이 되기 위해서는 그러한 소유개념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더 나아가 우리가 어떤 개별적인 의식상태나 사적 경험을 언급하려면, 그것을 어떤 인간의 경험으로 언급할 수 밖에 없다. 즉 어떤 사람이 실제로 지니고 있는 경험상태를 다른 사람이 가질 수 있다는 것이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그런 방식으로만 우리는 개별적인 경험에 대해 언급할 수 밖에 없다. 이런 의미에서 무주체 이론은 우리가 개별적인 의식상태나 경험을 언급할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해야 만 성립될 수 밖에 없다.1

8. 데카르트 이원론은 무주체 이론이 부정하는 명제 (나)의 정당성을 인정한다. 내 경험의 주체로서 자아는, 즉 심적 실체는 육체와 다른 유형의 주체로서 존재한다. 반면에 이러한 주체를 부정하는 무주체 이론도 역시 육체라는 주체와 무주체의 이원론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무주체 이론과 데카르트 이원론이 지니고 있는 공통의 가정은 "나"라는 개념이 서로 다른 두가지 용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무주체 이론은 그 한 용법의 정당성을 부정하지만, 그러나 데카르트 이원론는 그 용법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다.

9. 개별적인 경험과 의식상태의 소유성을 부정하는 무주체 이론의 주장은 경험과 사유주체의 개념에 대한 필요조건적 설명을 하고 있지만, 그러나 충분한 이유를 제시하고 있지 못하다. 무주체 이론이 파악하기 실패하고 있는 경험이나 의식상태를 자기 자신에게 귀속시키는 필요조건은 경험이나 의식상태를 다른 사람에게도 또한 귀속시킬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133)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사적 경험이나 의식상태에 대한 일인칭적 기술이나 삼인칭적 기술의 의미가 동일하다는 것이다. 무주체 이론이나 이원론과 다르게 일인칭적 의미와 삼인칭적 의미가 동일하다는 것은 철학자가 아닌 일반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미 비트겐슈타인이 지적했듯이 우리 일상언어의 사용방식과 그 논리적 문법을 오해하면서 일반성있는 논제를 주장하는 철학자에게는 사적 경험의 유아론 문제와 타인의 마음의 존재를 해명해야 만 하는 철학적 난제가 나타난다. 따라서 이미 무주체 이론에서 본 것처럼 만약 우리가 일인칭적 기술과 그 의미를 부정한다면, 우리는 경험과 사유의 주체개념을 해명할 수 없고, 이원론의 주장처럼 심적 실체로서 자아를 인정한다면, 우리가 어떻게 타인들에게 심적인 것들을 귀속시킬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나타난다. 이원론의 문맥 안에서는 이미 우리가 말콤을 통해 본 것처럼 유비추리를 사용한다고 해도 이 문제는 논리적으로 해결불가능하다.

B : 스트로슨의 인간이론

10. 스트로슨에 의하면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경험이나 의식의 상태를 귀속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우리가 경험이나 의식상태를 타인에게 귀속시킬 수 있는 한에서만 가능하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무주체 이론과 이원론의 문제점을 피할 수 있는 대안은 마음이나 육체의 개념 보다 논리적으로 선행하는 인간 개념을 인정해야 한다. 비록 심적 술어와 물적 술어가 모두 인간에 적용되지만, 그러나 그것은 심적인 것과 물적인 것의 합성체가 아니다. 따라서 심적 주체는 파생적인 이차 개념이며, 이러한 이차 개념에 해당되는 심적 실체로서 순수자아를 발견할 수 없다고 주장했던 흄이나 그것을 형식적 또는 분석적 통일성으로 이해했던 칸트, 세계의 한계로 규정지었던 비트겐슈타인 등은 여전히 인간을 심적인 것과 물적인 것의 합성체로 보는 이원론적 관점이라고 지적할 수 있다. 오히려 심적 기술과 물적 기술이 다 적용될 수 있는 논리적으로 더 근본적인 인간이 존재하고, 이러한 인간 존재 때문에 사유나 경험을 무엇에 귀속시킬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자아"(I)는 바로 인간 개별자를 지칭한다.

11. 스트로슨은 자신의 인간 개별자 이론을 우리 언어의 개념구조와 관련해서 옹호하고 있다. 기술적 형이상학(descriptive metaphysics)이 의도하는 우리의 개념체계에 대한 기술적 분석에 의하면, 우리 인간 개별자에게는 심적 기술과 물적 기술이 모두 가능하고, 심적 기술이 귀속되는 주체는 순수 자아가 아니라 바로 개별자 인간이다. 이때 인간 개별자에 귀속되는 심적 기술의 정당성은 어떻게 확보되는가? 적어도 우리가 타인에게 심적 술어를 적용하는 데 있어서 그 술어의 규준은 행동적인 것이다. 이러한 행동적 규준이 일인칭의 경우에도 적용되는가? 스트로슨는 바로 이 점에서 심적 기술은 행동적 규준에 의존하지 않는 일인칭적 사용과 또한 행동적 규준에 의존하는 삼인칭적 사용의 양 측면을 갖는다고 주장한다.(140-141)

적어도 이 주장에 의해서 우리는 타인의 마음에 대한 회의론과 철학적 행동주의의 양 극단을 피할 수 있다. 심적 기술의 일인칭적 사용만을 강조하는 철학적 회의론의 주장이 참이라면, 우리는 타인의 마음의 존재에 대해서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비트겐슈타인이 사적 언어의 논변을 통해 효과적으로 보여주었던 것처럼 우리의 개념체계의 정당성이 부정된다. 마찬가지로 심적 기술의 삼인칭적 사용만이 자기충족적이라고 주장하는 철학적 행동주의가 옳다면, 관찰적인 행동적 규준이 마련되지 않은 심적 기술의 사용은 정당성이 없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실제로 우리의 일상언어적 개념체계 안에서 행동적 규준에 의하지 않고 일인칭적인 심적 기술을 사용하고 있다.

12. 스트로슨이 지적하는 심적 술어의 논리적 독특성은 일인칭적 사용과 삼인칭적 사용의 의미가 동일하다는 것이다. 이 의미의 동일성은 바로 논리적 근본성을 지니고 있는 인간 개별자 때문에 가능하다. 그러나 도대체 어떤 근거에서 그러한 인간 개별자의 개념이 가능한가? 스트로슨은 이 물음에 대해 다음과 같은 두가지 답변을 제시하고 있다. (1) 만약 우리가 동일한 인간 본성에 따라 행위하는 존재로 우리 자신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인간 개별자로 보다 적절하게 이해할 수 있고, 바로 이것이 우리는 우리가 실제로 가지고 있는 개념체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2) 인간 개별자 대신에 집단적 정신이나 합성적인 육체의 부분이 의식과 경험의 주체라고 인정한다면, 이것들을 표현하기 위해 우리가 사용하는 인간과의 유비가 불가능하게 된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인간 개별자의 개념이 보다 근본적이다.

13. 스트로슨은 우리 인간의 일상언어적 개념체계의 특성들에 의존하면서 이러한 개념체계의 특성들을 부정하면서 자신의 심리이론을 전개하는 무주체 이론과 데카르트 이원론을 공박하고 있다. 더 나아가 스트로슨은 이러한 개념체계의 논리적 특성들에 주목하면서 인간 개별자의 개념의 논리적 근본성과 심적 술어들의 논리적 독특성을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사유와 경험의 주체는 인간 개별자이며, 이 인간 개별자의 논리적 근본성 때문에 물적 술어와 심적 술어가 다 적용될 수 있다.

스트로슨은 자신의 인간 개체이론이 지니고 있는 철학적 의의를 다음처럼 정리하고 있다. 만약 인간 개체이론이 정당하다면, 흄이 직면했던 문제, 즉 개별적인 의식의 동일성과 통일성을 마련하는 문제는 해소된다. 더 나아가 순수자아에 대한 칸트와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문제도 해소된다. 선험적 자아나 세계의 한계 보다 인간 개별자가 사유와 경험의 주체라는 것이 우리가 실제로 사용하는 언어와 개념체계의 구조에 더 부합된다.

C : 윌리암스의 비판

14. 윌리암스는 스트로슨의 시도에서 "데카르트와 무주체 이론의 비판, 심적 술어의 자기규정과 타인에 대한 규정과 관련되는 사용되는 논리적으로 타당한 근거의 개념, 지칭적 표현으로 '자아'에 대한 견해, 논리적인 '근본성'의 개념 등이 문제시될 수 있다"고 말하면서, 특히 두가지 종류의 술어에 대한 스트로슨의 구분이 분명하지 않다는 것을 문제삼고 있다.(121-22)

스트로슨은 물적 술어와 심적 술어를 구분하고 있다. 물적 술어는 물적 대상이나 인간에게 모두 사용되지만, 그러나 심적 술어는 오직 인간에게만 사용된다. 이 심적 술어는 다시 삼인칭적 관점에서 행동적 규준에 의해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들과 일인칭적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는 의식의 상태에 대한 것, 심적 술어의 하부집합으로 나눌 수 있다. 동물이 아닌 인간에게만 적용되는 것은 바로 후자의 것이다. 논리적으로 근본적인 것이 인간인 한에 있어서 이 의식상태에 대한 심적 술어가 보다 분명히 해명되어야 하지만, 그러나 스트로슨은 이 점을 불명료하게 취급하고 있다. 이런 한에 있어서 그의 인간개념 속에는 동물도 포함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심적 술어에 행동적 규준에 의해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심적 술어가 포함된다면, 이것은 물적 술어와 어떻게 다른가 하는 점이 분명히 해명되어야 한다. 물적 술어와 다른 행동적인 것들이 그 근거를 좁은 의미의 심적인 것에서 얻는다면, 이것은 인간에게 적용되는 심적 술어, 즉 행동적 술어들을 부당하게 제한하는 것이 된다. 더 나아가 부당하게 제한되는 좁은 의미의 심적 술어들은 데카르트 이원론이라는 심리철학의 한 입장을 반영하고 있다.

15. 스트로슨은 물적 술어와 심적 술어의 구분이 이미 주어져 있다고 가정하고 있다. 그러나 스트로슨의 이러한 가정이 그의 의도와 다르게 데카르트 이원론의 영상을 불러오고 있다. 가령 스트로슨은 이미 우리가 본 것처럼 우리의 지각적 경험이 육체와 관련되어 있는 방식은 우연적이다. 그러나 윌리암스는 만약 이러한 스트로슨의 주장이 참이라면 진정한 지각과 환상이 구분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동일한 곳에서부터 우리가 지각하고 움직이고 행위하는 것은 우연적인 사실이 아니다."(125) 더 나아가 지각적 경험의 주체가 한 육체와 관련맺는 것이 우연적이라면, 그것이 하여튼 어떤 육체와 관련맺는다는 것도 우연적이다. 이런 의미에서 육체없는 상태도 가능할 수 있다.2 이러한 측면에서 우리는 데카르트적 유산을 스트로슨에게서 볼 수 있다. 따라서 심적 술어에 대한 스트로슨의 데카르트적 견해는 그 자신의 결론을 침식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스트로슨이 강조하는 심적 술어의 독특성도 설득적이지 않다. 즉 심적 술어의 삼인칭적 기술과 일인칭적 기술의 의미가 동일하다는 보장은 무엇인가? 이러한 근거에 대해서 "그는 어떻게 왜 이것이 가능한지에 대해서 별로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 따라서 그의 접근에서 이것은 신비적인 것으로 남아있다."(126)3

주 1) 햄린은 비트겐슈타인이나 쉴릭에게서 어느 정도 찾아볼 수 있는 무주체 이론의 가장 적절한 예가 흄의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D.W.Hamlyn,Metaphysics,p.194-195.) 그리고 의식상태를 가진다는 것은 그러한 상태가 특정한 육체에 인과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집합에 속해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에이어나 파피트(D.Parfit) 등도 비슷한 주장을 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햄린은 자아에 대한 흄의 이론이 비일관적이듯이 마찬가지로 무주체 이론도 그렇다고 주장하고 있다.

주 2) 파생적인 의미에서 육화되지 않은 인간을 인정하는 스트로슨에 대하여 햄린은 이 경우와 죽은 인간의 경우가 다르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전자의 경우에는 여전히 의식 상태의 주체가 존재하는 데 반하여 후자의 경우에는 단지 물리적인 것만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햄린의 지적이 설득력을 가진다면, 심적 상태의 주체가 인간이 아니라 다른 무엇일 수도 있다.

주 3) "스트로슨은 자기 자신에 의해 느껴지는 것과 그에 관해 다른 사람이 관찰한 것이 동일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동일하다는 이 말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 동일하다는 것이 진정한 의미를 가지려면 그 동일한 것이 무엇인지 적극적으로 그 본질이나 의미를 밝혀야 할 것이다. 여기에 대하여 스트로슨은 구체적으로 더 이상 무엇을 언급하지 않는다."(이효범,{심리철학의 근본 문제},p.73-74.) 그러나 이 비판에 대한 가능한 답변이 우리가 스트로슨의 견해를 정리할 때 이미 사용한 의식상태의 귀속성에 대한 일반적 조건에 관한 비트겐슈타인의 답변이다. 햄린은 이 점을 칸트적 논점이라고 부르면서 다음처럼 정리하고 있다. "스트로슨의 개념에 선행하는 예를 칸트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즉 '나는 생각한다'라는 것은 우리의 모든 표상에 수반하는 것이며 덧붙여 그것은 모든 우리 행동에 수반하는 것이다."(199-200) 이러한 측면과 관련해서 햄린은 스트로슨의 이원론 비판에는 검증주의 의미론이 작용하고 있지만, 그러나 이러한 측면과 칸트적 논점을 반영하는 측면이 구분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햄린이 지적하는 이러한 측면이 분명히 나타난다고 할 수 있는 보다 성숙한 스트로슨의 이론은 P.F.Strawson,Skepticism and Naturalism,1985,pp.51-68.에서 찾아 볼 수 있다.